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55화.
“유현덕 대표님, 전화 왔습니다!”
“네? 누군데요?”
“김윤지 원장님이신데요?”
오랜만에 김윤지 원장이 연락을 한 것도 그날이었다.
“예? 휴대폰으로 하지 왜?”
“빨리 와서 받으세요!”
“알겠어요!”
멍이 든 눈두덩을 살살 눌러 보다가 급히 얼굴만 씻고 나와 전화를 받았다.
“네, 원장님. 오랜만에 연락 주셨네요?”
-그러게요. 유현덕 선생님도 연락 한 번 안 주시고선…….
내가 연락을 안 한 것은 못 한 것이었다.
아무리 조규만이 나쁜 놈이라지만 그래도 김윤지 원장의 외삼촌인데, 그날 그런 일을 겪고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연락하기도 조금 그렇지 않겠는가.
그래도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맑은 목소리는 반가웠다.
“아, 죄송합니다. 그때 조금 어색하게 헤어져서. 하하. 잘 지내셨어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내 목소리에 내가 가진 반가움이 함께 실려서 갔을까?
약간은 서운해하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도 살짝 풀어진 듯했다.
-네. 잘 지냈어요. 외삼촌에게 들었어요. 같이해 보기로 결정하셨다면서요?
손을 잡는 것은 맞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확실하게.
하지만 조규만에 대한 나의 감정이 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게 참 그녀에게 말하기도 뭐 한 거라서…….
일단 대답은 해야겠지.
“아, 네. 일단 그렇게 됐습니다. 뭐, 계속 거절할 입장도 아니고요. 국회의원이신데…….”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 전 살짝 머뭇거린 것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미안해요. 저도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어요. 성격은 좀 그런 분이더라도 저에게는…….
그렇게 말하고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녀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혹시 그녀도 내 사고와 관련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알았더라면 우리 사이가 이렇게 편해지기는 어려웠겠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녀는 조규만 의원처럼 뻔뻔한 사람은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원장님이 저에게 뭐 잘못하신 것이 있는 것도 아닌걸요. 오히려 제가 미안하죠. 하하.”
-오늘 시간 혹시 되나요?
“오, 지난번에도 그렇고……. 혹시 데이트 신청이십니까?”
역시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느는 것은 능청스러움일까.
-병원에 또 한 세 달 정도 입원시켜 드릴까요?
반응도 귀엽고.
그런데 지난 번 사고 때 세 달간 혼수상태로 있다가 깨어난 기억이 떠올랐다.
누워 있는 건 누워 있는 건데 재활이 너무 힘들었고.
체력 관리가 중요하다 생각해서 고등학생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계속 키워 온 체력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으니.
대답하기 전 살짝 등에 땀이 나는 것 같았다.
더운 날씨가 아닌데도.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다시 능청스럽게 받아치기 전, 그녀가 먼저 말을 했다.
-아, 미안해요. 조금 예민한 부분일지도 모르는데…….
“아닙니다. 하하. 원장님께서 입원시키시면 수발 다 들어 주셔야 합니다.”
-오늘부터 입원시켜 드릴게요.
시계를 보니 지금 시각이 1시였다.
2시쯤에 보면 되려나?
“2시는 어떠신가요?”
-2시 괜찮은데, 밤에 술이나 한잔해요.
“술이요?”
술이라니…….
마지막으로 음주를 했던 것이 벌써 몇 달 전인지 모르겠다.
주현필은 주현필대로 바쁘고, 이미도 원장은 계속 서울에 가 있었으니 술을 마실 일이 없었던 것.
-싫으세요?
“아뇨. 그럼 오늘 퇴근하고……. 저 수업 12시에 끝나는데요?”
너무 늦은 시각이려나.
-돈도 엄청 가지고 있는 분이 무슨 강의를 그렇게 빡세게 해요? 알겠어요. 그러면 12시에 저 데리러 와 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이따 뵐게요.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그나저나 어디 술집을 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잠시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눈에 든 멍.
12시면 완전히 한밤중이니 괜찮겠지?
* * *
학원가의 불은 늦게 꺼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12시는 슬슬 하나둘씩 마감하는 시각이기는 했다.
마지막 강의를 끝내고 서둘러 나올 수 있던 것은 신성 학원의 부원장직을 지금 주현필이 하고 있는 덕분이었고.
“오늘 왜 그렇게 급히 가?”
급히 가방을 챙겨 들고 나오는 나를 보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시크하게…….
“선생님께서 제 눈을 이리 만드셔서 빨리 들어가 쉬려고요.”
그렇게 말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건물을 나왔고.
김윤지 원장의 성공 대입학원 건물 근처까지 가자 멀리 그녀가 보였다.
가로등은 새벽까지 켜져 있기에 길가 가로등 아래에 서서 휴대폰을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차를 몰고 가고 있었기에 시야에 그녀가 들어오고 나서 그녀 앞에 도착하기까지 정말 10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사이에도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중 대부분은 전생의 삶에 관한 것이었고.
엄청나게 열심히 살고 있었는데도 삶이 나아지질 않았다.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노력한 것의 결과가 항상 재계약밖에 없으니 나아질 리가 없었지.
그나마 인정받을 만치 열심히 잘해 냈다 하더라도 줄어드는 학생 수로 자리가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될 때마다 학교를 옮겨야 했고.
여자를 만날 시간?
그런 거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진 거라고는 가르치는 능력뿐인데, 그것마저도 매년 가슴을 졸이며 일자리를 구해야 하니 다른 고민은 전부 사치로 느껴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원장님. 타세요.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녀는 아무 대답 없이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문을 닫고서야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어디로 갈 거예요?”
