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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회귀해도 개고생이네-48화 (48/200)

[48] 48화.

“자, 영어는 결국 언어야. 너희들 우리말 배울 때 문법 하나하나 따져 가면서 배웠어? 기억이 나질 않지? 당연하지. 말도 못할 때 어떻게 배운지도 모르게 듣고, 말하고, 읽고, 쓰게 됐으니깐.”

“단어는 외웠어요!”

“맞아. 동생들 있으면 알 거야. 단어는 외워야 해. 어떤 언어든지 최소한으로 필요한 단어들이 있거든.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 있는 거야. 단어를 안다고 하더라도 그게 어떻게 주어에 들어가고 동사에 들어가고 하는지 알았냐는 거지.”

“…….”

“자, 우리는 다들 우리말 잘하지? 한글로 쓰인 책 읽으면 무슨 말인지 거의 이해할 수 있고.”

“네.”

“문법이 먼저가 아니야. 일단 양이 충족이 돼야 해. 아기들 책 읽을 때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면서 읽는 것 같아?”

“그러면요?”

“글자 하나하나를 그냥 또박또박 읽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로. 그렇게 글자를 읽으면서 아빠, 엄마한테 ‘이건 뭐야?’, ‘저건 뭐야?’ 하고 질문하고 깨달으면서 어느 순간에는 자기도 모르게 내용을 이해하면서 읽고 있게 되지. 영어도 마찬가지야. 원서 소설 너무 어려워? 당연히 어렵지. 그걸 줄줄 읽고 이해할 수 있으면 굳이 뭐 하러 돈을 들여가며 배우겠어? 그런데 아기들 책 읽는 걸 한 번 생각해 봐. 그렇게 읽으면 어느 순간 조금씩 더 많은 양이 이해가 돼. 영어는 그렇게 해야 하는 거야.”

매번 느끼지만 반을 만들고 내 수업을 처음 듣는 학생들에게 이 영어의 지름길을 말할 때 생생한 상태로 버티는 경우가 거의 없다.

당연히 재미가 없겠지. 이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기도 할 테고.

하지만 결과는 여기에서 판가름이 나 버린다.

어떤 과목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첫 수업, 첫 페이지, 첫 발자국인데, 그 사실을 너무 쉽게 간과해 버린다.

그래서 사실, 한때 놀고 정신을 차린 뒤 공부를 해서 성공했다는 것은 기삿거리로 나올 정도로 드문 일이라는 것이다.

성적은 결국 얼마나 빨리, 그리고 끈기 있게 버텨 가며 공부했는지가 관건이다.

“자, 오늘 수업한 건 계속 기억해야 해. 힘들 때 나만 힘든 것이 아냐. 다만 부담은 갖지 말고. 미국 드라마도 20분 봤으니 내일은 30분 볼 수 있게 준비 잘해 오자!”

“감사합니다!”

학원에 근무하며 느끼는 신비한 사실 한 가지는 학교보다 학원에서 학생들이 인사성이 밝다는 것.

도대체 왜 그럴까?

학교나 학원이나 결국 가르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집중력이나 몰입도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특별히 학교에서 느슨하게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학원이 학교보다 더 잘 가르친다?

개개인의 수준에 조금 더 잘 맞춰 줄 수는 있겠지. 학교에서는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을 마음껏 선정하고 변경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큰 차이는 없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 중에 학교에서 못하는 학생들과 똑같이 생활하면서 학원 수업만으로 성적 잘 받는 경우가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조금 이해가 될까.

“유현덕 선생님, 전화 왔습니다.”

“아, 네! 원장님. 어디서요?”

“몰라, 아직 안 끊었어요. 빨리 와서 받아.”

급한 전화는 아닌 것 같았지만, 이미도 원장은 내가 직접 받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누구길래 그러지?

서둘러 이미도 원장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그렇다. 아직 신성 학원은 프론트 데스크를 운영하지 않았다.

이 정도 규모를 유지하려면 맥스스쿨이 그랬던 것처럼 실장도 필요하고 이것저것 업무를 처리할 사람들이 필요할 텐데, 정말 철저하리만치 원장 본인과 주현필 부원장 둘이서 모든 것을 다 해내고 있었다.

어찌 보면 대단한 거고, 어찌 보면 왜 사서 고생을 하나 싶기도 하고.

“네, 유현덕입니다.”

-유현덕 선생님, 지원재입니다.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잠시 동안 아무 응답이 없다가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전 세계의 통신이 묶였다고는 하더라도 미국과 한국 간 통화는 약간의 딜레이가 있다. 익숙하지 않으면 조금은 불편함을 느낄 수 있을 만한.

