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44화.
-그 이상은 절대적으로 불가한가요? 지금 그쪽 현금이 얼마나 되는지 혹시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현금 80억이라고 말했는데 왜 또…….
“80억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게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몇 달 뒤라면 늘릴 수 있겠지만 지금은…….”
-잠깐만요. 80억 자체를 현금으로 가지고 있다는 건, 대출 하나 없이 순수익 모은 것만 그렇다는 겁니까?
대출하라고 하려나 이제?
“네, 맞습니다.”
-하, 참. 죄송합니다만 대출을 받으시면 이번 조건 충분히 맞추실 수 있을 텐데요.
전화기를 통해서 그의 한숨이 느껴질 정도였다. 누가 몰라서 그랬을까, 이 사람아.
“알고 있습니다만, 원장님께서 대출을 극도로 꺼리십니다. 가능한 선에서 말씀드린 금액이고요, 그래서.”
그리고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지원재 실장.
나도 가만히 그를 기다렸다.
왜 전화한 거지?
그리고 그가 나에게 새로운 제안 하나를 던졌다.
-유현덕 대표님.
“네?”
-대표님은 맥스스쿨을 가지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면 이미도 원장님을 돕고 싶으신 겁니까?
“둘 다 맞는데요?”
-제가 플랜 B를 하나 만들었습니다만, 그러면 둘 중 하나는 포기하셔야 합니다. 한 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데 플랜 B라니……. 뭔가 잘못될 가능성도 보고 있다는 말이다.
잘못될 가능성이라.
강재훈 대표 가족이 개입할 경우, 그리고 또는 우리 쪽에서 접근한 강사들이 다른 생각을 가질 경우, 마지막으로 퓨처 금융투자가 움직일 경우, 이 셋 정도가 될 것이다.
“뭔가 잘 안 돌아가고 있군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말씀하시죠. 그 플랜 B.”
* * *
이틀 전 들은 내용으로는 강재훈 대표의 아내나 아들은 경영 그 자체보다도 돈에 욕심이 큰 자들이다. 그리고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
당연히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를 지원재 실장에게 물어봤지만, 그는 근거에 대해서는 어떤 힌트도 주지 않았다.
‘그냥 안다’ 정도뿐.
하지만 아직 잘은 모르지만 그의 능력이나 성격으로 보자면 ‘그냥 안다’라는 건 없을 것이다.
아마 ‘말해 주기 조금 그렇다’의 의미일까?
그래도 지금 되돌아보면 그날 지원재의 연락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되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주현필이 무슨 무협영화 찍듯 우릴 보호하지 못했다면 멀쩡히 되돌아가지도 못했을 뻔했고.
“무슨 소리! 아, 그 아카데민가 뭔가 하는 작은 회사? 그걸로 우리랑 승부가 될 것 같아요? 웃기는 배짱이네.”
예상했던 반응이다. 허영심과 자존심으로 가득 찬 여자.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죠. 저는 지금 사업 제안을 새로 드리는 겁니다. 자세히 이야기하려면 강재훈 대표님과 지원재 실장님이 같이 계셔야 하고요.”
아마 이 층에 있기는 하겠지만 얼굴을 볼 수는 없을 테지.
그리고 그 편이 오히려 유리했다. 최종 결정권이 이 앞에 있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에게 있다는 의미이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맥스스쿨 관련한 거라면 나한테 이야기하면 돼요.”
“여기에서 계속 이렇게 서서 이야기를 할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말하고는 이미도 원장, 주현필, 그리고 오광필 할아버지까지 한 번 주욱 표정을 살폈다.
역시나 ‘너 뭐야?’ 하는 표정들.
나도 일이 이렇게까지 되리라 예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지원재 실장이 이틀 전 연락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조차도 아마 이걸 쓸 일은 없을 거라고 했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아마 저 강재훈 대표의 부인이란 사람이 제안할 거라고는 둘 중 하나.
강재훈 대표와 우리가 입을 맞춘 시세대로는 지분을 못 넘긴다는 것. 그리고 혹여 투자를 허용한다 하더라도 떨어지기 전 원래 금액, 그러니깐 80억에 8% 정도의 지분만 가져가라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뭐, 두 가지 전부이려나.
