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58화.
-네. 유환 선생님이랑 같이 봤을 때요?
“혹시 그날, 저희 집에 들어오셨나요?”
들어왔다고 대답하면 뭘 어쩌려고, 현덕아.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면 또 그 어색한 분위기는 어쩔 거냐.
-응? 네. 호호. 정신없이 어질러진 방이요. 기억나요.
아, 역시나.
그러면 혹시…….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은데 그녀의 반응을 보니 왠지 별일은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만약 뭐가 있었다면 그녀가 웃고 편하게 대답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지.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서 조금 더 확인을 해야 하나?
확인을 하면 또 뭘 어쩌려고 그러냐. 이 멍청아.
-또 말씀이 없으시네. 그나저나 유현덕 선생님?
“네?”
-학교에 들어갈 강의들 무료로 풀겠다는 것 조규만 의원님께 말씀 드리셨나요?
다행인가. 그녀가 먼저 화제를 돌렸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풀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나의 이 어색함은 일단 진정시킬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멍청아.
“아뇨. 말씀 안 드리려고요.”
-언제까지?
“음, 아마 학교나 관할 교육청과 계약 체결할 때까지요?”
체결 전에 조규만 의원이 내 계획을 안다면 자신이 내 목에 드리운 그 올가미가 풀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을 진행하자 할 수도 있긴 하지만, 뭔가 다른 올가미를 만들 사람이라는 생각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이고.
그는 분명 위험한 사람이었고, 위험한 사람을 싸워 이기지 못한다면 일단 위험 요소를 몰래 없애야 했다.
-그럼 그때까지는 나도 입 닫고 있어야 하겠네요?
“당연하죠. 설마 가서 말씀드리려고 하셨던 건…….”
-아니요. 외삼촌은 이제 성공 대입학원이라는 배에 타고 계시지 않은 걸요. 그리고 이 학원은 선생님의 배와 연결되어 있고요.
“저희 무너지면 같이 무너집니다, 원장님.”
-알고 있어요.
그녀가 무너지는 것을 조규만 의원이 보고 있을 리는 없었다.
성공 대입학원은 어쨌든 그가 세운 학원이었다.
그리고 아마 S 아카데미가 무너지지도 않을 것이다.
조규만 의원이 씌운 올가미는 나에게만 걸쳐져 있는 것이지 우리 회사와는 무관했으니.
다만 내가 그 올가미에 목이 매여 쓰러지면 꼭대기가 빈 S 아카데미에게 곧바로 이빨을 드러낼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렇게 대답을 한 것은 이제 조규만 의원보다는 나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확인이나 한 번 해 보고 싶었어요. 방금 전에 외삼촌한테서 연락이 와서요. 저한테만 따로 보자고 하시는 걸 보면 일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잘하셨습니다. 그냥 준비 잘되고 있는 것 같다고 해 주세요. 실제로 준비는 완벽합니다. 지금 당장 계약해도 될 정도로요.”
-알겠어요. ‘바로 계약 가능하다.’까지. 걱정하지 마세요. 호호. 그럼 저는 이만 수업 준비하러 가 볼게요.
결국 정말 확인하고 싶었던 부분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날 그녀가 내 방을 봤던 것까지는 확인했으니 절반은 성공한 것이려나?
그나저나 누나 동생 하자고 한 것은 그녀인데, 하루 만에 이리 엎어져 버리다니.
정말 사람 일 참 모르는 일이다.
* * *
시간은 엄청 빠르게 흐른다.
쳇바퀴 돌리는 듯한 일상을 보내던 전생은 지루하게 느렸는데.
바쁘면 바쁠수록 한 해 한 해가 마치 하루 지나가듯 넘어가 버리고, 한참을 와서 뒤돌아보면 ‘언제 이렇게 많이 지나갔지.’ 하고 깨닫고 아쉬워한다.
그래도 굳이 지금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겠지.
지금보다 더 잘할 수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유현덕 대표님?”
