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62화.
“이렇게 치졸하게 나오시는 겁니까.”
“치졸하다니.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굳이 가리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 주게. 나도 이걸 정말로 써먹고 싶진 않아. 말만 잘 들어 준다면 말이야.”
정말로 써먹는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
유포를 시키겠다는 건가.
공교육에 비하면 사교육은 이런 종류의 도덕적 지탄을 크게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건 사업적인 부분.
지금 조규만이 나에게 협박하는 건 바로 김윤지의 인생을 걸고 하는 것이다.
“정말 미쳤군요.”
“어허. 지금 나한테 그런 식의 발언을 하는 건 좋지 않네만. 뭐, 계속 감정적으로 갈 것 같으니 일 이야기를 바로 꺼내 주지.”
“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는 뒤에 서 있던 김현진 비서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던 것처럼 김현진은 바로 가방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저 봉투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
뭐가 들어 있기에 자신의 외조카의 명예를 걸고 이런 도박을 한단 말인가.
내가 분명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리라 믿는 것일까.
“표정 좀 풀어도 돼. 나는 크게 무리한 걸 요구하지는 않으니깐. 조금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이런 방식을 동원한 것이니…….”
그러면서 나에게 만지작거리던 서류 봉투를 건넸다.
빳빳한 봉투는 많이 두껍지 않았다.
천천히 입구를 열고 안에 있는 서류를 꺼내는데 A4용지 세 장이 나왔다.
“별것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게.”
“이게 뭡니까?”
“자네가 가지고 있는 S 아카데미에 대한 향후 투자 계획서지.”
실내가 밝지 않아 읽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주현필이 곧바로 내가 읽는 부분 뒤의 종이를 가져가 확인했다.
종이는 투자 계획서 1부, 주식 양도 양수에 대한 계획서 2부였다.
제목으로만 보자면 조규만은 고작 내가 100% 보유하고 있는 S 아카데미에 투자를 하고 지분을 받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었다.
자신의 외조카를 납치하다시피 하고 협박까지 해 가며.
“고작 이 짓거리를 하시려고…….”
“고작이 아니야. 의원님, 이 부분은 따로 유 대표와 대화를 나눌 시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주현필이 나를 다시 한 번 막아섰다.
그리고 내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수치를 제대로 살펴봐야 해.”
그리고 워낙 조용한 공간 탓인지 조규만의 귀에까지 그 이야기가 들린 것 같았다.
“수치를 보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겠나. 날로 먹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게. 숟가락 하나 얹고 제약 하나 만들어 두려고 하는 것이니. 허허.”
나는 이 상황에서도 김윤지의 상태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괜찮은지 걱정돼 미칠 것만 같았다.
서류를 들여다보는 내내 서류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질 않고 그녀만 힐끔힐끔 확인하며 빨리 이 상황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글쎄, 내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몰랐다.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사랑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경우에도 특별히 내가 그녀에게 큰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막상 위기가 닥쳐오자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은, 내가 그녀를 보호하고 싶어 한다는 것.
조규만이 위험한 사람이지만 그녀는 그의 외조카이기에 상대적으로 방비를 소홀히 했던 것도 있었다.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나 자신의 안전, 아니면 주현필이나 이미도 원장의 안전을 생각했던 것의 절반만 김윤지에 쏟아부었다면 지금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조규만과 맞서지 않았더라면…….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주현필이 내 어깨를 잡아끌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얼굴로 불어왔다.
답답함이라는 심연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기분.
하지만 상쾌하지는 않았다.
문제를 해결하고 나온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잠시 멈춰 두고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현필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종이를 들고선 나에게 말했다.
“괜찮은 거야? 상태가 좋지 않은데?”
“괜찮아요. 그나저나 얼빠진 모습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하루 이틀 보냐.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할 거야? 서류 봤어?”
서류에는 S 아카데미의 지분 10%를 조규만의 비서 김현진에게 넘기는 조건이 담겨 있었다.
왜 자신이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김현진이냐고?
그는 국회의원이기에 재산을 공개해야 할 시점이 있다. 아마 차명 계좌 같은 것이겠지.
재산이 너무 많아도 썩 좋진 않을 것이다.
아무튼 10%에 대한 금액은 50억 원.
연 매출 100억에 순익도 30억을 넘긴 상황이니 그 정도 금액이면 현 시장가 정도이리라.
물론 기업 공개를 한 것도 아니고 외부 인사로부터 투자를 받은 적도 없기에 어느 정도가 적정 금액인지는 모를 일.
“금액은 나쁘지는 않던데요?”
“그게 문제가 아냐. 제대로 안 봤네, 역시. 정신 좀 차려. 호랑이 굴에 정신 차리고 들어간다고 나올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신 빼 놓고 들어가면 어떡해?”
“뭐가 더 있었나요?”
그는 들고 있던 서류 한 장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평범한 투자 관련 서류라고 생각했는데 아래쪽에 단서 하나가 적혀 있었다.
“고문을 두라고요? 누구를요?”
“누구겠어?”
모르겠다.
하지만 주현필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생각을 하자, 생각을.
조규만 본인인가?
국회의원이라고 해도 학원의 고문 자리는 가능할 테니…….
“어휴. 엄청 빠릿빠릿하게 머리 돌아가더니만 오늘은 왜 그래? 김윤지 원장이랑 정말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아니에요, 그런 거. 걱정되지도 않아요, 선생님은?”