그나저나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목소리였다.

반가울 것 까지는 없는 사이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함께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던 사람이니.

지원재와 준서가 미국으로 떠난 지 두 달. 맥스스쿨의 코스닥 상장일 이후 한 달이 지난 시점이다.

준서야 나에게 연락을 조만간 할 거라 생각했지만, 지원재가 직접 연락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다행히 목소리는 밝아 보였다.

“어! 실장님. 하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준서는요?”

-이쪽이야 뭐, 한국에 있는 것보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거기처럼 이것저것 골치 아프게 싸우고 자시고 할 일도 없고요. 그냥 휴가 즐긴다 생각하고 여행 다니고 있죠.

“하하. 부럽네요. 저도 조만간 한 번 놀러 가야겠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셔요? 국제전화 아니에요, 이거? 통화료 비쌀 텐데?”

-연 백억 넘게 버실 만한 분께서 무슨 국제전화 통화료 걱정하십니까? 하하.

“제가 건 게 아니니깐 그렇죠. 실장님 걱정한 겁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쪽에서 준서와 제가 교육 사업 쪽을 한 번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처럼 시장이 될 만한 부분을요.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만큼 교육 시장이 체계화된 나라가 없어서요.

이 사람 머릿속 구상이 얼마나 거대한 거지? 우리나라 교육 시장을 넘어서 미국을 진출하려고 하는 건가?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항상 미국 교육을 부러워하고 따라가려 했지만, 의외로 단점도 큰 것이 그쪽 교육 체제다.

단적인 예로 문맹률.

외우기 중심, 그리고 문제 풀이 중심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은 적어도 한 가지 큰 장점이 있다. 그냥 큰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정도.

그것은 문맹률이 상당히 낮다는 점. 글을 읽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보다 선진국, 아니 세계 최고 국가인 미국은 의외로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 중 상당수가 글을 읽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게 교육 자체보다도 사회구조 특성일 수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힘든 일을 하면 임금도 그만큼 낮아진다. 반면 미국은 힘들고, 지저분하고, 위험한 일, 일명 3D 업종은 오히려 임금이 높은 편. 따라서 학창시절에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힘든 일을 해서 돈을 조금 더 벌 것이냐, 아니면 그냥 돈보다도 몸이 조금 편한 일을 해서 삶의 여유를 추구할 것이냐를.

어찌되었건 문맹률이 낮다고 교육에 대한 관심도 낮은 것은 아니다. 단지 땅덩어리가 엄청나게 넓고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이 많은 만큼 우리나라와 같은 사교육 시장이 형성되기 조금 어려운 조건.

여기에 온라인 강의를 도입한다면 어떨까? 그렇지 않아도 2000년대 미국 교육의 특징은 학교 대신 집에서 공부하는 홈스쿨링이었는데.

“온라인 교육 시장 말씀이신가요? 홈스쿨링 프로그램 같은?”

-역시 바로 알아들으시네요. 이거 점쟁이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여기 지금 그거 완전 유행이에요. 아직 체계적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이 턱도 없이 부족한데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강사 수급이잖습니까. 사이트야 투자해서 만들면 되고, 운영이야 운영자가 해 주는 것이지만 강사가 확보되려면……. 그렇다고 아무나 잡고 촬영할 수도 없고요.”

-그 부분은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뭐,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쪽에 연구차 와 계신 박사님들이 엄청 많아요. 석박사 학위까지 가지고 계신 상태고 여기에서 몇 년 연구하시면서 영어도 거의 완벽합니다. 우선 시작은 그분들 섭외해서 하는 건 어떨까 구상 중입니다.

왜 그 생각을 못하고 있었지?

미국의 첨단 과학기술은 미국인들이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가진 메리트,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꿈을 펼칠 수 있는 이미지가 전 세계의 석학들을 자석처럼 끌어 모은다. 그중 상당수는 한국에서 간 학자들이고.

영어는 어려울지 몰라도, 영어로 수학과 과학, 사회를 가르친다는 것은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아무도 시도조차 해 보지 않았던 것. 그렇기에 이 사업이 매력 있는 것이리라.

“실장님, 지금 그거 저에게 말씀하시는 거는 같이 하자는 의미죠?”

뻔했다. 지원재 라는 이 사람, 신기하리만치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 아니면 내가 관심 있어할 만한 사업 아이템에 빠삭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역시나 시원스러웠다.

-당연하죠. 그리고 중요한 건, 저는 이거 진행할 돈이 없잖습니까. 하하. 그건 뵙고 나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한국 잠깐 들어가려고 공항 와 있거든요.

“공항이요?”