“네, 교장 선생님?”
“이렇게 계약 체결, 괜찮으시겠습니까?”
하루 두 개의 강의, 한 달을 4주로 쳤을 때는 총 40개의 강의를 학교에 무료로 공급하겠다는 계약서 내용.
이 내용은 바로 전날까지 비밀이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준비한 계약서를 하루 먼저 받고 우리 쪽에서 수정하여 다시 들고 갔던 것이었고.
학교 입장에서 월 100만 원이든 200만 원이든 고정적 지출이 생긴다는 것은 큰일이었다.
밖에서 보면 그게 큰돈이 아닐지라도 예산은 한정되어 있고 지출은 변화무쌍하기에…….
그런데 그 변화무쌍한 지출도 필요할 때마다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리 1년 계획을 세우고 예산 신청을 해서 그 안에서 쓰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학교에 큰 것을 주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액수 상으로는 크지 않지만, 예산 안에서 모든 것을 운영해야 할 학교 입장에서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사업에서는 필요한 이상으로 예산이 책정되고 쓰이고, 또 어떤 사업에서는 반드시 필요한데 예산은 턱없이 부족한 곳이 학교다.
“저희 입장에서야 감사하지만…….”
“저희도 나쁘지 않습니다. 공교육 발전에 이바지하면서 동시에 저희 업체 홍보도 되니까요. 강의는 가장 인기 있는 강사님 초빙해서 촬영했습니다. 들어간 비용은 전액 저희 쪽에서 부담하고요. 학교에서는 단지 강의를 잘 사용해 주기만 하셔도 저희는 감사한 거죠.”
“그렇겠죠? 하하. 이거 조규만 의원님께서 아주 훌륭하신 동업자 분을 두셨습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조규만의 동업자인 셈이다. 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이따가 계약서 작성 끝나고 곧바로 전화가 걸려 오지 않을까? 자기에게 들어가는 후원금은 어찌 되는 거냐고 말이지.
“의원님께서 우리 지역 공교육 발전에 큰 관심이 있으시더군요. 저는 그냥 도와드리는 입장일 뿐입니다. 저야말로 대단하신 교장 선생님들을 미약하나마 돕게 되어 기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식사는 저희가 대접하죠.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강진욱 교장 선생님. 그리고 주정란 교장 선생님?”
“물론이죠. 큰일을 해 주셨는데 당연히 시간 내야죠. 호호.”
감회가 새롭다.
전생에서 어렵게만 느껴지던 교장 선생님들이신데 지금은 오히려 그들이 나를 어렵게, 아니면 고맙게 생각하다니.
학교 다섯 개, 그리고 추가적으로 다섯 개 학교, 총 열 곳의 학생들 숫자는 만여 명에 달한다.
이들에게 강의 시작 부분, 그리고 끝 부분마다 우리 S 아카데미를 인식시켜 준다면 파급력은 상당할 것이다.
물론 이걸 초창기에 했다면 아주 좋았겠지만 말이지.
* * *
“뭐? 무료로 풀었다고?”
“네, 방금 그렇게 계약서 작성했다고 유주현 교장 선생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흠……. 이 녀석 무슨 꿍꿍이지.”
자신의 사무실에서 조규만 의원은 김현진 비서와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이런 저런 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지만 오늘은 유현덕이 올가미에 걸리는 날.
올가미가 잘 매여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S 아카데미를 써먹을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웃기지 않은가.
자신의 회사도 아닌 것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여기다니.
하지만 이것이 바로 조규만의 힘이었다.
물론 국회 입성 직전 크게 한 방을 먹긴 했지만.
이 계획이 특별히 유현덕을 노리고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 녀석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방 먹고 무너지기 바로 전 자신은 성공적으로 학원가에서 정계로 진출했다. 진 싸움이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들려오는 유현덕에 대한 소식들.
그중 대부분이 말도 안 되게 운이 좋아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돼 먹은 녀석이야, 이놈은?”