“드시고 싶으신 것 따로 있으십니까? 아니면 좋아하시는 호프로 모실까요?”
“호프 좋아한 적 없는데요?”
“아, 죄송합니다.”
우리가 가졌던 술자리.
생각해 보면 유환 선생님이 주선했던 자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회식은 대개 신성 학원 사람들과 함께하거나, 아니면 S 아카데미에 참여하는 강사들과 했던 것들이니.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도.
가끔은 괜찮겠지.
“왜 혼자 실실거리고 있어요?”
아차, 나도 모르게 표정이…….
“아닙니다. 하하. 그러면, 일식?”
“됐어요. 음……. 막창 먹으러 갈래요?”
“막, 막창이요?”
막창이라니.
막창은 내가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어서 먹지 않았던 것인데.
“아, 싫어하시나?”
“아닙니다. 막창 드시러 가시죠. 맛있는 집을 몰라서.”
“그건 제가 알아요. 안내하죠.”
그나저나 이 사람은 외모와 다르게 그런 것도 먹는구나.
아차, 여성이라 막연히 그럴 거라 생각하는 것은 성차별적인 생각이겠지.
아무튼 막창이라니.
제2강 반전의 시작
“유현덕 선생님은 우리 외삼촌한테 아직 감정 남아 있죠?”
당연한 소리를 또 하네.
나를 죽이려 한 사람인데 감정이 없으면 그게 성인이지 보통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대답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감정이야……. 남아 있기는 한데 모르겠어요. 별 관심 없어요, 그 사람한테.”
그래도 그녀의 외삼촌이니.
그리고 솔직히 말해 진짜 관심이 크게 가지는 않았다.
주의해야 할 위험한 사람이라는 인식은 확실히 가지고 있었으나, 복수나 보복은 내 성격과는 멀었다.
그나저나 술을 몇 잔이나 마셨는지 모르겠다.
술이 약한 것을 잘 알기에 항상 주의하지만 이렇게 살면서 피할 수가 없을 때도 있고.
오늘도 그중 하나였겠지?
김윤지 원장의 얼굴은 이미 붉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두뇌는 멀쩡하게 작동하는 것 같아 보여 신기했다.
그리고 나는…….
나는 굳이 거울을 볼 필요도 없으리라.
슬슬 잠이 쏟아지는 것을 억지로 버티고 있었으니.
막창 집은 멀지 않았다. 차로 15분 정도 거리.
물론 출퇴근 시간이라면 엄청 막히는 길이지만, 우리가 만난 것은 12시가 훌쩍 넘어간 시각이었다.
도로에 차들은 거의 없었고.
“그렇게 돈을 벌면서도 차는 그냥 평범한 차를 타네요. 차 욕심 없어요? 남자들은 돈만 생기면 차 바꾸고 싶어 안달이라던데.”
차 욕심이라.
무릇 남자란 대부분 차에 대한 욕심이 있다.
하지만 나 자신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것이, 지금은 크게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픈 생각이 들질 않았다.
나이에 비해 너무 돈이 많아져서 그런가?
전생이었다면 좀 좋은 외제차 정도 끌고 다니고 싶어 했을 것 같은데.
막상 그렇게 말하는 그녀도 아직 20대 후반이다.
지금의 나보다야 몇 살 더 많지만, 그래도 그 나이라면 아직 순수할 시기다.
순수하지 않고 때가 묻었다거나, 그런 의미는 절대 아니다.
다만, 남자들이 돈만 생기면 차를 바꾸고 싶어 한다는 둥 하는 소리를 하기에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그녀 또한 젊은 나이에 가질 수 있는 것들을 대부분 가진 상황이라 그럴까.
“차는 구르기만 하면 되죠. 고장 나서 귀찮은 일만 별로 없으면 뭐…….”
“그래도요. 재산이 수십억? 백억 넘었어요, 혹시?”
왜 남의 재산에 관심을…….
“매일 계산하는 건 아니라 잘 모릅니다.”
거짓말이지.
매일 들어오고 나가는 돈을 세심히 관리해야 돈이 엉뚱한 곳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것 아닌가.
많다고 새는 것 무시하면 순식간에 거지된다.
공과금 같은 거야 뭐 자산에 비해 워낙 조금씩 나가는 거니 관계가 없겠지만, 들어오는 금액이 줄기 시작하거나, 또는 나가는 금액이 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크지 않아도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일쑤.
사실 이건 내가 어디서 배워서 아는 건 아니었다.
그냥 살다 보니 젊은 나이에 성공했던 친구들 중 몇이 큰 실수 없이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본 것이 경험이 됐던 것 같다.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돈 벌어서 어따 쓰시려고요, 유 선생님? 그렇게 개고생 하는 게 다 조금 더 잘살고 좋은 것 타고 다니려고 하는 건데.”
“뭐, 필요할 곳이 다 있지 않을까요? 하하. 지금은 뭐 몇십 억이 큰돈인 것 같지만 다른 사업 하시는 분들 입장에선 푼돈이 될 수도 있을 거고.”
“벌다가 죽어요, 그러다. 다 쓰지도 못하고.”
하긴, 나도 돈을 버는 재미를 깨달은 걸까.
전생에서는 상상도 못할 돈을 굴리고 있는데도 더 벌고 싶었다.
어디까지냐고?
나도 모르지. 세상은 넓고 부자는 많으니.
그나저나 술자리가 점점 힘들어졌다.
조금씩 더 잘 시간으로 다가가는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니 큰 호프집에 이제 우리 둘만 남아 있다.
시간은 어느새 3시…….
“자! 한 잔 더!”
“어라?”
“빨리, 한 잔 더 줘요!”
그녀의 상태가 갑작스레 이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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