“당연히 걱정되지. 그런데 지금 그걸 걱정하고 있을 때야? 빨리 끝내고 데리고 나가야지. 게다가 조규만이랑 그녀는 친척이라고.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닐…….”
“지금 저 상태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세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가 버렸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조규만 한 대 때려 버리고 그녀를 데리고 나오고 싶었다.
지금 나만 이렇게 나와서 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미안하고 불편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지금 상황이 해결되진 않으리라.
그렇게 허술한 사람도 아니고.
주현필은 냉정했다.
아주 잠깐, 그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제대로 본 것이 맞을까 싶을 정도의 찰나의 순간.
곧 평소의 무표정한, 어찌 보면 무서워 보일 수도 있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어쩔 수 없어! 여기에서 제대로 우리가 풀지 않으면 상황은 더 안 좋아질 뿐이야.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녀를 완력으로 빼 오고 뒷감당을 하던가, 아니면 협상을 해서 조규만이 물러서도록 하는 수밖에 없어.”
그의 말이 옳으리라.
완력으로 빼 오는 것도 가능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조규만은 나이 든 중년 아저씨에 불과하고 옆에 있는 김현진은 그리 강하지 않아 보였다.
우리에게는 주현필이 있었고.
나도 최근 계속 그에게 이것저것 배워 두었기에 내 앞가림을 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날 수 있을까.
김윤지를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까.
지금 그녀는 스스로 나갈 의욕도 잃은 것 같아 보였다.
조규만은 분명 ‘보여 줄 것’이 있다고 했다.
내 방 안에서 그녀와 내가 같이 있었던 것.
그것과 관련한 영상이라면…….
“일단 무슨 카드를 가지고 저리 무식하게 행동하는지 한 번 확인이나 해 보죠?”
이게 답이었다.
왜 이렇게 간단한 걸 찾는데 오래 걸렸냐 싶겠지만, 원래 사람이 충격을 받거나 긴장을 심하게 하다 보면 머리가 돌지를 않는다.
우리가 제안을 받지 않을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제안을 받는 경우에는 그가 얻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다.
이 정도는 확인해 주겠지.
“들어가시죠.”
주도적으로 나서야 했다.
그렇게 해서 이곳까지 올라왔다.
지금 긴장된다고, 또는 위험에 빠진 것 같다고 주현필에게 판단을 맡기려 하면 안 됐다.
그건 내가 해야 할 결정을 그에게 미루는 것일 뿐이고, 전생부터 지금까지 그리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갑작스런 나의 변화된 태도에 주현필도 조금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그래, 이게 진짜 내 모습이지.
하지만 이제까지 내가 이렇게 주도적으로 움직일 때는 대부분의 것들이 계산되어 있었고 플랜 B도 있는 상태였지만, 지금은 그렇지는 않았다.
어떻게 이 상황을 풀어야 할지, 아니 애초에 지금 상황이 얼마나 좋지 않은 상황인지를 알아야 생각을 할 수 있으리라.
이게 답이었다.
그녀의 우는 모습, 그리고 붉어진 볼을 보고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그래.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그의 말이 옳았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할 때다.
아직 맞닥뜨리지 않은 미래에 불안을 느끼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김윤지…….
그녀가 나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일지, 그 답에 따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의 크기가 달라질 것이다.
아직 그것을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생각보다 큰 존재라는 건 아까의 내 긴장감과 두려움, 그리고 분노로 확인했다.
그리고 나와 주현필은 터벅터벅 힘없이 나올 때와는 다르게, 비장한 표정으로 창고로 들어섰다.
끼익.
문을 잠가 놓지는 않았기에 이번에는 내가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단지 철문 한 겹으로 분리된 공간이지만 밖의 공기와는 완전히 다른 내부의 기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전보다는 확실히 편해졌다.
이번에는 그들이 있는 곳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햇빛에 적응한 눈이 어둠에 다시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위치를 똑바로 보고 걸어 들어갔다.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답을 가져 왔겠구먼?”
조규만.
그래, 답을 가져왔다.
당신이 원하는 답일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김윤지 원장님, 말씀 하실 수 있으세요?”
나는 쿨 하게 조규만을 무시하고 김윤지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겉보기에는 큰 문제는 없어 보이지만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고, 말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어느 정도의 충격인지 대충 확인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조규만에게 내가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줘야 했다.
김윤지는 곧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이제까지 보아 왔던 당당한 그녀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 없으리라.
굳이 여성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강한 남자라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니.
“허허. 너무 걱정하지 마시게. 대답 좀 해 줘라, 윤지야. 내가 너한테 그렇게 심하게 한 것도 아닌데 오해하겠어.”
그리고 잠시 뒤, 그녀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네. 미안해요, 유 선생님.”
평소 들었던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전혀 아니었다.
힘이 너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 편안해졌다.
“아직 미안하실 일이 생길지 아닐지는 모릅니다. 맞으셨어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일 수 있겠지.
하지만 이게 궁금한 건 아니었다.
얼굴만 딱 봐도 두어 대 맞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녀가 이 상태가 되지는 않았으리라.
어떤 두려움인지, 조규만이 언급했던 ‘보여 줄’ 것이 무엇인지 그녀에게서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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