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47화.
주현필이 끼어들며 내 말을 비꼬았으나, 특별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미리 이 계획을 이야기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부분은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말씀드릴 수가 없었어요. 원장님 아버지가 강재훈 대표님이라는 이야기 듣고 나서, 그분께서 제안을 엎을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면 지원재 실장에게서 들은 거겠네?”
심각했던 이미도 원장의 표정이 갑자기 확 풀어졌다. 설마 이걸 알아보려고 분위기를 이렇게…….
진짜, 이 사람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유구무언. 내가 한 죄가 있기에. 그냥 표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봐요? 서운한 건 서운한 거고, 궁금했던 건 궁금했던 거니깐.”
그러면서 이제는 윙크까지 한다. 주현필도 어이없는 얼굴로 그런 이미도 원장을 보고 있고. 오광필 할아버지는 “허허.” 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마음이 편해지기는 했다.
그래, 이 사람들과 몇 년을 함께 했는데.
내 나이가 죽었다 살아나며 조금 애매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는 20대 중반일 뿐이다. 엄청나게 성공한 20대 중반의 청년.
“저, 괜찮으십니까, 원장님?”
어이없어 하던 주현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을 리가 있겠어요? 그래도 나쁘지 않아요. 원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서. 그리고 또 자식이 커서 독립하면 이런 기분일까 느껴 보기도 했고요.”
자식? 왜 저런 말을 하면서 나를 쳐다볼까.
기분이 이상했다.
가족 사이에는 당연히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태생적으로 들기 마련이지만, 살면서 만난 인연에도 그런 감정들이 생기는 것인지.
“독립을 시켜 버리죠, 이참에?”
주현필도 화가 조금은 누그러졌는지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독립은 아직 안 하겠습니다. 조금 더 붙어서…….”
“기생충처럼 되는 거 아냐?”
주현필, 이 사람이!
* * *
2004년 12월. 맥스스쿨 코스닥 상장일.
어떻게 그 사단을 내 놓고도 코스닥 상장을 제때 했는지.
어쩌면 강재훈 대표는 그게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내 유미진과 겪은 내홍으로 인해 떨어진 가치를 제대로 회복하려면 아마 그의 선택이 옳을지도.
그리고 덕분에 나도 내 선택을 굳이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코스닥 상장을 축하하며!”
“축하드립니다, 사모님!”
“경축 드립니다, 사장님!”
경축이라니.
어쨌든 경영에 관심이 없더라도 축하받을 일이기는 했다.
온라인 교육 기업의 코스닥 첫 상장.
기업 공개를 통해 회사 가치를 담보로 투자를 받을 수 있고, 이는 다시 회사에 재투자로 이어져 더 큰 수익을 추구할 수 있는 것.
일반적이라면 이게 맞겠지.
하지만 지금은 2004년 말이다. 코스닥, 코스피에 거품이 잔뜩 끼어 있는 상태.
내 고민이 여기에 있었다.
교육 기업을 운영하며 거기에서 오는 수익에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일단 주가가 뜨면 털고 나올 것인가.
그리고 이 고민은 아마 유미진과 그녀의 아들, 그리고 심지어 맥스스쿨 창업주인 강재훈까지도 다 똑같이 하지 않을까.
확실히 강재훈은 털고 나오고 싶겠지.
복잡한 심정일 거다. 털 것이냐, 아니면 버틸 것이냐.
“축하드려요, 사모님.”
“호호. 고마워요. 여기까지 얼굴을 비치네, 유현덕 대표는?”
“저도 이제 맥스스쿨 대주주 중 하나인걸요. 지난 번 이사회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부르지도 않았는데 참석했지.”
이사회를 하는데 대주주 중 하나를 부르지 않는다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다.
그나마 강재훈 대표가 기를 쓰고 기업 공개까지 밀어붙여서 여기까지 온 거지, 그렇지 않았으면 맥스스쿨은 벌써 무너져 버렸을지도.
나도 그건 원치 않았다. 어찌 되었건 대출까지 끌어 쓴 내 돈이 꽤나 들어가 있으니.
“S 아카데미? 거기도 기업 공개 하셔야죠, 얼른? 메인 스트림으로 올라와야지.”
