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37화.
“투자처는 많잖아요. 게다가 유현덕 선생님이 땅 가지고선 돈 불린 것 보면 운도 따라 주는 것 같고. 감을 믿어 봐요.”
이제야 뭔가 궁금증이 풀릴 것 같았는데 빙빙 둘러 가는 이미도 원장.
사실 이 문제는 아무리 그녀라도 나에게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울 수 있으리라.
얼마나 성공을 하고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거나에 관계없이 나는 그녀에게 20대 초반의 운 좋고 능력 좀 있는 강사일 뿐.
그리고 나의 처음과 지금 모습을 모두 알고 있는 그녀에게는 이런 부탁, 또는 제안을 한다는 것이 마치 부모가 돈 많은 자식에게 손을 벌리는 것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요즘은 감이 잘 안 오네요. 하하. 혹시 돈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지금은 그냥 은행에서 놀고 있으니…….”
일부러 약간 더 강조해서 이야기했다.
‘돈 쓸 곳이 없어 고민이에요.’ 하는 표정으로.
그리고 티 나지 않게 조심하며 유심히 이미도 원장의 반응을 살폈다.
역시, 그녀의 표정에 변화가 있었다.
평소에도 약간의 미소를 띤 얼굴로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오늘은 확실히 내 말과 표정을 유심히 지켜보고는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그리고 “이제까지 유현덕 선생님 제안만 들어 왔는데, 이번에는 내 제안 한 번 들어 보지 않을래요?”라고 말하는 이미도 원장.
드디어 나도 그녀에게 있어서 주현필과 같은 위치의 측근이 되는 것인가?
내가 대답 없이 눈만 동그랗게 뜨자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S 아카데미로 뭘 하고 싶으신 거죠?”
“네?”
아니, 자기 제안을 들어보려고 하는 사람한테 다시 질문을 던지면 어쩌자는 건지.
하기야 곧바로 막 ‘이런 방법으로 맥스스쿨을 이겨 봅시다.’라거나 또는 ‘우리 아버지가 대기업 회장이에요.’라는 말을 했다면 그것도 어색한 상황이리라.
그녀가 말한 것은 이미 내 중간목표 중 하나였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 척하고, 약간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자세를 바로잡고 대답했다.
“글쎄요. 돈을 벌고 싶은 거고, 가능하다면 저의 생각들이 어디까지 현실이 될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생각이 현실이 되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말.
내 계획들이 정말 죽을 때까지 시간별로 해야 할 일이 있고 달성해야 할 목표가 정해져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다만 나는 내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높이 올라가 보고 싶었다.
“나도 그래요.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원장님도요?”
“네, 해 보고 싶은 것들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말이죠.”
이미도 원장의 꿈이라.
어디까지일까?
“솔직히 말해서 유현덕 선생님이 2년 전 우리 학원에 면접 보러 올 때까지는 그냥 생각만 했었죠. ‘하고 싶다. 그런데 여건이 되질 않는다.’라고요.”
그녀는 잠시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을 들고 목을 축인 후 다시 이어 간다.
“예전에 저보고 부자냐고 물어봤던 것 기억나요?”
그랬었지.
멋도 모르고 조금 잘나가는 동네 학원이라고 판단하고 성장에 투자를 해 보려고 제안했던 것이었다.
전생에 들었던 신성 학원 규모로 성장하면 만족이다 생각하고.
역시나 소시민적인 사고방식…….
물론 그 제안 자체는 이미도 원장이 거절했지만, 결국 내가 신성 학원에 기여를 하고 그 돈을 바탕으로 S 아카데미를 만들어 수익을 나누고 있으니 내가 생각했던 그림은 기대 이상으로 성공적.
어찌 보면 다행이었지.
그때 제안이 거절당한 후로 아예 목표치를 위로 올려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아무튼 그때 그녀는 그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가 부자라고 했다. 누구인지까지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리고 부자 아버지의 사생아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저희 아버지가 강재훈이에요. 물론 이건 우리 학원 안에서 주현필 선생님만 아는 사실.”
강재훈? 어디선가 많이는 아니지만 몇 번 들어봤던 이름.