아무튼 우리 입장에선 발을 빼는 것이 차라리 나은 상황. 경영에 참여할 수도 없으면서 돈만 투자하는 건 우리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내 제안에 잠시 혼자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그녀는 잠시 뒤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잠시만 기다려요. 사무실 정리는 해야 하니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제안 운운했냐고?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
백전백승 까지는 아니어도 백전 90승 정도는 될 터.
내 주머니와 상대방 주머니에 각각 어느 정도씩 들어있는지 안다면 사정은 바뀐다.
지원재의 통화로 얻은 정보, 그리고 그에 맞춰 준비한 내 자금.
원래의 계획대로 이미도 원장을 지원할 수 있었다면야 내 준비는 아무도 모른 채 잊혀 졌겠지만, 그 계획이 무산된 상황이라면 내 계획을 새로 입안하면 되지.
내 통장에 지금 150억이 들어 있다는 것은 나와 성공 학원 김윤지 원장밖에는 모르는 사실이다.
잠시 뒤, 어딘가에 통화를 하고 온 그녀는 옆에 사내들에게 말해 우리를 복도 옆 사무실로 안내했다. 대표실은 아니고 그 건너편에 있는 사무실이었다.
여기는 딱 보기에 강사들끼리, 또는 강재훈 대표가 몇몇 투자자들을 초대해 상의를 할 만한 크기의 공간이었다.
자주 쓰지는 않았는지 들어가자마자 쾌쾌한 공기 냄새가 났다. 거기에 책상도 한쪽으로 밀어 놓은 상태.
혹시 애초에 주현필이 막아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끌려왔을 장소가 여기였을까.
순간 제 발로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닐지 걱정했으나, 이미 공은 던져진 상태였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주현필이 있었다.
여럿을 당해 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저쪽도 처음처럼 쉽사리 보지는 않을 것.
사내들이 한쪽으로 밀어 뒀던 책상을 다시 방 가운데로 옮기는 동안 지원재의 플랜 B를 머릿속에 정리하고 있었다.
이건 쉽게 말해, 이미도 원장이 아닌 제삼자의 투자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진행하라는 것.
확실히 그는 오늘 상황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나에게 이야기한 바로는, 강재훈 대표는 애초 구두로 논의된 지분을 논의된 금액에 이미도 원장에게 넘기지 못한다면 오늘의 만남을 취소할 거라고 했다.
다만 문제는 일이 어그러졌는데 취소가 아니라 그대로 진행되는 것같이 보이는 경우.
오늘이 바로 그 상황이었고.
강재훈 대표의 부인, 유미진이 상황을 장악하는 경우에는 이미도 원장에게 절대로 계획과 동일한 조건으로 맥스스쿨 투자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원래 강 대표가 맥스스쿨을 흔든 것은 가치를 낮춰 이미도 원장에게 지분을 싸게 주기 위해서였고.
지금 투자를 받지 못한다면 맥스스쿨은 강재훈 대표가 떨군 가치만큼 흔들릴 수밖에 없다.
방금 전 주현필의 방어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게 닥칠 최악의 상황은, 반 강제적으로 80억 투자하고 지분은 8%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겠지.
날강도 같은 짓이기는 하지만 강제로 그렇게 찍어 버린다면 막을 도리도 없었다.
뭐, 나중에 무효 소송을 가고 할 수는 있겠으나, 애초에 조폭 같아 보이는 사람들을 그녀가 이 자리에 대동하고 나온 이유가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말해 봐요. 무슨 제안인지.”
아무튼 우리 편의 시선이 조금 따갑기는 했지만, 지금으로써는 이게 최선이리라.
“S 아카데미 단독으로 맥스스쿨에 투자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따가운 시선. 그중에서도 주현필의 시선이 내 오른쪽 얼굴에 꽂히는 듯 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이곳에서 나가서 맞아 죽을 지도 몰랐다.
아, 그 생각을 하질 않았다. 나도 모르던 무림고수 주현필.
“투자? 호호. 협력해도 백억도 못 맞춘 사람들이 따로 어떻게…….”
“150억이면 어떻습니까?”
