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61화.
“자, 협상에는 카드가 있어야겠지. 그리고 내 카드는 바로 너야.”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는 그녀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이걸 도대체 어떻게…….”
“자, 이제 너는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지금처럼 말고, 훨씬 더. 알겠니?”
영상이 촬영된 장소는 유현덕의 원룸.
그리고 그 영상에 나온 두 명은 바로 그녀와 유현덕이었다.
“정말……. 이런 사람이었어요? 완전 또라…….”
짝!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책상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이 공간에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조심하렴. 그래도 외삼촌이니.”
* * *
조규만의 직통 번호는 당연히 하나 가지고 있었다.
같이 일을 해 보자고 연락한 쪽은 그쪽이었기에, 자신과 비서 한 명의 명함을 줬던 것.
가는 길에 그의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역시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리고 곧바로 조규만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때, 만약 그가 김윤지를 데려간 거라면 연락이 되지 않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바로 통화가 이루어졌다.
-유현덕 대표 아니신가? 허허. 바로 얼마 전에 연락을 한 번 했던 것 같은데, 웬일인가?
너무 천연덕스럽게 전화를 받아 혹시 엄한 사람을 의심한 것일까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운전을 하던 주현필의 얼굴을 봤는데, 그가 인상을 확 구기며 입으로 ‘분명해.’라는 모양을 만들었다.
“아, 하하. 의원님, 급한 일이 조금 생겨서 연락 드렸습니다.”
-급한 일? 뭔데? 나한테 물어볼 그런 일인가?
여유.
하지만 확인해야 할 것은 확인해야지.
그나저나 김윤지가 연락 두절로 사라진 이후로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지 모르겠다.
그냥, 가까운 사람이 위험에 빠졌을 지도 몰라서?
가까운 사람이라.
그녀는 나에게 얼마나 가까운 사람이었을까.
별일 아닌 걸 수도 있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혹시 김윤지 원장과 연락 되십니까?”
이 정도라면 아마 그가 연관되어 있지 않을 경우 그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아니면, 혹 그가 관여된 일이라면 제발 실수를 하기를.
이게 내가 기대하던 바였다.
간절히 기대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기대하는 것처럼 진행되지 않는다.
-윤지? 윤지 나랑 같이 있는걸. 허허. 내 조카라는 걸 잊은 거야?
같이 있다?
이거야말로 ‘좋거나 나쁘거나’이다.
우리와 약속을 급히 잡고 나서 그것을 깨고 사라진 그녀.
조규만과 함께 있다면…….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게다가 그가 이렇게 여유 있게 그 사실을 말할 정도라면.
“지금 어디십니까?”
-왜? 이리로 오려고?
“그냥 평범한 가족 내 문제이십니까?”
-가족 내 문제이긴 하지. 허허. 하지만 유 대표도 함께 보면 좋겠구만.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전혀 예상이 되질 않았다.
경보음은 계속 울리고 있지만 이게 위험한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웠다.
-왜 대답이 없어? 참, 윤지랑 통화할래?
그리고 잠시 뒤, 전화기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여보세요? 김윤지 원장님?”
-이제 올 생각이 조금 들어?
“야 이 개새끼야!”
* * *
조규만이 우리를 부른 곳은 교외에 있는 웬 낡은 창고였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우리는 차를 세우고는 ‘함께’ 문을 두드렸다.
곧 안쪽에서 삐걱거리며 잠금장치를 푸는 소리가 났고, 문이 열리고 처음 보인 얼굴은 조규만은 아니었다.
하긴, 그는 끝판 왕이니 문을 열어 주는 일 따위는 아랫사람을 시켰겠지.
그나저나 내부도 외부만큼이나 오래되어 보였다. 무슨 국회의원이나 되는 사람이 모양 빠지게 이런 폐 창고 같은 곳을 쓰는지.
아니면 영화를 너무 많이 본 사람인가?
주현필이 먼저 들어가기를 바랐지만, 그는 내 뒤를 따라 들어가겠다고 했다.
먼저 들어가면 그만큼 위험하다. 나는 이런 일에는 영 자신도, 경험도 없었고.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주현필이 갑작스레 당하면 대책이 없으리라.
보험으로 서울에 있는 이미도 원장에게 연락을 해 둔 것은 당연했고.
단, 혹시라도 김윤지에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바로 신고를 하지는 않기로 했다. 신고할 만한 상황인지 아닌지도 파악이 안 됐고.
조규만이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문을 열어 준 것은 김현진 비서였다.
그리고 너무도 차분하게, 마치 이런 일을 여러 번 해 본 사람처럼 우리를 안내했다.
안쪽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공장 자재를 보관하는 창고였는지 사람 머리 한참 위 높이에 달려 있는 조그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전부.
그리고 그리로 들어오는 빛줄기에 시멘트벽이 비쳐 보였다.
“빨리 왔구먼. 이리로 오시게. 이런 음침한 곳으로 불러낸 것을 이해하게.”
목적을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이미지로는 음험한 목소리를 상상할지도 모르지만,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밝았다.
마치 노인은 노인인데 어린아이의 말투를 가진 것 같은 목소리와 말투.
맞지 않는 그런 외모와 목소리, 말투가 오히려 불편한 감정을 마구 자극했다.
나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조심스레 걸어 들어갔다.
밝은 외부에 있다가 갑자기 어두워져 시야가 잘 잡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위축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안쪽으로 서너 걸음 들어가자 눈이 조금 익숙해지며 중앙에 두 명의 실루엣이 보였다.