하지만 누군지 바로 떠오르지가 않았다.
“맥스스쿨 대표, 강재훈이요.”
이런, 언젠가는 S 아카데미로 따라잡으려는 목표인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니…….
“네? 맥스스쿨? 그런데 왜 맥스스쿨을 잡으려는 저를 도와주시는…….”
이미도 원장의 숨겨진 부자 아버지가 강재훈이었다니.
이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거대 학원인 맥스스쿨에 있던 주현필이 지방의 조그만 학원으로 오게 된 것도, 그리고 신성 학원의 주인은 이미도 원장이지만 건물주는 주현필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것도 말이다.
강재훈 대표와 이미도 원장의 관계는 나쁘지 않다.
게다가 이미도 원장의 정체를 강재훈 대표의 가족이 모르거나 하는 상황.
그래서 주현필을 보내 돕게 하고 제대로 숨겨 놓기 위해 건물주도 주현필의 명의를 쓴 것인가.
그때 주현필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한 말도 전부 이미도 원장의 이런 가족 관계 때문인 것이고…….
“한 번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보려고요.”
알 듯 말 듯한 소리.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 * *
S 아카데미 강사 회식 후, 그리고 주현필이 유현덕에게 해장국을 사 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지 며칠 뒤, 시내 한 카페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9월도 중순에 접어들고 있었기에 무더웠던 여름 날씨도 이제는 조금 선선해지고 있는 시점.
이런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정장 차림의 지원재, 그리고 테이블 건너편으로 이미도와 주현필 까지. 셋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물론 이미도 특유의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강재훈 대표님께서 정말로 그리 말씀하시던가요?”
“네, 정확히 그렇게 말씀하시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사실 그들 사이에 특별히 개인적인 이야깃거리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항상 딱딱한 사무적인 내용만이 약간의 농담을 윤활유 삼아 오가던 것.
다시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깬 것은 주현필 이었다.
“실장님도 그에 동의하시고요?”
“저는 대표님 의견을 전달 드릴 뿐입니다. 다만, 이 제안이 이미도 원장님과 주현필 선생님께 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에게는 조금 위험한 순간이 오겠지만요.”
“좋아요. 하겠습니다. 대신 우리는 제안을 받아들여 주는 쪽이니 한 명 더 추가해서 진행하도록 해 주세요.”
“유현덕 선생 말씀이십니까?”
지원재의 입에서 유현덕의 이름이 나온 것은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본인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S 아카데미 대표 유현덕은 적어도 사교육 업계 내에서 이제 유명인이었다. 게다가 지원재는 지난 만남부터 계속 지켜보고 있었고.
오히려 처음 강재훈이 제안을 꺼냈을 때, 이것을 여유 있게 받아들일 현금은 유현덕이 이미도보다 많을 거라고도 생각했었다.
“네, 어떻게 바로 알아맞히시네요? 호호.”
이번 만남에서 이미도가 처음으로 웃었다.
지원재는 유현덕이라는 사람이 그녀에게 과연 어떤 존재일까 궁금했다. 단순히 아끼는 능력 있는 후배인지, 아니면 다른 것도 혹시 더 있을지.
아무튼 덕분에 딱딱했던 분위기는 조금 풀렸다.
“요즘 분위기로 보자면 그쪽이 가장 현금이 많을 수도 있으니까요. 유현덕 선생님에 대한 참여도 생각은 했습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이미도 원장님께서 훨씬 유리한 위치를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대표님께는 일단 저희가 긍정적으로 생각 중이라고 전해 주세요. 어느 정도 규모가 가능할지 계산을 해야 하니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고요. 그리고 시작은 언제 쯤 하실 생각인지…….”
“준비되는 대로 곧바로 시작할 예정입니다만, 그 부분은 저도 확인을 해야 합니다. 결정 나면 곧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원장님께서 결정을 먼저 해 주셔야 하고요. 그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이미도는 옆에 앉아 있는 주현필을 쳐다보았다.
원래 표정이나 인상이 썩 좋지 못한 사람이지만 지원재를 만날 때는 더욱 경계하는 느낌이었다.
