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39화.
“원재야, 이미도는 준비 잘하고 있어?”
“네, 대표님. 그렇잖아도 어제 통화했습니다. 자금은 예상보다 탄탄하게 준비한 것 같습니다.”
“그래. 어떤 시점에 어디까지 떨굴 수 있나 한 번 봐야겠지. 이만한 도박은 오랜만에 하는 것 같네.”
강재훈 대표는 지원재와 대화를 나누며 바로 전날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건강해 보이는 걸? 오랜만에 봤더니 많이 컸구나.”
그의 앞에 이제는 서른이 다 된 큰아들이 있었다. 어께도 그보다 훨씬 두꺼워져 끌어안기도 어려웠다.
“아버지, 오랜만에 뵙네요.”
“그래. 하하. 미국 생활은 어땠니?”
“뭐, 그냥 그랬습니다. 얼른 다시 와서 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해서요.”
얼굴은 웃고 있지만 어렸을 적 보던 그런 순수한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의 나이가 칠순으로 달리고 있고, 아들은 아직 서른이 채 되지 않았다.
거기에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부인 유미진을 꼭 닮아 야망도 컸다.
맥스스쿨을 자신에게 넘겨받아 운영하겠다는…….
“이제 다 컸죠. 슬슬 당신 일 가르쳐도 되지 않을까요?”
이게 과연 질문일까 강재훈은 생각했다.
‘아니, 그냥 질문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러라는 압박이겠지.’
“천천히 배워 가면 됩니다, 아버지.”
강재훈이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미리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리는 그의 아들.
그래도 그에게 학원을 물려주고 싶지가 않았다. 맥스스쿨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기에…….
자신은 아버지로서 물려줄 것만 물려주고 주인이 될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45년 전, 그녀를 만났다. 불같은 사랑을 했다.
전쟁 후였기에 하루하루가 지옥 같더라도 열심히 살려고 했다. 교육 사업에 꿈을 가지게 된 것도 그때 그녀와 함께였고.
“학생들 가르치고 돈을 조금 받는, 그런 사업은 어떨까? 장소만 있으면 머리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니.”
“좋은 걸요? 우리 둘 다 학교는 다 나왔으니까요.”
돈을 받지는 못했다. 먹고살기 바쁜 시대라 공부에 힘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도 몇 안 되는 학생들이 쌀 주머니니 뭐니 가져오는 것으로 버틸 수 있을 정도.
강재훈은 낮에 공사장에가 일을 하고, 저녁 때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내는 낮에 어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저녁때는 강재훈과 함께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10년.
그래 봐야 1960년대 말, 70년대 초였지만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삶이 조금씩 살 만해지고, 작은 공부방도 하나 차렸다.
수입이 크지는 않았지만 학생 수는 확실히 늘어났다. 생기지 않던 아이도 생겼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그런데…….
유미진을 만나게 된 것은 그맘때였다.
“당신들 누구야?”
한 무리의 건장한 사내들이 강재훈과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공부방으로 들이닥쳤다.
수업을 듣던 학생들 중에도 힘깨나 쓰는 자들이 있었으나, 이렇게 갑작스레 쳐들어온 경우라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작은 공부방은 비명 소리로 가득 차고, 문과 가장 멀리 떨어져 수업을 하고 있던 강재훈만이 급한 대로 앞에 있던 지시봉을 들고 건장한 사내들과 대치했다.
“다들 나가! 얼른!”
쾅쾅!
사내들은 각각 한 자루씩 몽둥이를 들고 있었고 이를 벽에 쳐 큰 소리를 내며 겁을 주었다. 가끔씩 꾸물거리며 딴 짓을 하려는 학생들은 어김없이 몽둥이세례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겠지만 이 당시에는 비일비재한 일.
“자, 선생님도 얼른 나가시죠. 이 건물은 허가받지 않은 건물입니다. 철거 전 퇴거 작업 중입니다.”
역시나 가건물에 공부방을 튼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이 당시는 사람이 사는 곳 중에 가건물이 아닌 곳을 찾기가 더 힘든 시절이었다.
전후 복구 사업이니 뭐니 하면서 수도 서울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여기저기 공사판이 벌어지고, 각각의 공사판에서는 노동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노동자들이 전국에서 모여들면서 주변에 형성한 주거지역은 대부분이 가건물.
강재훈이 공부방으로 빌린 이 공간도 가건물이었다.
운이 나빴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으리라.