“흑흑…….”
그리고 그제야 조규만의 목소리와 우리들의 발걸음 소리 말고 다른 소리가 들렸다.
김윤지였다.
“김윤지 원장님?”
“자, 자. 어서 이리로.”
조규만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의자 하나가 있었다.
횡하니 아무것도 없는 창고에 책상 하나와 의자 셋.
의자 하나에는 김윤지가 이미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의자는 조규만이 앉을 것 같았다.
그리고 책장을 사이에 두고 내 쪽에 조규만이 가리킨 빈 의자 하나.
나는 의자 뒤까지 성큼 성큼 걸어갔다.
“뭐 하는 짓입니까, 이게?”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을까.
조규만이 “허허.”하고 웃더니 다시 한 번 의자를 가리켰다.
“김윤지 원장님, 같이 가시죠.”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흐느끼고 있었다.
정말로 흐느끼고 있었다.
이제까지 봐 온 그녀의 성격으로는 그녀가 이렇게 약한 모습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이미도 원장의 젊은 버전이었다.
일을 함에 있어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사람.
하지만 다른 사람을 짓밟는 그런 카리스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이런 것들 중 상당수가 고정관념일 것이다.
세련되고 차가운 외모로부터 오는 고정관념.
깔끔하고 결단력 있는 일처리에서 보이는 고정관념 같은 것들.
“방금 왔는데 바로 가나. 조금 앉아서 이야기나 하고 가지.”
“이렇게 강제로 자리를 만들어 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겁니까.”
“강제로 만들기는. 윤지야 내 외조카고 자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 그렇지 않나?”
사실은 사실이다. 내가 그녀와 만나는 사이도 아니니깐.
이런 상황에서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나 때문에 이런 꼴이 된 것이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머리에 울리는 경고음.
내 직감은 이 상황에서도 협상을 하면 안 된다고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너무 불리하다.
김윤지라.
나의 그녀에 대해 감정이 크면 클수록 내가 가진 카드는 줄어들고 조규만이 가진 카드는 커진다.
어떡하지.
“앉지 않겠다면 내가 먼저 앉지.”
조규만이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그는 책상 위로 팔꿈치를 기대고는 나에게 몸을 기울였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현필이 내 등을 툭툭 쳤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것, 무슨 요구가 있는지는 들어보는 것이 옳으리라. 게다가 김윤지를 두고 갈 수도 없는 상황.
그녀의 옆에 조규만이 앉았고, 뒤에는 김현진 비서가 서 있었다.
“윤지야, 네가 말할 테냐?”
“…….”
둘이 뭔가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리고 빛이 별로 없어서 확실하진 않았지만 뺨이 조금 붉어 보였다.
뺨이 붉다?
“설마 때리신 겁니까? 무슨 일인데요?”
목소리가 절로 올라갔다.
다시 주현필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슨 일로 이런 식으로 부르신 겁니까, 의원님.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주현필이 흥분하고 있는 나 대신 말을 해 주었다.
원래 흥분은 그가 잘하는데, 오늘은 의외로 침착해 보였다.
“윤지가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으니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하지. 유현덕 대표, 자네는 우리 윤지랑 어떤 관계인가?”
그러면서 그가 그녀의 등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전기 충격이라도 받는 듯 몸을 비틀었고.
역시 뺨이 붉은 건 그에게 맞아서 그런 것 같았다. 애도 아니고 무슨…….
“관계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만나는 사이가 아님에도 그러면 함께 잤단 말인가?”
뭐라고?
도대체 이 아저씨가 무슨 민망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주현필도 나를 바라보았는데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었고.
내가 그녀에게 마음이 아예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런 적은 없었다.
둘이 따로 만난 적이 별로 없었는데.
그리고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처음 만난 날.
내 방을 그녀는 봤다고 했었고.
“아무 대답이 없으니 직접 보여 줘야 대화가 되겠구먼, 이거.”
“안 돼요!”
아무 말 없이 있던 김윤지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거부의 의사를 조규만에게 명확히 표시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분노와 함께 무력함이 느껴졌고.
그나저나 뭘 보여 준단 말인가.
“뭘 원하시는 겁니까?”
다시 주현필이 나서 주었다. 지금 나도 그렇고 김윤지도 그렇고 둘 모두 약간의 패닉 상태로 보이리라.
혼자 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진정이 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같았고.
“역시 아이들과는 다르구먼, 주현필 선생은. 하하. 그래도 유 대표랑 대화가 되어야 하는데.”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 내릴 수 있는 사안은 없습니다. 아실 만한 분께서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셨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그건 내 스타일이 그래서 그런 거고. 이해하시게나. 허허. 유 대표, 대화는 자네와 해야겠네. 괜찮겠나?”
빨리 이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야 했다. 도대체 뭘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보여 준다는 조규만의 말에 그녀가 저토록 반응을 하는 건지.
머릿속에서는 온갖 상상이 다 떠오르고 있었다.
‘함께 잤다’와 ‘보여 준다’라.
역시 첫 만남 자리가 깔끔하게 끝이 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녀는 나에게 전혀 그날에 대해 말하려고 한 적이 없었지만, 나도 뭔가 일이 있었나 싶기는 했었으니.
그래서 그녀에게 그날에 대해 물어봤던 것이었고.
그리고 ‘보여 준다’라는 것은 설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