대신 그런 표정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었고, 주현필은 이미도의 시선을 느끼고는 나름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재도 그 모습을 지켜보고는 펼쳐 놨던 서류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곧바로 다시 올라가시나요?”
자리가 대충 정리되는 분위기라 이미도가 인사치레로 물어봤다.
“네, 곧바로 올라가 대표님께 보고 드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미도 원장님.”
“네. 말씀하세요.”
“강재훈 대표님께서는 계속 한 번 보고 싶어 하십니다만, 제 개인적인 판단은 당분간, 적어도 이 계획이 시작되기 전까지 만이라도 기다려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계획대로 진행되고 대표님 생각대로 라인 정리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상관없겠습니다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현필 선생님도 항상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눈에 띄지 말라고.”
이러면서 슬쩍 다시 주현필을 쳐다보는 이미도.
자신과의 관계는 조금 불편할지 몰라도 이미도에게는 그만큼 충성스러운 직원이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원장님.”
* * *
이미도 원장이 말해 준 계획은 놀라웠다.
이 정도로 복잡하게 설계한 자는 지원재 실장.
그리고 그 뒤에 맥스스쿨 강재훈 대표가 있으리라.
“가능하긴 한 거예요? 지금 저희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정확히 유현덕 선생님이 어느 정도나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죠. 그거에 따라서 가능할지, 아니면 조금은 불안한 도박이 될지 모르는 상황인 것 같아요.”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라. 내 입장에서는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큰돈이지만 투자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더라도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것이 투자였기에…….
그리고 사실 거대 학원 기준에서는 그리 크지 않은 액수일 수 있었다.
“충분할지 모르겠는데요? 갑자기 들은 이야기라…….”
“저나 주현필 선생님은 총 50억 내외로 운용 가능할 것 같아요. 최근 그걸 좀 계산해 보느라 바빴던 거고요.”
“50억…….”
둘이 바쁘기는 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둘이 뭔가 드디어 잘되 가나 보다 생각했는데 이런 엄청난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당연히 바빴겠지.
“그만큼 없어도 됩니다. 지금 S 아카데미 운영비로 들어가는 돈도 꽤 될 테니까요. 가능한 선을 계산해서 알려 주시면 결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나저나 함께 하시는 거죠? 이 일의 목적에 동의도……..”
이야기의 목적이라.
요지는 이것이었다.
이유는 자세히 말하기 어렵다고 했으나, 중요한 것은 강재훈 대표가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맥스스쿨을 넘기지 않고 숨겨 놓은 딸인 이미도 원장에게 넘기고 싶어 한다는 것.
이 무슨 드라마 같은 이야기인지.
아무튼 계획된 일의 순서는 이렇게 된다.
강재훈 대표는 자신의 지분 중 일부를 현재 금액으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상속한다.
그리고 곧바로 내가 서울 맥스스쿨 주변의 대형 학원들에게 S 아카데미를 통해 온라인 교육 사업에 참여시키고 필요한 자금과 기기들을 지원.
맥스스쿨 온라인 사이트의 가입자가 흔들릴 정도로 S 아카데미의 규모가 커지면 그때 강재훈 대표가 자신의 지분을 싼값에 이미도 원장과 주현필에게 넘기고 대표 자리만을 약속받는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강재훈 대표가 지분을 내던질 때 그 사실을 언론에 알리는 것.
창업자가 지분을 내던질 정도라면 다른 주주들도 분명 움직일 것이고, 맥스스쿨의 가치는 땅으로 떨어진다.
강재훈 대표의 것과 함께 내던져지는 다른 지분들까지 회수한 후 이미도 원장이 최대 주주로 나서는 것이 바로 준비한 계획의 목표이다.
인수된 맥스스쿨의 운영은 동류의 S 아카데미가 있으니 어렵지 않을 것이고.
이미도 원장에게 줄 거라면 가치 떨어뜨리지 말고 그냥 주면 되는데 뭣 하러 그렇게 복잡하게 하느냐고?
당연히 나도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봤었고.
“가족들 모르게 진행하기 위해서죠. 강재훈 대표에게 이런 의도가 있다는 것을 모르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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