“준비 중입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요. 하하.”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강재훈 대표의 얼굴을 봤다. 꽤나 심기 불편하신 표정. 내가 무슨 꿍꿍이로 발을 밀어 넣은 건지 걱정이 될 게다.
15%의 주식? 사실 이제 막 기업 공개로 확장된 회사에서 15%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15%도 아니다. 기업 공개를 위해 증자로 절반 가치밖에 없는 상황.
기업 공개에 따라 수정된 맥스스쿨의 지분 보유율은 현재 유미진과 그녀의 아들이 12.5%, 강재훈이 2.5%로 셋이 합쳐 15%다. 그리고 내가 7.5%.
경영권 싸움을 할 경우 당연히 지는 상황이었으나, 변수는 강사들이 예전부터 스톡옵션으로 받아 들고 있던 지분. 이게 10% 정도 된다.
성공 대입학원이 맥스스쿨과 합병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김윤지 원장이 그들에게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고, 그녀가 그간 강사들을 이동시키며 쌓아 둔 신뢰 덕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10% 중 9% 이상 확보한 상황이었다.
그러면 나머지 1%를 뺏긴다고 하더라도 16 대 16.5.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이기는 싸움이다.
다만 표 싸움 외에 걱정되는 부분도 있긴 했다.
바로 경영 분쟁 문제. 이게 불거져 나오면 투자 심리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고, 이는 곧 주가의 하락으로 이어지겠지.
애초에 이게 계획이기는 했지만, 약간 딜레마가 생겨 버렸다.
돈의 손해를 감수하고 경영권을 우선으로 하여 종국적으로 S 아카데미와 합병을 시키느냐, 아니면 가격이 오른 뒤 적당한 시점에 털고 나오느냐.
“무슨 생각해요, 유현덕 선생님?”
“네?”
김윤지 원장이었다.
이미도 원장과 주현필, 그리고 오광필 할아버지는 이번 투자에 참여하지 않은 상태. 그에 반해 그녀는 50억을 빌려주었기에 오늘 이 자리에 함께 왔던 것이었다.
물론 그녀도 나에게 빌려준 거지 투자의 주체는 아니었다.
맥스스쿨과의 사건 이후 그녀와 나는 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뭐, 그렇다고 해도 나이차가 있기 때문에 남녀 사이가 된 것은 아니고.
아무튼, 그녀와 나는 맥스스쿨 일에 있어서 같은 배를 탄 처지이기에 이런저런 논의를 하느라 같이 있는 시간이 길었다는 말.
내가 가만히 생각에 잠기자 조용히 바라보며 기다린다.
“글쎄요. 하하. 맥스스쿨을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하다니요? 아직도 팔아 버리는 계획 생각 중이에요?”
논의하고 내렸던 결론은 끌고 가 보자는 것.
다만 적절한 시점이 언제인지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미래의 일이기에 워낙 변수가 많았다.
“그것도 그렇고, 만약 움직인다면 언제가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오늘은 즐기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면서 기다리면 돼요. 시한폭탄도 하나 째깍째깍 가고 있으니깐.”
시한폭탄.
그녀가 우리에게 달려와 무릎 꿇고 빌 일이 하나 있지, 참.
물론 무릎을 꿇을지 아니면 그 상황에서도 쿨한 척 거드름 피우며 우리에게 올지 모르지만 말이다.
제7강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여기가 새로 시작하실 건물입니까?”
“굳이 찾아올 필요 없다고 했는데. 우리도 돈 충분히 있어요, 유현덕 대표.”
강남 한복판, 8층짜리 건물의 2층.
도대체 임대료가 얼마나 나가는지도 모를 이 공간에 강재훈 대표와 유미진의 아들 강민호가 새로 사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내가 하는 도박만큼 미친 짓이란 것이 빤히 보이는 데도 이들 모녀는 꿈에 부풀어 있다.
“에이. 전에 투자해 드린다고 말씀드렸는걸요. 무슨 사업이라고 하셨죠?”
“온라인으로 의류 판매하는 사업이에요. 우리 아들이 해외 생활을 조금 해서 그쪽 옷들 디자인 따서 이쪽에서 판매하는 거죠.”
“전에 말씀드렸던 50억이면 충분하겠습니까?”
