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43화.
심각한 표정의 강재훈 대표. 그리고 지원재가 불편한 자세로 서서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세를 살짝 살짝 바꿨지만 1시간이나 이 상태로 있다 보니 여기저기 쑤셔 왔던 것.
계속 숨도 안 쉬고 있는 듯 고심에 빠진 강재훈을 보며 지원재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잔뜩 맺히고 있었다.
사실 그가 고민하는 이유는 이미도의 80억 언급도 있었고 지원재의 계획 수정도 있었지만, 다른 부분이 더 컸다.
아무래도 아내 유미진에게 이 상황을 들킨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드디어 강재훈 대표가 결론을 내렸다.
“원재야, 좀 앉아 봐라.”
무슨 1시간이나 세워 놓고선 이제 와서 사람 좋은 말투로 앉으라는 건지.
그래도 어쩔 수는 없었다. 그만큼 강재훈 대표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조심해야 할 사람이란 걸 지원재는 잘 알고 있었다.
“네, 대표님.”
“내가 생각을 조금 해 봤는데, 아무래도 이번 건은 엎어야 할 것 같다.”
설마 했건만 이렇게 쉽사리 엎어 버리다니.
하지만 아직 강재훈 대표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엎겠다는 건지 이유를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의문의 표정만을 짓고는 기다리는 지원재였다.
여기까지 와서 엎는 상황이라면 둘 중 하나다.
첫 번째는 단순한 변심.
이 모든 상황 자체가 이미도의 능력을 시험해 본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기준을 맞추진 못한 그들을 판단한 것.
두 번째는 조금 더 가능성이 있으리라.
이건 그의 아내 유미진이 지금 상황을 파악한 경우.
강재훈 대표가 아무리 설득력 있게 변명한다 하더라도 숨겨진 딸의 존재는 가족 내에서 절대로 그가 우위에 설 수 있는 입장을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미도를 크게 도와주며 그들 둘의 관계를 끝까지 숨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것이었다.
헌데 그게 걸렸을 경우, 어떻게인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어쨌든 유미진이 알았을 경우에는 전부 다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닐까.
지원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황이 좋지 않구나.’
“조심스럽게 여쭈겠습니다. 혹시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한숨을 푹 내쉰 강재훈이 대답했다.
“아내가 안 것 같아. 어제 이미도가 누구냐고 묻더라고.”
사실 유미진이 이미도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회사 가치가 떨어진다는 유미진 측근 강사의 전화를 받고 나서였다.
강사들도 나름 지분을 들고 있는 상황이라 맥스스쿨의 성장세가 멈췄다는 신문 기사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재훈 대표가 지분을 처분하려고 한다는 기사가 뜨자 불안했으리라.
나름 강사들끼리, 그리고 주변 사람들끼리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강재훈이 지분 일부를 예상 가치보다 밑도는 금액에 웬 지방 학원장에게 팔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혹시나 친인척인가 해서 유미진에게 조심스레 전화를 건 것.
현실은 우연의 연속이라 했던가.
강사들까지 회사 가치가 하락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혹 필연이라 볼 수 있었겠지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대표가 아니라 대표 부인에게서 찾으려 했다니.
어쨌든 유미진이 알게 됐더라도 진행은 시킬 수 있겠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커졌다.
그녀가 만약 정말로 이미도의 존재를 파악한다면, 가만히 앉아 당하지는 않을 터.
강재훈 대표도, 그리고 일의 기획자인 자신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래도, 이미도 원장에게 그러면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재훈 대표를 무너뜨릴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맥스스쿨에 들어와 지저분하고 피곤한 일까지 하면서 이 자리에 오른 것은, 어찌 보면 그를 살리고 유미진과 그의 아들을 밀어내려 한 것이었다.
까딱하다가는 여기에서 일이 다 그르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원재의 그 말에 강재훈 대표의 표정은 썩 좋지 않은 방향으로 돌변했다.
“너는 내 편이냐, 아니면 이미도 사람이냐.”
사람은 주변인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했나? 그리고 가장 가까운 주변인은 물론 가족이다. 그래서 유미진이 강재훈 대표의 주변에 있는 것보다는 이미도 원장이 있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했다.