수많은 가건물이 재건축과는 거리가 먼 위치에 있었으나, 운이 나쁘게도 공부방의 건물은 재건축 대상지.
가끔씩 식료품을 사러 장에 갈 때마다 뭔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 것은 봤지만, 이런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안 돼요! 아악!”
몸으로라도 버텨 보려 했으나 불가항력이었다.
그는 몽둥이로 몇 대 맞은 뒤 정신을 잃고 끌려 나왔고 다시는 그 안을 들어가지 못했다.
“여보, 이제 우리 어떡하지.”
“괜찮아요. 다시 시작하면 되지.”
하지만 당시의 그는 지금처럼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급한 대로 건설 현장 일용직으로 돈을 벌어야 했다.
고된 하루 일과를 술로 마음을 달래는 날들이 늘어났고, 그의 마음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강재훈 씨. 내가 당신 도와줄게요. 호호.”
그리고 그때 손을 내민 것이 유미진이었다.
여기부터는 자신의 잘못이다.
아내와 떠난 뒤 10년 넘게 소식조차 듣지 못했던 딸의 고생도 자신 때문이었다.
그걸 용서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그래도 도리는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 일만 계획대로 된다면…….
* * *
“안녕하세요. 일전에 인사드렸지만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S 아카데미 대표 유현덕입니다.”
내가 이렇게 인사했다. 그리고 반응은…….
“뭐야? 당신이 대표이사였어?”
대부분이 이랬다.
서울 맥스스쿨 본원 주변 학원들에서 온라인 강의 촬영을 위해 데려온 강사들과 인사하는 자리.
오랜만에 이쪽으로 행차하신 성공 대입학원 김윤지 원장과 신성 학원 이미도 원장, 주현필, 그리고 미래 학원 오광필 회장님까지. 주요 인원이 전부 모였다.
그만큼 새로 들어오는 강사진의 위용은 이쪽 지역에서 낯선 일이었다. 게다가 대표라는 사람이 이렇게 새파랗게 어리다니 다들 놀라는 눈치.
내 나이가 이제 스물넷, 그리고 이번에 온 강사들 평균 나이는 서른다섯이다.
평균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서른 초반이기에 그래도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물론 내 옆에 서 있는 이미도 원장과 주현필, 김윤지 원장까지는 비슷한 나이또래.
그들은 죽 쳐다보며 별 감흥이 없다가 오광필 할아버지의 외모에 다시 놀랐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오묘한 조합으로 보일 것이다. 20대 초중반 대표에 60대를 넘는 것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동업자까지.
만약 맥스스쿨 강사들이라면 어땠을까?
거기는 거기대로 나이 많은 강재훈 대표, 그리고 그의 오른팔은 20대 후반의 지원재 실장 체제이니…….
아무튼 거기나 우리나 일반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환영합니다, 누추한 곳까지 다 행차하시고. 허허. 이 시스템 운영하는 사람이 조금 젊어서 놀랐죠?”
능글맞은 오광필 할아버지는 역시나 이들을 가지고 놀 생각을 하신 것 같다. 어찌 반응을 해야 할지 불편해하는 모습.
“왜 그러셔요, 할아버지. 제가 조금 어리기에 여러 선생님들 도움이 많이 필요합니다. 다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저희 계획에 협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S 아카데미 시스템을 설명 드리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하고 말도 더듬거렸는데 이제는 학원 강사 다 된 것 같았다.
이게 수업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 싶겠지만, 의외로 애들이나 학부모 데리고 말하는 것과 다른 강사들 데리고 말하는 건 부담감이 차원이 다르다.
그래도 성공 대입학원에서 지원받은 학벌 좋은 선생님들도 데리고 해 온 일이라 조금 편해진 것.
“비율은 미리 계약서로 확인하신 대로 7 대 3입니다. 물론 강사님들이 7이고요. 그리고 운영 부분을 말씀드리면, 3에서 2는 S 아카데미 운영비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머지 1은 여러분 전속 계약된 학원으로 들어가는 금액이고요. 이 계약은 3개월짜리입니다. 그 후 계약을 연장하기 원하시면 그때 다시 새로운 계약서 작성하시게 됩니다.”
이들의 조건은 기존 S 아카데미 강사들의 계약 조건과 약간 달랐다.
