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24화.
“선생님은 조규만 회장이 제의를 받지 않았잖아요?”
“아, 그렇지 참.”
아, 혹시 그도 제안을 받았었나 했다, 순간.
이 사람은 흥분하면 멍청해지는 듯하다.
“강사가 늘었으니, 거기에 조건도 파격적이니깐 전체적인 분위기와 원생 수로 남은 에너지 상황을 전해 달라?”
이미도 원장은 그에 비하면 훨씬 사리가 빠르고 정확하다.
“그렇죠! 그렇게 되면 유환 선생님은 그쪽 힘 떨어지는 모습을 계산하면서 신경 써서 보실 거고,”
“결국 우리 쪽으로 다시 돌아설 거다, 이 말이야?”
“네, 맞습니다. 그러니 좋게 내보내서 여지를 남겨 줘야 하죠.”
“좋게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나쁘지 않은데? 구체적인 미끼는 논의를 더 해 봐야겠지만요.”
만약 스카우트 대상이 주현필이었다면 이 전략을 쓸 수가 없었다.
유환 선생님이 수학과고, 그간 우리 학원의 원생 흐름 및 성장률을 계산하는 일을 맡아 왔었기에 부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가정이 가정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이유는, 조규만이 주현필에게 연락을 했더라면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할 사람이니 주현필이 스파이가 될 확률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미끼랄 것이 뭐 필요할까요? ‘이쪽도 사력을 다해 싸울 거니깐 성공 대입학원도 흔들릴 수 있다. 정보만 제대로 준다면 거기에서 일하는 것에 불만 가지지 않고, 혹시라도 우리가 이긴다면 우리 학원으로의 복귀를 포함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하겠다.’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면 유현덕 선생이 이야기해 볼래?”
미쳤어요, 주현필 선생님?
“아뇨. 훨씬 선배신데, 어떻게.”
“그냥 해 본 소리야. 유현덕 선생 간이 어느 정도 커 졌는지 보려고.”
* * *
이중 스파이 유환 선생님이 틈틈이 전해 준 정보는 신성 학원측에 아주 유용했다.
현금을 가지고 치킨 게임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힘과 적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
신성 학원은 방어로, 협력 중인 미래 학원은 공격으로 성공 대입학원의 체력을 깎아 내는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이거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는데? 이 정도면 망해야 하는데 잘 버티는 것 같지 않아?”
“썩 좋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잘 버티고 있어요. 오히려 저희 재정 상태가…….”
“윤지야.”
조규만 회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는 성격상 친척이라고 무조건 감싸는 사람이 아니었다.
“네, 외삼촌.”
김윤지는 긴장했다. 곧 호통이 날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네 제안이 실패한 거다.”
그런데 이날은 그러지 않았다.
다행일까?
김윤지는 유현덕 한 명이 이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신성 학원이 미래 학원 오광필 전 회장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들었다. 하지만 이미도 원장과 오광필, 그리고 햇병아리 유현덕, 셋이서 기존 성공 대입학원의 원생을 빼 가는 것이 가능하긴 한 일일까.
이 근방 학원 중 최고 학력 강사를 최다 보유한 성공 학원이었다. 도대체 무슨 조화를 부렸길래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움직인단 말인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유현덕이 한 달 내로 넘어오겠다고 했어요. 그러면 지금 미래 학원에서 유현덕 강의를 듣는 원생 상당수가 우리 쪽으로 돌아올 겁니다.”
“그래, 일단 기다려는 봐야지. 하지만 그 꼬맹이가 딴 짓을 하면 나도 최후의 수단밖에는 없다.”
침착한 목소리지만 김윤지는 서늘함을 느꼈다.
조규만이 말하는 최후의 수단은 상대 학원의 강사를 빼 오거나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가 외삼촌 조규만을 돕기 위해 학원 일을 시작한 뒤, 딱 한 번 정말 화가 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보통 때와는 완전히 달랐던…….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유현덕이 싫지 않았다.
IMF 위기 이후로 꿈을 가진 젊은이들이 없었다. 가진 자들만 살아남고 대부분이 쓰러진 채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 버리는 요즘 시기에 보기 드문 친구였다.
게다가 아직 20대 초반. 제발 그가 쓸데없는 짓을 더 이상 하지 않기를 바랐다.
* * *
“선생님,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맞아요. 밥은 뭐 먹어요?”
스무 명 정도 되는 학생들. 나는 그들을 데리고 학원을 나갔다.
목적지는 성공 대입학원 인근 삼겹살집.
일단 아이들은 중간고사 후 성적이 오른 원생들에게 고기를 사 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목적은 잘 따라와 준 아이들에 대한 보상만이 아니었다.
김윤지와 약속했던 한 달이 되는 날.
6시에 성공 대입학원 앞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거절의 의미. 게다가 지금 데리고 온 학생들은 전원 성공 대입학원의 원생이었다가 유현덕을 보고 미래 학원으로 옮긴 아이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유환은 학원 분위기가 어수선하다고 전해 주었다.
강사 수는 갑작스레 넷이 늘었는데 원생 수는 그 전보다 20% 줄었다.
게다가 기존 고학력자 위주의 성공 대입학원 강사들과 신성 학원에서 넘어온 강사들이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그들은 강의 도중에 대놓고 신성 학원 출신 강사들을 까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게다가 유환이 수락한 조규만의 제안을 의도적으로 성공 대입학원 수학과 대표 강사에게 술자리에서 흘려 그가 학원을 떠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제 공식적으로 막판 싸움이 시작된다.