맥스스쿨 사모님이 굳이 본인 표현대로라면 동네 구멍가게 수준의 사업을 하는 내 돈이 필요할까 싶겠지만, 의외로 맥스스쿨의 현재 현금 흐름은 좋지 못했다.
물론 그래도 나보다야 낫겠지만, 그쪽은 이미 대출을 끌어다 쓸 만큼 쓴 상태.
오죽하면 지분의 35%가 퓨처 금융투자라는 반 대부업체로 넘어가 있겠는가.
이렇게 보자면 S 아카데미가 빚 없이 이 정도 규모가 된 것은 전부 시류에 잘 편승한 덕이었다. 내가 그 시류를 잘 알아본 것이고.
잘 알아보고 말고 할 것도 없긴 했다. 한 번 겪은 시대다 보니 교육과 관련된 어떤 유행이 생기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일 뿐.
“그거라면 일단 초기 자금은 될 거에요. 민호야, 처음 가져오는 옷 몇 벌은 여기 유현덕 대표 드려야 돼.”
“아닙니다. 굳이 안 주셔도…….”
“돈 벌기 시작하면요, 엄마.”
나도 별로 가지고 싶지 않다, 인마.
여기 있는 이 자식과 나는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태어난 녀석.
공부를 핑계로 해외여행을 평생 해 온 이 녀석이 돈을 걸고 하는 싸움판인 사업을 어느 정도나 해낼 수 있을지.
본인이 노력해서 월급 한 번 받아 본 일이 없기에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크게 일을 벌이고 망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가 나를 보는 눈빛은 썩 친근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내가 얼마나 하찮은 장사꾼으로 보일까.
“그나저나 여기 임대료는 얼마에요? 엄청 비쌀 것 같은데…….”
“여기? 여기 층 전부 쓰는 거니깐 연 10억 정도지. 그래도 이왕 사업하는 것 크게 해야 크게 버니깐. 그치, 민호야?”
정신 나간 모자군. 연 10억을 온전히 자릿세로 내면서 무슨 옷을 팔아서 돈을 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층을 전부 임대한다고? 딱 보기에도 신성 학원 건물의 한 층보다 더 큰 규모다.
물건들 들어오면 이 공자님께서 직접 옮기고 정리할 리는 없고, 필요한 사람들 고용해서 쓰다 보면 거기에 소요되는 비용만 족히 연 15억 이상은 들 것이다.
이들의 암담한 미래가 훤히 보이는데 도대체 강재훈 대표는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그자는 그래도 맥스스쿨을 그 정도로 성장시켰을 만큼 능력은 있는 사람일 텐데 말이다.
자포자기한 것일까. 아니면 지난 번 이미도 원장 사건 이후로 정말 모든 실권을 잃은 것일까.
“남편이 하도 반대를 하기에 돈이 조금 필요했는데, 잘됐어. 맥스스쿨 지분 투자하면서 남는 것 있을 테니 서로 좋은 거지 뭐.”
이건 나한테 남는 장사다, 이 여자야. 남편 말을 들었어야지, 이런 문제는.
본인이 정말, 누구랄까, 김윤지 원장이나 이미도 원장처럼 능력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큰 판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도 사실 그만한 능력이 있어서 자꾸 판을 키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 죽고 과거로 돌아왔기에 미친 척하고 지르고 있는 거고.
아마 전생의 나였다면 이런 일은 벌이지도 않았겠지.
운이 정말 좋아서 잘 된다면야 내가 건 돈 50억(물론 김윤지 원장에게서 빌린 부분이 있지만) 이자 쳐서 회수할 수 있는 거고, 대차게 망하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맥스스쿨 기업 공개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으니.
하지만…….
“그렇죠, 사모님. 저야 귀한 아드님 사업에 투자할 기회를 얻게 돼서 일단 너무 기쁩니다. 하하.”
이렇게 립 서비스로 그녀의 판단력을 흐릴 필요가 있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수지가 맞지를 않았다. 지방 어디 창고 같은 곳을 빌렸다면야 모르겠지만, 임대료로 이만큼 지불하고, 또 운영할 사람 인건비로 상당량 지불할 것을 생각하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다.
내가 볼 때 이거는 길어야 6개월, 짧으면 3달 안에 망할 사업이다.
“돈은 언제 입금해 주나요?”
“여기 계약서에 사인만 해 주시면 지금 당장 입금하고 내려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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