한두 번은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성공이 다섯 번, 열 번이 되면 단지 운이 좋아서 이뤄 냈다고 할 수 있을까.
보통은 부러워하거나 친해지려고 하겠지만 그는 달랐다.
지금 커 가는 이 싹이 자신에게 이득이 될지, 아니면 해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나, 해가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작을 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생각에 김현진 비서도 동의했다.
김현진은 40대 초반, 굵직한 정치인들의 비서로 10년 넘게 활동을 해 온 베테랑이었다.
그리고 그는 새로 국회에 입성한 조규만 의원을 눈여겨보았다.
이게 웃길 수도 있는 것이, 사실 조규만도 김현진을 자신의 비서로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들 둘은 중요한 성향 하나를 비슷하게 가지고 있었다.
‘욕심’.
인간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누구나 욕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 둘의 욕심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강했다.
조규만이 자신의 계획을 방해할 수 있는 유현덕을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해 처리하려고 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
“아무래도 정말로 뇌물 수수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파격적이네요.”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야. 단순히 돈 욕심만 있다면 이런 제안을 할 리가 없어. 아니면 아주 장기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거나.”
장기적인 계획이라면 가능했다.
단순히 홍보를 위한 참여.
그런데 유현덕이 그 정도 돈을 모았을까.
맥스스쿨 투자 건도 그렇고 계속 어딘가에 돈을 쏟아붓는 형국이었는데, 분명히.
“현금이 생각보다 좀 있나 보네요. 하긴 S 아카데미 성장세가 유난하긴 합니다. 맥스스쿨 강재훈 대표도 무너뜨린 것을 보면 말입니다.”
“우리가 걸어 놓은 올가미는 완전히 뺐구먼. 그럼 남은 거는…….”
“후원금 액수입니다. 어느 정도나 넣을지 모르기에 아직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여차하면 다른 업체를 추천하겠다고 할 수도 있고요.”
그게 과연 유현덕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새로운 업체를 지원해서 밀어 올리는 것은 충분히 그로써 가능한 일이겠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이 행운 덩어리인 유현덕을 잡을 수 있느냐였다.
시작부터 사실 자신의 계획은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유현덕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돕지 않을 경우 국회의원의 지원을 받는 새로운 경쟁 업체가 떠오를 것이고, 좋지 않은 시점에 세무 조사까지 받을 위험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만약 비공식으로 자신에게 후원금을 보내면, 그 순간 유현덕은 자신을 계속해서 돕지 않으면 부정 상납이나 뇌물 등으로 털릴 수 있는 올가미에 걸리는 것.
양날의 검이기는 했으나 이건 쓰지 않고 그냥 위협용으로 좋은 검이었다.
하지만 유현덕이 막판에 학교로부터 돈을 받지 않는 계약을 하면서 상황이 틀어졌다.
자신에게 얼마만큼의 후원금을 보낼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렇게 된 거, 후원금이나 공식적으로 많이 받아야겠네.”
“네. 그리고…….”
항상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던 김현진이 잠시 머뭇거림을 보고 조규만은 무슨 생각이기에 그러나 싶었다.
어찌되었건 자신보다 정계에 오래 있었던 사람이기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고.
그가 머뭇거릴 정도면 뭔가 할 말이 중요하단 의미인데.
“오늘 교육방송과 맥스스쿨이 업무 협약 체결을 했다고 합니다.”
이건 사실 이쪽에서 전혀 모르던 일이었다.
유현덕의 협조를 받으면 그가 대주주로 있는 맥스스쿨 또한 같이 움직이리라 생각하고 신경을 못 쓴 부분도 있었고.
그런데 맥스스쿨 이미도 원장은 독자적으로 조규만의 구상과는 대척점에 있는 교육방송과 업무 협약 체결을 했다니.
“뭐야? 이 자식들이……. 당장 김윤지 전화해서 이리로 오라고 해! 이런 낌새가 있으면 알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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