내가 김윤지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오광필 할아버지는 지방지 기자들과 인터뷰를 진행, 성공 대입학원의 욕심과 공격, 그리고 학원가에 횡행한 가격 담합을 공개한다.
그리고 이미도 원장은 신성 학원의 입회를 위한 학원연합 소집을 요청한다.
멀리 성공 대입학원이 보였다.
내가 데리고 움직이는 아이들이 쉼 없이 재잘댔다.
“여기 예전에 우리 다녔던 곳이에요.”
“어? 안녕하세요.”
아이 하나가 김윤지를 보고 인사했다.
평소 학원 로비에 앉아 있던 그녀를 알아본 것이었다.
그녀도 곧바로 그 아이들이 성공학원에 다니다 그만둔 아이들이란 것을 알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는 이름을 부르고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유현덕 선생님…….”
“미안합니다. 애들 시험 본 날이라 저녁 사 주기로 했거든요. 조규만 회장님께 죄송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김윤지 선생님께는 미안하네요.”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에 목례를 하고 지나쳤고, 그녀의 꽉 쥔 두 주먹이 떨리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일은 쉽게 풀리는 듯했다.
이게 결말인가 싶기도 했고.
과거로 돌아간 나는 학교가 아닌 학원을 선택했다.
학교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너무도 즐거웠다.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전생과 똑같이 사범대를 선택한 이유였다.
엄청난 부자가 되거나 재벌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마음이 아예 한 톨도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리라.
죽었다가 다시 돌아가기까지 했는데 이전과 같은 삶이라면 조금 억울하지 않겠는가.
내가 바랐던 것은 이전보다 나은 삶.
한 번 해 봤다는 것만으로 이 모든 것을 쉽사리 이룰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나는 나 하나의 인생을 바꾸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인생도 나의 선택으로 인해 바뀔 수 있다.
부디 나로 인해 불행해지는 사람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 * *
2002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다. 성공 대입학원과의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시간은 다행히도 신성 학원과 미래 학원의 편이었다.
“조규만 회장도 잘 버티는구먼. 학원연합 회장에서 밀리고서도 말이야.”
“그만한 사람이니 오광필 회장님이 애초에 밀리셨던 거겠죠.”
전쟁 준비를 위해 본진인 신성 학원을 떠나 미래 학원 부원장을 겸임하던 이미도 신성 학원 원장.
한동안 긴장감에 점점 수척해지던 그녀의 얼굴도 이제는 조금 여유를 찾은 듯했다.
확실히 지금의 상황은 그들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조심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정도는 대충 예상을 하고 온 거지만, 주변 다른 학원들도 상당수가 아직 조규만 전 회장과 함께하고 있는 걸 보면요.”
“그쪽이 힘이 있으니깐. 원래 가진 자들은 나누고 싶어 하지 않거든. 게다가 우리가 한 방 먹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버티면 이긴다는 거지.”
지방지에서 일제히 성공 대입학원과 현 학원연합의 강의료 담합 문제를 거론하며 지원사격에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신성 학원이 학원연합 가입을 진행하며 중소규모 학원들과 입을 맞췄다.
학원연합 내의 대형 학원만 가능했던 가격 담합을 없애고, 중소규모 학원들에 대한 부정한 공격을 전면적으로 중지하는 것만으로 그들은 우리 편으로 돌아섰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간 그들이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아마 ‘조규만 회장을 몰아내자’는 구호만으로도 움직였을 것이다.
“그나저나 마지막 한 방이 필요한데. 신성 학원은 잘 버티고 있는 거고?”
“그럼요. 주현필 부원장이 잘 버텨 준 덕에 지금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 주현필 대표 강사는 이제 신성 학원 부원장이 되었다.
성공 대입학원의 강사 빼 가기로 수학과 전체가 날아갈 위기에 빠졌지만 미리 알고 있던 상황이라 대비가 가능했다.
인근 학원들의 수학과를 임시적으로나마 통합하는 방식으로 종합 학원의 규모를 유지했고, 비록 원생들은 절반 정도 빠져나갔으나 버틸 수는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안정기에 접어든 중.
나도 틈틈이 신성 학원 주변 학교 시험 대비를 위한 내신 강좌를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고, 정말 토할 만큼 바빴지만 중간, 기말고사 적중률 70%대의 예상 문제도 준비했다.
결국 학원은 아이들의 성적 향상이 가장 큰 홍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방이 남았다.
“한 방은 이제 날릴 수 있어요. 투자 허락만 해 주신다 면요.”
“투자라. 내가 한 번 거절했던 것 기억하죠? 호호.”
“그건 그때고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지 않은가요?”
“아직 생각 중이에요. 정말로 조규만 회장을 끝내야 하는지.”
하긴, 중소규모 학원들의 숨통을 끊는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던 조규만 전 회장이었다.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가는 것은 결국 똑같은 짓이 아닐까 그녀는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오광필 할아버지는 그녀보다 훨씬 단호했다.
“지금 숨통 끊어 놓지 않으면 우리가 나중에 당할 수 있어. 뭐, 이미도 원장이 왜 머뭇거리는지는 알겠지만 조규만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야.”
나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허락만 해 주세요, 이제는. 당했던 것 똑같이 돌려줄 수 있습니다.”
김윤지에게는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그녀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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