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시 한국엘 온단 말인가. 비행기 값만 편도로 100만 원 가까운 금액이다. 그도 그간 그렇게 많이 벌어 놨던 건가?

하긴, 이 일의 진행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았다. 내 기억에 홈스쿨링은 2000년대 초반에 이미 유행을 타고 있었고, 점점 커지는 추세였다. 지금 당장 들어간다 하더라도 후발 주자의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할 것.

-네. 유미진이 무너지는 건 제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강재훈 대표님께는 조금 죄송하긴 합니다만, 그분은 다시 일어서실 능력이 있으니까요.

* * *

“위임장만 써 주시면 됩니다. 도장 여기에 찍어 주시면 되고요.”

“아이, 참. 이거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

“사모님과 아드님 주식 수량과 가격에는 아무런 영향 없습니다. 단지 주주총회에서 사모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의결권 중 절반만 저희에게 위임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되면 투자 금액 50억 원에 대한 부분은 깔끔히 정리하겠습니다.”

대부업체 대출 상담원은 이런 심정일까. 내가 하는 일이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빌리는 사람에게 안심하도록 하면서 목에는 올가미를 걸어 버리는…….

유미진의 아들 강민호의 사업은 역시나 세 달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애초에 해외와 국내의 조건이 다른데도 그런 부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감에만 의존한 사업.

그것도 적당히 벌여야 패션 트렌드를 따라가거나 재고량을 조절할 여지가 생기는데, 무턱대고 괜찮아 보이는 옷을 잔뜩 구매하고 팔지는 못하니 나날이 쌓여 가는 것은 재고뿐이었다.

게다가 강민호는 패션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었고, 유통업에 대한 경험도 전무했으니 망하는 것은 당연지사.

기세등등하던 유미진이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찾아 직접 지방까지 내려온 것을 보고 때가 찼음을 느꼈다.

“미안해서 어쩌나. 아직 사업을 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했나 보더라고요.”

“원래 사업이란 것이 운에 크게 좌우되니까요. 이번에 실패했더라도 다음번에는 꼭 크게 성공할 수도 있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셔요.”

남편 몰래 나를 만나 맥스스쿨 주주총회 시 자신의 지분을 위임하겠다는 위임장까지 쓴 그녀. 이번 주주총회 때 강재훈 대표의 표정이 궁금했다. 유미진은 아마 나오지도 않을 테고.

사실 그녀의 지분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아니지만, 절반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게임을 끝낼 수 있었다.

내 지분 15%, 강사 지분 8~9%, 거기에 유미진의 15%의 절반인 7.5%까지.

계산을 복잡하게 할 필요도 없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게 되었다.

자, 이제 살리느냐 마느냐의 결정만 남은 상태이려나.

아직 맥스스쿨의 주가가 정점을 찍으려면 3년 정도 남았다. 그때까지는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면서도 꾸준히 오르는 시기.

유미진이 경영 일선에 참여하게 되면서 학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게다가 S 아카데미가 시장까지 잠식하기 시작했기에 이대로 가만 내버려 두면 무너져 버릴 것이고.

맥스스쿨을 독립적으로 유지시키고 S 아카데미와 별도로 운영하느냐, 아니면 이참에 아예 합병을 시켜 버려 후발 주자들을 멀찍이 따돌리느냐의 문제였다.

“원래 합병 생각하고 투자 참여한 것 아니었어요? 그러면 지금이 기회지.”

이미도 원장의 생각이었다.

사실 합병의 성과가 재정적으로 크지는 않을 것 같다.

유미진이 깽판만 부리지 않았더라도 강재훈이 맥스스쿨을 착실히 키워 놓았을 텐데 지금은 조금 애매한 상황.

게다가 S 아카데미가 수능 시장으로 진출을 성공적으로 한 상태라 1+1=2가 아니라 1.5정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상징성은 분명 있다.

국내에 온라인 교육업체는 맥스와 S 아카데미 둘뿐.

이 두 업체의 합병은 향후 몇 년간 다른 대형 학원들이 발을 못 디밀을 정도로 시장을 장악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거대 독점 기업으로 가느냐, 아니면 약간 흔들리는 시점에 손을 털고 나와 S 아카데미 사업에 집중하느냐.

“너무 커져, 그러면. 합병보다는 개별 운영으로 하고 S 아카데미는 사업을 조금 다각화시키는 것은 어때? 수능은 맥스스쿨, S 아카데미는 내신 시장? 이렇게?”

주현필의 생각은 이미도 원장과는 약간 달랐다. 거대 기업이라 해도 어차피 필요에 따라 분할해서 재상장하는 상황인데 굳이 합칠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다.

이게 더 재정적으로는 유리할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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