오광필 할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 오른쪽 시선 끄트머리로 살짝 보였다.
가능한 금액은 25억 수준이었는데 웬 백억이냐 생각하겠지.
이미도 원장과 주현필 또한 놀랐겠으나, 그들은 그래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듯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면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강재훈 대표가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발을 뺄 것을 알았더라면 아예 애초부터 100억을 맞추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아직 상황의 정확한 전모를 알 수 없으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만 내심 아쉬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미도 원장에 대한 지원이 이제까지의 내 역할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내 협상 판이다.
“150억?”
유미진도 놀란 눈치였다.
그렇겠지. 그녀가 맥스스쿨에 원하는 것은 돈이 다니깐. 뭐, 지원재의 판단이 정확하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그리고 아마 이 금액이면 혼자서 판단을 바로 내리지는 못할 터.
혼자 판단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 가지 조건을 더 내걸 것이니.
바로 이미도 원장의 참여.
과연 어떤 것을 택할지.
“네. 150억입니다. 원래 하려던 대로 지분 조정만 거치고 맥스스쿨로 직접 투자, 아니면 일부는 사모님과 아드님께서 뭔가 하시게 된다면 그쪽으로 돌려 드릴 수도 있습니다.”
미친 소리지.
일을 해 본 적도 없는(물론 유미진은 일을 해 봤으나, 일반적인 노동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사람 둘이 시작하려는 사업에 돈을 투자한다는 것은.
하지만 ‘일부’라고 조건을 단 것은, 내가 잡아야 할 곳은 맥스스쿨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녀 말대로 강재훈 대표가 우리를 물 먹인 것이라면 이 제안의 좋고 나쁨을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연락을 하겠지.
그게 아니고 만약 완전히 그녀에게 실권이 넘어간 상태라면 확인할 것 없이 제안을 물 것이고.
맥스스쿨 지분은 그녀에게 돈일 뿐이다.
잠시 머뭇거리는 그녀. 한 방 더 세게 넣어야 하나?
“100억을 맥스스쿨 투자에, 그리고 사모님과 아드님께서 무엇을 하시든 그쪽 일에 50억을 지원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100억에 지분은?”
100억이면 애초 강재훈이 약속했던 20%를 받을 수 있으려나?
전부 받으면 좋겠는데 지금 그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니 확정할 수는 없다.
“지분은 조정을 하고요. 20% 전부 주시면 좋지만 그건 사모님께서 반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연하지.”
“하지만 추가적인 투자가 들어가니 20% 전부 주십쇼.”
“15%.”
하, 진짜 강재훈이란 사람은 그렇게 대단한 척 다 하더니만 어쩌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진 권한을 다 뺏긴 거냐. 만약 그가 협상 대상자였다면 저렇게 15%를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맥스스쿨 가치는 지금 인위적으로 내려놓은 것이기에 시간만 지나면 다시 원상 복귀될 것은 분명했다.
물론 그 시간이 어느 정도나 걸리느냐는 문제이겠지만.
내가 원했던 건 그녀가 말한 15%였다. 그렇지 않다면 원래 가치대로 100억을 써 놓고 10%밖에 받지 못했겠지.
그런데, 15% 가지고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이기는 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 *
“15% 가지고 뭘 할 수 있어요?”
“글쎄요. 지원재 실장은 그거라도 잡으라고 하더군요. 아무튼, 돈은 가능하겠습니까, 김윤지 원장님?”
“대출받는 거야 뭐 비일비재한 일인걸요. 이미도 원장님이 독특하신 거예요. 사업하면서 대출 하나 받지 않고 하고 있으니.”
“하, 이거, 25억을 현금으로 쓰느냐, 아니면 꿈도 못 꿔 본 100억을 쓰느냐, 생각하니 긴장됩니다.”
“긴장하셔야죠. 내 돈도 50억 들어가는 거니.”
내가 갑작스레 다시 김윤지 원장을 만난 것은 연애를 하기 위해서, 가 아니라 지원재 실장의 연락을 받은 직후였다.
맥스스쿨 투자 건은 이미도 원장과 주현필, 그리고 나만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S 아카데미만 동업하는 관계의 그녀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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