기존 강사들은 전부 성공 대입학원, 신성 학원, 그리고 지역 내 학원연합 소속 강사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각 학원이 가져가는 비율을 신성 학원과 성공 대입학원이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이들은 전속 계약된 학원이 따로 있기에 그쪽으로 수익이 넘어가게 되는 것이고.
물론 그게 나 자신에게 손해는 아니었다.
어차피 S 아카데미 시작과 운영에 들어간 돈은 전부 내 돈이고, 그렇기에 어떤 계약을 하건 운영비로 들어오는 돈이 결국 내 돈이 되는 것.
출자를 내가 100% 했으니 전부 내 거라고 해야 할까? 마음대로 쓸 수는 없겠지만.
계산을 따로 하지는 않았으나, S 아카데미에서 버는 액수는 내가 실강으로 벌어들이는 것과는 숫자 자릿수가 달랐다.
“저, 질문이 있습니다. 음.”
계약 당시 상당히 삐딱하게 나오던 강사 한 명이 마치 학생처럼 손을 들고는 멋쩍게 말했다.
“네, 말씀하시죠.”
“맥스스쿨을 잡는다고 하셨는데, 이걸로 잡을 수 있는 겁니까?”
단순히 온라인 사이트 하나를 크게 만들어 맥스스쿨을 잡는다는 것은 이들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었다. 아무리 이게 성공한다 할지라도 결국 돈만 벌고 잡지는 못할 것 아닌가.
그래도 궁금하긴 하겠지.
“방법은 있습니다.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요. 선생님께서는 맥스스쿨을 왜 잡고 싶으신 겁니까?”
이거, 누구의 말투와 비슷하지 않은가? 대답보다도 다시 질문을 해 버리는 누구.
옆에서 따가운 시선 한 쌍과 기특하다는 시선 한 쌍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글쎄요. 맥스스쿨 사이트가 성공한 후로 우리 실강생들이 약간이지만 줄었어요. 그래서 잡아 보고 싶은 겁니다.”
“그러면 다시 실강생들이 선생님 강의를 들으러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셔서요?”
그럴 리는 없다. 실강의 장점은 분명 존재하고, 현재 신성 학원과 성공 대입학원, 그리고 미래 학원은 이러한 내용에 대한 정보 공유를 통해 온라인 강의와 차별을 두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학생 관리’라는 측면에서 인강은 실강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미 한 번 편한 인강의 맛을 본 학생들이 다시 실강으로 넘어가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집에서 편안히 간식 먹으며 원하는 페이스로 공부를 할 수 있는데 뭐 하러 길에다 시간 버리고 학원을 찾겠는가.
만약 실강생이 줄었다면 그건 전략의 부재가 원인이지 인강이 월등히 좋아서가 아니다. 인강처럼 실강을 계속하려니 밀릴 수밖에…….
“글쎄요.”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그도 확신하지 못하기에 어쩔 수 없으리.
“지금 준비하는 인강에 집중해 주십쇼. 우리는 실강을 보조하기 위해 이걸 만든 것이 아닙니다. S 아카데미는 들어 보셨나요?”
“…….”
아무도 대답은 없었지만 새파랗게 젊은 애한테 훈계 받는 기분이라 썩 좋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내가 돈을 주는 사람이고 이 판에서는 내가 그들 원장인데.
“저희는 전략 자체를 맥스와 다르게 가져갔습니다. 내신 중심으로 기존에 맥스에 없었던 강의들로 이만큼 자리 잡고 여기 계신 유명 강사님들께 제안을 할 위치까지 온 겁니다.”
이제 이들에게 전할 본 내용이 시작됐다.
“여러분들께서는 맥스스쿨과 동일한 분야의 강의를 촬영하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실강 시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우리가 그들의 밥그릇을 뺏어 올 겁니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딱 세 달 동안 촬영하고 그 이후에 성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그쪽보다 좋은 강의를 만들어 주실 거라 믿습니다.”
“…….”
긴장된 표정들.
“쉽게 말해서 그쪽 강사진들과 ‘진검 승부’를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 말이죠.”
아무래도 내가 어려서 이 답답이들이 올바른 판단을 머뭇거리는 것 같았는지, 이 자리의 최 연장자 오광필 할아버지가 거들었다.
잠시 동안 아무도,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한 강사가 물었다.
“최종 목표는 그러면 무엇입니까?”
옳지. 이것이 내가 원했던 질문.
“맥스스쿨을 인수합니다. 여러분들은 아주 큰 강의료를 받고 그쪽과 같은 급의 전국 1타들이 되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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