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54화.
“윤주환 사장님께 연락을 한 번 드려 봐야 할 것 같네요. 저희는 한쪽에만 다리를 걸치지 않겠습니다. 아! 이건 이미도 원장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이기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양쪽에 한 다리씩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양다리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미도 원장도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은 반응.
“네. 조규만 의원이 먼저 제안한 입장에서, 물론 저도 그 사람과 같이 뭘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요.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윤주환 사장님과 손을 잡게 되면 또 전쟁입니다. 성공 대입학원과 싸울 때의 상황이에요. 우리가 양쪽 중 한편의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는 점을 내세워서 전국구 강사진으로 채워진 맥스스쿨에서는 교육방송을, S 아카데미는 조규만 의원을 도와주는 모양을 갖추면 어떨까 싶습니다.”
다분히 실리적인 입장이리라.
원수나 마찬가지인 조규만과 내가 손을 잡고,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미도 원장은 윤주환 사장과 손을 잡으면 서로를 적절하게 견제할 수도 있고.
내가 우려한 것은 이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한쪽 편을 들게 되면 반대쪽과는 경쟁을 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피를 흘리기 마련이다.
어느 정도나 흘릴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반대로 우리가 양측의 손을 다 잡고 있으면 이걸 하나의 카드로써 쓸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조규만의 제안을 거절하면 그는 아마 대형 학원 몇 곳을 두드려 제2의 S 아카데미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윤주환 사장의 제안을 거절하면 그 역시 다른 대형 학원에서 강사를 구할 것이고.
반면 우리가 양쪽에 발을 들여놓을 수만 있다면…….
“그런데 그걸 양쪽에서 이해해 줄까?”
내 제안은 뜬금없게 들렸을 것이다.
‘조규만이냐 윤주환이냐’의 2지선다형 문제에서 3번을 찍은 셈이니.
“이해하도록 만들어야죠. 조규만 의원은 이해할 겁니다. 우리가 그와 손을 잡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큰 의미가 있을 거예요. 물론 일전에 요구했던 비공식적인 후원금은 공식적으로 하겠다고 하고요. 윤주환 사장님은 잘 모르긴 하지만……. 업계 1위 타이틀은 이럴 때 쓰라고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미도 원장님? 하하.”
“결국 윤주환 사장님은 나보고 설득하란 소리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원장님.”
이미도 원장이 갑자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뭔가 불안한 기분이.
같이 지낸 것만 몇 년이지만 처음 보는 미소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러면 뭐 해 줄 건데요?”
이렇게 물었고, 조금 편안해진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데이트해 드릴까요, 원장님? 아! 주현필 선생님과 같이…….”
라고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깜빡 잊고 있던 무림고수 주현필의 주먹이 어느새 내 머리통에 정통으로 내리꽂혔다.
하마터면 머리가 깨진 수박이 될 뻔했네.
* * *
“허허. 생각보다 결정이 빠르구먼?”
“어차피 그리 결정 내린 것 빨리 진행하는 것이 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의원님.”
“그래그래. 윤지가 사람을 아주 잘 본 것 같네. 배포가 작은 줄 알았는데, 이 정도로 통이 크고 야심이 있는 줄은 몰랐거든. 왠지 그 녀석이 엄청 칭찬하더만…….”
김윤지 원장이 나를?
하긴, 우리 둘 사이에 정말 뭔가가 있으려고 했던 것 같기는 했다.
물론 절묘한 타이밍에 여기 앞에 앉아 있는 조규만이 끼어들어 어그러지기는 했지만.
그런데 이 자리에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김윤지 원장은 어디 있습니까?”
조심스레 물어봤지만 조규만은 그 부분에 대해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모르지, 뭐. 다 큰 조카 어디 있는지까지 내가 확인하고 다닐 수는 없잖나. 아무튼, 그러면 우리 사업 이야기를 한 번 해 봄세.”
조규만의 계획은 역시나 철저했다.
