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57화.
“거짓말은……. 누구랑 마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술 잘하지도 못하잖아.”
S 아카데미 첫 회식 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주현필이 나를 부축해서 집까지 데리고 가 줬지.
이미도 원장도 같이 있었는데, 중간에 막 전봇대 잡고 토하고.
그러고 보니 김윤지도 일전에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그녀와의 첫 술자리?
수학과 유환 선생님이 만든 자리였는데.
“알겠습니다. 하하.”
“그나저나 S 아카데미 재정 상태는 어때? 무리 없이 돌릴 만해?”
“아주 좋죠. 이번에 조금 손해는 나겠지만, 들어오는 돈이 커서 충분히 버티고도 남습니다. 유환 선생님은 오셨던가요?”
“유환? 온 것 같던데? 갑자기 걔는 왜?”
“아니에요. 한동안 못 뵌 것 같아서 강의실 놀러 가려고요.”
주현필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갔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날 나보다는 조금 멀쩡했던 유환 선생님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필름이 끊겨서 기억이 나질 않았는데, 내가 집에 혼자서 잘 들어가긴 했던 건지 말이다.
유환 선생님의 강의실은 내 강의실과는 끝과 끝이었다.
복도로 나와 지나가며 막 출근하고 있는 다른 과 선생님들과 짤막하게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목적지 앞.
똑똑.
“네, 들어오세요.”
“선생님! 어떻게 지내셔요?”
“이게 누구야? 대표님 오셨네요. 하하.”
같은 건물, 같은 층에 있으면서도 각기 개별 플레이를 하기 때문에 지나치며 만나는 것 외에는 따로 볼 일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주현필은 신성 학원의 사실상 원장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유환 선생님은 강사로 돈을 버는 것 외에는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이, 참. 대표라니요. 저도 신성 학원 강사인걸요.”
“그래도. 잘 지내는 것 같던데? 우리는 바쁜 게 좋은 거야.”
“선생님이야말로 돈은 잘 벌고 계셔요?”
“나? 나야 뭐 덕분에 많이 벌고 있지. 하하.”
이런 의례적인 인사말들.
궁금한 걸 해결하려 왔으나, 뜬금없이 오랜만에 찾아와서 그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보기 좋지 않으리라.
그런데 그가 먼저 그녀를 언급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일.
“그나저나 김윤지 원장하고는 어때?”
“네?”
그리고 내 대답을 가만히 기다리는 모습.
내가 뭘 말해야 하나?
“이거 왜 이러셔? 아직도 서로 원장님, 선생님, 하면서 지내는 거야?”
아, 이 사람은 그때부터 설마 나와 김윤지 원장 사이에 뭔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아니 무슨 학원에서 강의만 하는 프리랜서들이 눈치들은 이렇게 빠른지.
생각해 보면 주현필이나 이미도 원장, 그리고 유환 선생님까지 다들 무서운 사람들이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그래도 성공 대입학원 원장님이신걸요.”
능청스럽게 넘어갔다고 생각했으나, 유환 선생님의 표정은 왠지 뭔가 눈치챈 것 같아 보였다.
“아무튼, 저 하나만 여쭤보려고 왔어요, 선생님.”
이럴 때는 빨리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려야…….
그런데 내가 물어보려고 했던 것도 김윤지와 관련된 이야기잖아!
그의 표정을 보니 이제는 실실 웃기까지 했다.
“야, 이 바닥에 내가 이어준 커플만 여럿이야. 하하. 잘됐으면 좋겠네.”
“아이, 아니라니깐요. 선생님, 저 지난번에 김윤지 원장님이랑 같이 술자리 했을 때 기억나셔요?”
“거봐. 김윤지 원장 이야기구먼.”
나중에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궁금한 걸 어쩌겠는가. 그리고 어제 있었던 일도 있고.
“음……. 잘 기억은 안 나지. 왜?”
“기억 좀 해 보셔요. 그날 제가 어떻게 집에 들어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 그래요.”
“몇 년 전 이야기인데 그게 기억이 나겠어? 글쎄. 그날 술 좀 많이 먹기는 했지. 그때만 하더라도 신성 학원이 성공 대입학원보다 훨씬 작았는데 거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니깐 신났었잖아. 하하.”
신난 건 본인만 그랬지. 나는 이미도 원장, 주현필과 대책 논의하고 전쟁 준비하느라 바빴네요, 이 사람아.
“그러셨죠. 하하. 역시 유환 선생님께서 제일 먼저 스카우트 제의를 받으시고.”
“그치? 그때만 하더라도 잘나갔는데 말이야.”
‘지금이라도 그리로 보내 드릴까요?’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정말 싸가지 없는 녀석이 될 것이다.
잠시 그때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던 유환이 다시 입을 연 것은 대충 1분 정도 지났을 때였을까?
그는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도 김윤지 원장이 나한테 그 제의하면서 곧바로 유현덕 선생도 보고 싶다고 했었어. 그때는 둘이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을 텐데.”
햇병아리 강사, 하지만 마치 레인메이커(Rainmaker: 행운을 가져오는 사람)처럼 신성 학원의 성장을 이끈 것은 나, 유현덕이었다.
내가 만약 성공 대입학원으로 옮겼으면 잠시 동안은 확실히 돈을 더 벌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처럼 S 아카데미의 대표가 되지도, 맥스스쿨을 무너뜨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구상한 계획들이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이미도 원장과 주현필 같은 사람들이 지원해 줬기 때문이란 것을 잘 알기에.
거기에 추가적으로 조규만 의원 아래에서 일을 했다면, S 아카데미의 대표는 내가 아니라 그였을 것이고.
“그러니깐, 그날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선생님.”