전생에 자신이 죽고, 그리고 강재훈 대표가 죽었던 이유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니.
하지만…….
“당연히 대표님 사람입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방안이 나올 때까지는…….
강재훈 대표는 바로 몇 시간 전 오랜만에 찾을 딸에게 선물을 안겨 주려는 부족한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의 것만을 위하는 냉정한 가장으로 돌변한 듯했다.
또는 경영자란 이런 것이려나? 상황에 따라 적응하지만, 그것의 결과가 다른 이들에게는 작지 않은 상처를 줄 수 있는 그런…….
“그러면 방법을 생각하자. 이걸 마무리 짓고 일단은 내 아내를 잘 달랠 방법을…….”
하지만 이런 강재훈도 지원재가 가지고 있는 복수심의 크기를 알지 못했다.
지원재는 머릿속에서는 이미 어려워진 상황을 타개할 계책을 만드느라 바쁜 상태였다.
* * *
“무슨 말씀이세요?”
이미도 원장의 표정이 어두웠다.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애초부터 왜 이런, 가족에게 알려질 위험부담을 안고 그녀에게 접근을 했던 것이며,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넘겨준다고?
나라면 아마 그렇게까지 무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충 어떻게 맥스스쿨에 있던 주현필이 지방에 있는 작은 학원 원장의 수족이 되었는지, 그리고 신성 학원 건물이 주현필 이름으로 소유주가 되어 있었는지 이해는 됐다.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 하려던 것은 맥스스쿨의 경영권 자체를 넘기겠다는 것.
물론 강재훈 대표 자신이 계속해서 대표로 남는 조건이었으나, 그렇더라도 지분 20%를 넘긴다는 제안은 당연히 현재 가족의 입장에서 인정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리라.
큰 아들에게 10%, 아내에게 10%를 주는 상황에서 숨겨 둔 딸에게 20%라고?
그럼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주인이 연락을 해 왔는데 마다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다만 숨겨진 이유들, 숨겨진 사연들이 뭔지, 그리고 지금 이 뜬금없이 꼬인 매듭이 어떻게 풀릴 것인지, 또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가 궁금한 거지.
그리고 이제 와서 강재훈 대표가 우리에게는 일언반구 없이 자신의 아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그 아내란 사람은 지금 우리를 막고 있다.
잠깐, 막고 있다는 것은?
“말했잖아. 내 남편이 자기가 세운 계획을 틀어 버린 거라고. 그러니깐 내가 새로 제안하는 것을 듣고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면 돌아가는 게 좋을 거예요.”
“저…….”
주현필이 질책하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다.
아마 ‘너는 조용히 있지, 자꾸 왜 끼어들어?’ 하는 생각이겠지?
하지만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었다.
“강재훈 대표님도 동석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이는 나한테 모든 것을 맡겼어요. 왜 자꾸 관계없는 사람이 끼어들죠, 그런데?”
“맡겼다고 하더라도 얼굴은 뵙고 이야기할 수는 있잖아요. 지금 어디 계신 거죠? 지원재 실장은요?”
강재훈 대표는 여기 이 층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뭐, 내가 탐정은 아니니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의 아내가 우리를 막아설 이유가 굳이 없지 않았을까. 사무실에서 우릴 맞아도 될 일인데.
거기에 덩치 좋은 사내들이 여럿이다. 혹시 저쪽도 저쪽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가 아닐까.
주현필과 정장 입은 사내들이 몸싸움을 벌인 곳은 넓은 장소가 아니다.
그들 뒤로 이제야 시선이 갔고, 멀리 복도 끝 ‘맥스스쿨 대표 사무실’이라고 쓰여 있는 푯말이 보였다.
최소한 강재훈 대표나 지원재 둘 중 하나가 저기에 있지 않을까.
“왜? 뚫고 들어가 보게요?”
내 시선을 의식했다? 그렇다면, 내 생각이 옳을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이 여자가 말하는 것처럼 강재훈 대표가 모두 엎은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그가 엎을 것이었다면 우리를 굳이 부를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그리고 이 여자. 왠지 경영자라기보다 조금 진상 학부모와 비슷하단 느낌이 든다.