국가의 교육방송 인터넷 강의 사이트는 기존에 훌륭히 역할을 수행하던 지역 학원가를 무너뜨릴 것이며, 이는 결국 학생들의 학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각 학교 교장 선생님들을 이미 만나고 다녔다.
그리고 일단은 다섯 곳, 그리고 추후 성적 향상 여부를 봐서 총 열 곳의 학교가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태.
아침 자습 시간 30분, 그리고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40분 단위로 하루 2회 S 아카데미에서 제작한 강의를 일괄적으로 방송하고, 강의료는 학교당 100만 원 선으로 싸게 책정했다.
강의를 듣게 되는 학생들 숫자가 교당 1,000명 가까이 되는 규모임을 고려했을 때, 엄청나게 싼 가격.
하지만 내 입장에서도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강의를 올리는 강사는 그만큼 인지도가 쌓이는 것이고, S 아카데미의 홍보까지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투자랄까.
그리고 이것을 조규만이 모를 리가 없었다.
“후원금은 거기서 들어오는 금액만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이, 왜 이러시나. 천하의 유현덕 대표가 말이야. S 아카데미 홍보까지 되니 어느 정도 부담을 해 줘야지.”
지역 학원가가 무너진다는 둥, 그로 인해 지역 경제에 타격을 입는다는 둥, 그리고 심지어 학생들의 학력 저하가 우려된다는 소리는 이 사람에게 있어서 전부 수단일 뿐이었다.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정치적 수단들.
“뭐, 그러면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다만 비공식이 아니라 공식적인 방법으로요.”
“공식적인 방법?”
“네. 액수는 충분히 드리겠지만 비공식은 안 됩니다. 그건 의원님께서 이해해 주십쇼.”
아쉽기는 하겠지만 빼기는 어렵겠지.
충분한 액수라. 과연 어느 정도가 이 욕심 덩어리 인간에게 충분한 액수일까.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며 앞에 있던 커피를 홀짝거리던 그가 커피를 다 마시더니 테이블에 빈 컵을 내려놓았다.
“오케이. 단, 충분한 액수로.”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바로 강의 제작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잘 부탁하네, 유 대표.”
여기까지만 본다면 거의 뇌물 수수나 다름이 없는 상태였다.
조규만은 나에게 개 목걸이를 걸어 두고 원하는 대로 돈을 끌어다 쓸 것이고.
물론 이게 밖으로 터진다면 그도 타격을 입긴 하겠지만 말이다.
다만 나는 아직 하나의 수를 더 생각해 두고 있었다.
돈은 조금 들겠지만 올가미에 걸린 머리를 빼낼 방법을…….
* * *
2005년 9월.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낙엽처럼 우리의 새로운 강의 준비도 착착 진행 중이었고.
“슬슬 움직이려나?”
“뭘 움직여요?”
“아니, 조규만도 그렇고 윤주환 사장님도 그렇고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것 가시화시키지 않겠어?”
주현필의 말대로 아직 어떤 것도 가시화되지는 않았다.
조규만은 조규만대로, 그리고 윤주환 사장은 윤주환 사장대로 나름의 밑 작업을 하고 있었겠지만, 우리가 알 수는 없는 일.
아마 양측 모두 내년 초에 터뜨리겠지.
“빨라야 올 연말 쯤 되지 않을까요. 그냥 막 터뜨릴 만한 크기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곧바로 시작될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동종 업체 두 개가 공교육 내에서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경쟁까지는 아니었다.
뭐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던 거지만 말이다.
“이미도 원장님도 준비 중이시죠?”
“그렇겠지? 요즘은 나도 연락을 자주 못 드렸어.”
“저도 그러네요.”
이미도 원장은 맥스스쿨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S 아카데미야 애초부터 거의 무슨 중계업체처럼 시작한 것이지만 맥스스쿨은 그 자체가 학원으로 시작한 것이기에 기존 강사진들을 달래 가며 운영할 필요가 있었다.
대형 학원은 강사 한 명 한 명이 타임별로 백 이상의 실강생을 데리고 수업을 진행한다.