“흐흐. 글쎄. 이제 막 생각났어. 그런데 맨입으로 알려 주라고?”
하아. 진짜 이 인간.
“그러면 뭘 해 드릴까요?”
“S 아카데미를 나한테 넘겨주면?”
“정신줄을 놓으셨군요. 내일부로 S 아카데미 사이트에서 선생님 강의 빼겠습니다.”
“어쭈? 그러시던가. 하하.”
“빨리 좀 알려 줘요, 그냥.”
술을 왕창 마시면서 나는 김윤지 원장, 당시에는 실장을 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제안을 들었다.
물론 받아들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쪽이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지.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계속 마시던 도중, 갑작스레 어떤 시점부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앞에 앉아 있는 유환 선생님의 표정이 갑자기 약간 음흉해진 것인가?
내가 잘못 봤나 싶었지만 일순간 그런 표정이 스친 것 같았는데.
“나도 기억 안 나. 둘이 뭘 했는지는. 내가 기억하는 건 네가 갑자기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는 모습. 그리고 내가 계산하는 사이에 김윤지 원장과 네가 사라졌던 거였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계산하는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 사라진단 말인가.
“그게 아닐 수도 있기는 해. 나도 엄청 취해 있었으니깐. 계산 하고 나서 너나 김윤지 원장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혼자 집으로 간 걸 수도 있겠지. 어쨌든 나는 널 데려다 주지 않았거든.”
“그럼 저 혼자 집까지 간 거예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김윤지 원장한테 물어봐, 그건. 내가 데려간 건 아니었으니깐.”
그 상태에서 나 혼자 집까지 갔다고?
그럴 만한 정신이 없었을 텐데.
그러면 남은 가능성은…….
“야, 너 왜 이렇게 얼이 빠졌어?”
나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유환 선생님의 강의실을 나와 버렸다.
* * *
심장이 떨려 왔다.
아니,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온 장면은 너무 나간 상상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설마, 정말로 설마 내 상상이 맞는다면…….
“현덕 씨…….”
“네, 윤지 씨…….”
뭐, ‘현덕아’와 ‘네, 누나’로 불렀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게 무슨 망상이냐, 현덕아!
사실 아무런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그녀가 나를 내 집으로 데려다 주고, 그녀도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었다.
또는, 잠시 들어왔다가 나간 걸 수도 있었고.
아차, 그냥 돌아가진 않았으리라. 왜냐하면 방금 떠오른 기억인데, 지난번에 그녀가 분명히 내 원룸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거든.
그때 그녀는 들어와 본 적이 있었던 것같이 말했었다.
정확히 뭐라고 했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러면 방까지는 들어왔거나, 아니면 방 내부를 보기는 했다는 것인데.
그 이야기를 지난번에 잠깐 들었을 때는 ‘뭔 소리야?’ 하고 넘겼는데, 유환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게 그럴 만한 일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들었다. 그랬다가 바로 다시 내렸다. 강의실에 학생들이 와 있다는 걸 깜빡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던 것이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으응? 왜?”
“얼굴이 창백하세요.”
시계를 보니 아직 수업이 시작하려면 30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얼굴이 창백하다고?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다시 피가 돌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런 일로 이렇게 정신을 놓다니.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전생에……. 여자를 만난 기억이 거의 없었으니.
갑자기 마음에 슬픔과 기쁨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함께 가득 차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 정말로 슬픈 삶을 살았었구나.’
슬픈 게 아니라 찐따 같은 삶이었을까.
* * *
“누나, 통화 가능해요?”
-네? 유현덕 선생님……. 누나라니요?
이 사람은 또 왜 이렇게 어색해하는 것인가. 어색해도 내가 어색해야지.
설마 술에 취해서 기억을 못하는 건…….
“예? 아, 김윤지 원장님. 누나라고 부르라고 하셔서.”
-제가요? 정말요?
“네. 어제 그 술자리에서……. 속은 좀 괜찮으십니까, 원장님?”
역시나 기억을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쉬는 시간에 밖으로 잠시 나왔다.
신성 학원 테라스는 보통 학원 강사들만 사용하고 원생들에게는 개방되지 않는다.
어른 허리 높이의 난간만 있어 이런저런 사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아무튼 다행히도 테라스에는 아무도 없었다.
휴대폰으로 바로 김윤지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 아침에는 힘들었죠. 지금은 좀 괜찮아졌어요. 유현덕 선생님은요? 괜찮으셨어요?
정말로 기억을 못하나 보다. 기억을 해야 조금 편하게 그 일을 물어볼 수가 있을 텐데.
지금처럼 서로 ‘원장님’, ‘선생님’ 하고 부르면서 어떻게 ‘우리 처음 만났던 날 저희 집에 오셨나요?’ 하고 말하겠는가.
“아, 네. 저도 힘들긴 하더라고요. 저보다 원장님께서 원래 더 잘 드시니깐.”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호호. 그나저나 웬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셨어요?
젠장, 이렇게 되면 물어볼 수가 없는데. 아니면 정말 얼굴에 철판 깔고 물어봐 버려?
그런데 막상 그녀의 대답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아무런 대책 없이 움직이는 성격이 아닌데도 내가 이렇게 한 걸 보면 엄청 긴장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네, 저 유현덕 선생님 집에 들어갔었어요.’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나요?’
‘음…….’
이런 대화를 원한 것은 아니었는데.
역시나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어야 할 일인가.
-유현덕 선생님?
“아, 네.”
-왜 아무 말씀이 없으세요?
뭐라고 한단 말인가.
참, 나.
답답했다. 그냥 물어봐 버릴까.
그런데 그러면 정말 이상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 같은데.
“저, 원장님?”
-네.
“전에 혹시 저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세요?”
저질러 버렸다.
어디까지?
바로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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