소설리스트

교사는 회귀해도 개고생이네-63화 (63/200)

[63] 63화.

그녀는 다시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처음 말을 했을 때보다는 훨씬 빨랐다.

나쁘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건.”

“그래도 다행입니다. 걱정했네요, 표정 보고.”

그리고 주현필을 살짝 봤다.

그는 ‘잘하고 있어.’라는 표정으로, 하지만 평소와 마찬가지로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했다.

“김윤지 원장님?”

“네?”

곧바로 대답이 나왔다.

좋다. 이럴 때일수록 더 직접 문제의 본질만을 파고들어야 한다.

“우리 쪽에서 약점 잡힌 것이 있습니까?”

이번에는 바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조규만 의원님께서 제안하신 건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별로 진행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 정도까지 일을 벌이실 분이라면 다음에는 더 큰 일을 벌이실 수도 있거든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조규만을 봤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언급된 내 말에 놀라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약간 뒤쪽이 서 있는 김현진 비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을 뿐.

다시 김윤지에게 얼굴을 돌렸다.

시간을 주겠다는 의미도 있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일인가요? 아까 의원님이 말씀하신 거는요?”

‘보여 준다’와 ‘잤다’라는 말.

엄청나게 큰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남자이기 때문이려나.

그녀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보여 준다’라는 것은 영상이나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단 말이 되고.

내 방에도 뭔가 설치를 해 두었던 것인가.

도대체 누가? 어떻게 그랬다는 건지…….

“맞아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죄송하죠. 이런 일까지 겪게 해 드리고.”

그리고 이제 김윤지와의 대화는 끝났다.

대충 조규만이 무엇을 가지고 김윤지를 저리 구워삶았는지는 확인했으니, 제안을 이야기할 때다.

자기 외조카의 그런 영상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다니, 정말 치가 떨리도록 무서운 사람이다.

“의원님, 제안은 잘 봤습니다만, 그 제안을 전부 그대로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각서 하나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영상 말인가?”

“네, 맞습니다.”

“자, 잠깐 기다려, 유 선생!”

주현필이 내 어깨를 살짝 잡아끌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나가서 시간을 가진 건 냉정하게 생각하란 의미였겠지.

그리고 지금 내가 저 제안을 전부 받아들인다고 말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내가 냉정을 잃은 모습으로 보였으리라.

하지만 나는 지극히 냉정했다.

오늘 중 최고로 냉정했다.

“제안은 잠깐 생각을…….”

“괜찮아요, 주현필 선생님.”

“허허. S 아카데미는 온전히 유현덕 소유가 아닌가. 여기 보호자로 온 건 이해하지만 업무와 관련한 대화에는 너무 끼어들지 마시게, 주 선생.”

주현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긴 지금 상황에서 참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그이리라.

나야 참지 않는다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평소의 그였다면 벌써 조규만의 이빨 몇 개는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진정을 조금 시켜야겠지.

“괜찮아요, 선생님.”

다시 한 번 그의 귓가에 조용히 말했다.

남자들끼리 무슨 짓이냐 싶은 모습이었지만 어차피 빛도 별로 들어오지 않아 이상하진 않았겠지.

아니, 더 이상했을까.

다시 조규만을 보고 말했다.

“각서는…….”

“당연하지. 허허. 각서가 굳이 필요할까 싶긴 하지만 말이야. 영상은 윤지가 사랑에 정신이 팔려 이익을 못 볼까 보험용으로 가지고 있던 거고.”

“이 자리에 있습니까? 영상 파일.”

“이 자리에 있지.”

완력으로 확 뺏어 버릴까.

하지만 상대는 국회의원이었다. 경찰을 부른다거나 해 버리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게 원본이라는 보장도 없고.

결국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김윤지?

그녀는 그의 외조카였고.

만약 제대로 영상을 삭제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조규만의 말을 따르리라.

그 말은, 이곳에 애초에 끌려온 사실 자체가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그대로 제안을 받거나, 아님 약간 추가를 해 드리고 싶은데 들어 보시고 생각을 한 번 해 보시겠습니까?”

“추가?”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대의 제안이 좋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

그리고 나는 미친 짓을 한 번 하려고 하고 있었다.

“네. 10% 50억이라 적혀 있는데요.”

“그렇지. 그럼 얼마나?”

“30%에 200억은 어떻습니까?”

“야, 유현덕!”

주현필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리라.

올바른 방향은 아마도 투자 비율을 줄이는 것일 텐데, 나는 그것을 오히려 세 배 올렸으니.

그나저나 과연 조규만이 200억이 있을까?

“허허. 이거 확실히 사업을 직접 하더니만 배포가 커졌네? 계산이 좀 이상하긴 하다만.”

“조규만 의원님만 하겠습니까. 어떠십니까? 30%면. 기업 공개로 시세 차익을 얻기 원하시는 거라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아무리 고문을 고용시킨다 하더라도, 지분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계셔야 힘이 실릴 것이고요.”

힘은 개뿔.

지금 조규만은 내가 S 아카데미 지분을 전부 가지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 내가 다른 사람의 투자를 받았을 리가 없다고 여기겠지.

그런데 사실 나 말고 다른 주주가 끼어 있다면?