만약 그렇다면…….
“아닙니다, 사모님. 어떻게 뚫고 들어가겠습니까. 다만 다는 못 받아도 조건을 달리 하면 사모님께서도 만족하실 상황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관계없는 사람이라니깐.”
“저는 관계없을지라도 제가 가진 돈과 회사, 그리고 그것의 성장세는 관심을 가지셔야 할 겁니다. 사모님께서 얼마나 이 사업에 관심이 있으시고 이 업계에 대해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와 맥스스쿨은 업종 특성상 곧 부딪힐 예정이거든요.”
앞만 보고 있던 이미도 원장이 뒤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오광필 할아버지도.
이제까지 상대 사내들과 대치중이기 때문에 살짝 살짝 우리 쪽으로 확인하던 주현필 까지도 아예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강재훈 대표님, 그리고 지원재 실장님과 만나야겠습니다. 막으신다면, 그냥 돌아가겠지만 만나게 해 주시는 것이 사모님과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지분의 가치에도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 * *
이틀 전, 며칠 조용하던 내 전화기가 울렸다.
학원에 나와 S 아카데미 촬영실에서 또 밤샘을 한 윤 형과 인사를 하고 내 강의실로 막 들어왔을 때였다.
내가 아무리 S 아카데미 대표이고 신성 학원 매출보다 내 회사 매출이 더 커진 상황이라 해도, 실강이 없는 인강 시장은 아직 홍보나 접근성 면에서 조금 어렵다.
뭐, 사실 조금 더 제대로 비교하자면, 인강은 신흥국 주식시장이고 실강은 미국 국채 정도 될까?
아무튼 인강에 내 강의를 유료로 올리는 상황은 아닌지라, 나도 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신성 학원 강사로 실강을 계속 진행하던 것.
촬영실보다는 아직 내 강의실이 편하기도 했고.
띠리리리.
좋아하는 가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냥 원래의 기본음으로 설정해 둔 전화기기 울렸다.
평소 별로 쓸 일이 없었던 전화기. 화면에는 ‘맥스스쿨 지원재’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어? 뭐지, 이 사람이?”
지원재 실장은 첫 만남 자리에서부터 나에게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친해지거나 한 관계는 아니었다. 전화가 온 것도 이번이 처음.
“여보세요?”
-유현덕 대표님? 맥스스쿨 지원재입니다.
사무적인 말투.
학원 강사도 밖에 나가거나 업무적인 일을 할 때는 남들에게 사무적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 사람은 마치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느낌이다.
그리고 뭔가 모를 경계심이 들기도 하고.
너무 깔끔한 외모에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실력으로 맥스스쿨 업무실장, 강재훈 대표의 최측근이 된 사람이라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겠지.
아무튼 남자라도 잘난 남자를 보면 경계하기 마련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유현덕입니다. 무슨 일로 실장님께서 저에게 연락을…….”
-바쁘실 텐데 감사합니다.
햐, 인사성도 바르고……. 참, 내가 그보다 더 어렸지.
아무튼 괜찮은 사람 같았으나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위험할 사람 같기도 했다.
-지금 통화 괜찮으십니까? 사업 문제로 조금 길게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사업 문제? 나에게 그가 사업 문제로 길게 할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맥스스쿨 투자 건은 이미도 원장이 주인공인데.
강의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강의까지 1시간 정도는 있었다.
“네,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죠.”
-준비는 잘되어 가십니까? 애초 100억에 합의가 된 부분을 80으로 내리셨다면 그만큼 어려운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아, 그거요? 그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80억이 지금으로써는 한계더라고요.”
한계.
아니다. 사실 사업을 확장할 때 필수적인 부분이 바로 대출이다.
보유하고 있는 현금 80억에 학원 건물과 학원을 담보로 잡으면 아마 200억도 가능하겠지.
다만 이미도 원장이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줬기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나만 따로 대출을 받는 방법도 있긴 했으나, 지원하는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나서기도 애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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