이 말은, 그들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
실제로 인기 강사들은 계약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자신의 수업을 듣는 실강생을 데리고 타 학원으로 이적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학원끼리 경쟁이 붙을 때는 상대편의 강사들에게 거액의 계약금을 미끼로 데려오는 경우도 있었고.
기존 맥스스쿨 1타급 강사진은 이미 조건이 최고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학원을 운영해야 하는 이미도 원장은 확실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 중이었고.
“그나저나 주현필 선생님은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지방에 근무하시면서 원래는 맥스스쿨 소속이었다고 하고, 거기에 예전에 보여 주신 그 싸움은…….”
“됐어, 그 이야기는 하지 마. 별로 좋은 과거도 아니었고.”
그는 과거에 도대체 뭘 했을까.
무슨 일을 했기에 그런 싸움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건지.
“음. 저도 좀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조규만과 손을 잡은 이상 항상 조심해야 했다. 이 사람은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위험인물이니.
우리 쪽에 올가미를 걸어 놓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올가미가 풀려 있음을 깨닫게 되고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사람이다.
주현필이 내 부탁에 ‘뭔 개소리냐.’ 하는 표정으로 잠시 나를 보다가(이 사람은 인상이 참 좋지 않지) 문득 내 우려를 읽었는지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 십 초 지났을까, 그가 나에게 말했다.
“너도 조금 필요하려나? 그런데 네 몸으로는 힘들어. 뭐가 잡혀 있어야 배우지.”
나도 안다고, 이 사람아.
지금 몸으로도 내 몸 보호할 정도의 기술을 알려 달란 거지, 그가 유지현이 데리고 있던 덩치들과 대치할 때처럼 막 현란하고 압도적인 기술을 알려 달란 것이 아니었다.
뜬금없이 얻어맞고 병원에 눕게 되는 것은 피해야 할 것 아닌가.
“그냥 호신술 정도만이라도 안 될까요?”
“정말 가르쳐 줘?”
“네!”
나는 이때 알았어야 했다.
그가 나에게 호신술을 가르쳐 주려는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의 얼굴만 제대로 봤으면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어울리지 않게 흐뭇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 * *
김윤지 원장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은 조규만과의 불편한 미팅이었다.
그녀가 그 자리를 주선했고, 첫 만남은 썩 좋지 못한 결과로 끝이 났기에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게 될 거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길어질 줄은 몰랐는데.
거의 세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어떤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녀도 연락을 하지 않았고, 나는 나대로 새로운 작업으로 바쁜 상황이었다.
거기에 추가된 호신술 훈련은 나의 몸을 여기저기 멍들게 했다.
심지어 얼굴까지도.
“선생님, 싸우셨어요?”
“응? 왜?”
“눈이…….”
그리고 그 학생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내가 그가 말한 눈 상태를 확인한 것은 강의가 끝나고 화장실에 가서였다.
시퍼렇게 멍든 눈.
바로 전날 주현필과 체육관에서 훈련을 조금 했는데, 그는 호신술을 가르친답시고 내 몸 여기저기를 패기 시작했다.
그래도 얼굴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곳들만 구석구석 때려 대서 이게 호신술 훈련인지 아니면 군에서 말하는 가혹행위인지 헷갈릴 정도.
그렇게 한 달 정도 훈련을 받았지만 뭐가 특별히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단지 맞을 때 조금이나마 덜 아프게 피하는 법만 배운 것 같은데.
사고는 갑작스레 일어났다.
“살살하세요. 살살! 으악!”
“어이쿠! 괜찮아?”
“아아…….”
그가 나를 들어서 메치는데 그만 얼굴이 매트에 먼저 닿고 만 것이었다.
보통은 등으로 떨어지지만 이번에는 서로 기운이 빠진 상태라 그랬나?
아무튼 곧바로 거울을 봤지만 큰 문제는 없어 보였기에 다음 날 수업에 들어갔고, 학생이 먼저 시퍼렇게 눈에 든 멍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