그의 의도대로 고문 한 명으로 회사 운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사실 금액을 200억보다 더 높여 불러도 괜찮았다.

10%에 50억이라고 30%가 꼭 150억이어야만 한다는 규칙은 없었다.

기업 공개를 하면 곧바로 두 배 이상 뜰 확률이 컸고.

맥스스쿨의 기업 공개가 그러했다.

공개를 하자마자 네 배까지 곧바로 뛰어올랐고, 그에 따라 원래 지분을 보유했던 강사들 중 일부는 지분을 팔아 엄청나게 큰돈을 얻었다.

물론 이미도 원장이나 나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대주주의 입장이기 때문에 시장에 보유 지분을 곧바로 내놓을 수가 없다.

아무튼, 조규만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 시세 차익.

50억 원 규모의 10% 지분이라면 기업 공개 후 50%만 팔아도 그 돈은 회수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 정치 자금화 시킬 것이고.

이게 그가 그렸던 그림.

그리고 내가 그 위에 덧칠한 것은 규모를 30%까지 올리는 것이었다.

이건 사실 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주현필의 걱정처럼 썩 좋지 않을 수도 있었다.

굳이 내가 가져갈 이익을 나누는 셈이 되는 것이기에.

하지만 나에게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누구도 모르는 카드가 하나 있었다.

몇 주 전 윤주환 교육방송 사장과의 통화, 그리고 새로운 만남이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30%를 조규만에게 넘기고, 거기에 고문 자리까지 하나 준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들을 절대 이길 수 없으리라.

일이 이런 식으로 오묘하게 풀릴 줄은 몰랐는데.

참,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것 같다.

제4강 위기와 기회는 한 끗 차이지.

“요즘은 어떻게, 잘되 가십니까, 사장님?”

-덕분에 아주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하. 이거 확실히 촬영을 해 본 분들이라 아주 매끄럽게 진행이 되고 있네요.

윤주환 사장의 목소리는 잔뜩 들떠 있었다.

원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마냥 밝은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목소리는 기분이 좋을 때만 나오는 것이리라.

S 아카데미는 전적으로 조규만 의원의 사업 지원을, 그리고 맥스스쿨은 윤주환 교육방송 사장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는 그의 입장에서 그다지 손해 보는 결과는 아니었다.

만약 그가 이미도 원장을 통해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교육방송은 온전히 현직 교사들로만 강의를 채워야 했고, 그렇게 된다면 촬영을 포함한 강의 제작이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다행입니다, 사장님. 저희도 좋은 기회를 주셨는데 보답해 드리지 못했네요.”

-무슨 그런 말씀을. 덕분에 이미도 원장님께서 빠른 결단을 내려 주시지 않았습니까.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다니요. 그나저나 오늘 연락은 무슨 연유로…….”

이번 통화는 윤주환이 먼저 한 것이었다.

사실 그날 횟집에서 다 같이 만난 이후로 처음 온 연락.

이미도 원장이야 맥스스쿨 강사진 지원 문제로 그와 연락을 자주 주고받았겠지만, 일단 나는 교육방송과는 연락할 일이 없었다.

대신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조규만과 만나야 하겠지만.

-아, 참. 내 정신 좀 봐요. 하하. 깜빡 깜빡합니다, 나이가 들면. 유현덕 대표님. S 아카데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제 생각에는 시간 되실 때 한 번 만나 보시는 것이 어떠실까 생각하는데…….

“아, 아직 많이 부족한걸요. 아직 작은 벤처 기업 수준인데 너무 좋게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금융 위기 이후 제대로 된 벤처 기업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유현덕 대표님의 성공기는 젊은 친구들에게 큰 귀감이 될 거고요. 아마 연내에 저희 교육방송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갈 겁니다. 그때 잘 결정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한 번 만나 보시죠. 큰 힘이 되실 수 있는 분들입니다.

조금 궁금해졌다.

나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그런데 내가 직접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를 만나보고 싶어 한다고?

뭔가 조금 이상했다. 원래 이런 만남은 아쉬운 사람이 부탁을 하는 법인데.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거나.

“하하. 누구라도 힘이 되실 상황입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뵙는 것이 좋다고 사장님께서 생각하신다면 한 번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신데요?”

-하하. 듣고 놀라실까 봐 미리 말씀은 못 드리겠고, 이번 주말 시간 어떠신가요?

“주말이요? 아, 주말에는 수업이 있어서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이것이 정말 기회일까.

확신만 든다면 당연히 만나러 가야 했다.

하지만 그 확신이 들지를 않았다.

누군가가 나와 연락을 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크다는 것이고, 그에게 받을 수 있는 것은 뭔지 알 수가 없다는 의미였다.

누군지 안다면 또 모르지만…….

-아쉽군요. 그럼 바로 다음 주에 약속을 잡으시죠. 조규만 의원님과의 과거가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그 부분에도 도움이 되실 분입니다.

조규만과의 과거?

이미도 원장을 통해서 들었나? 아니면 그가 가지고 있는 개인 정보 라인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전화를 끊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힌트를 던져 주었다.

-S 아카데미와 유 대표님의 미래에 아주 큰 힘이 되실 분입니다. 행운을 타고 났다는 말이 유 대표님을 가리키는 말이군요. 하하. 아무튼 그럼 다다음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