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21화.
“강사들이 강의만 잘하면 되지 운영까지 잘하면 어떡해요. 외삼촌 역할이 없어지는 것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네 생각은 어떠냐? 작은 학원 하나 잡으려다 위신만 떨어지게 생겼는데.”
조규만이 정말로 화가 났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 굳건했던 오광필도 무너뜨린 자신인데,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라 생각했던 신성 학원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버리면 자존심에 흠집이 난다.
“글쎄요. 그걸 알면 외삼촌 자리에 제가 앉아 있었겠죠?”
그러면서 그녀는 싱긋 웃었다.
조규만은 이 외조카가 귀여우면서도 약간은 기대감이 생겼다. 저 표정은 분명 뭔가를 생각해 냈을 때 그녀가 짓는 표정이었다. 그는 다그치지 않고 흥분을 가라앉히며 가만히 기다렸다.
“우리 학원 현금 충분한가요?”
“현금? 현금은 충분해. 그건 왜?”
“회장님께 정보 주는 그 강사, 그 강사부터 빼 오면 어떨까요?”
“걔? 걔 하나 빼 와서 뭐 어떡하려고? 걔는 지금도 빼 올수 있어.”
‘강사 빼 가기’. 이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학원 간의 싸움이 벌어지면 으레 있는 일이었다.
보통은 자금력 있는 후발주자가 잘나가는 학원의 1타 강사를 영입해 빠른 성장을 노리는 방법이지만, 반대로 가끔씩은 기성 학원이 신생 학원을 무너뜨리기 위한 방법으로도 사용된다.
“그냥 빼 오면 재미없죠. 인기 강사들 우리 학원에도 충분히 있는 걸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고?”
“그 꼬맹이도 같이 빼 오는 걸로 하면 어떨까요?”
“꼬맹이? 걔가 움직이겠어? 어릴수록 의리니 뭐니 하는 쓸데없는 감상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아.”
“제안만 해 보자는 거죠. 혹시 안 되면 한 과목 강사들 전부 데리고 오는 것도 괜찮고요.”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사를 한꺼번에 영입하려면 돈이 상당히 필요하다. 해당 강사가 기존에 가르치던 학생들을 모두 끌어온다 하더라도 이건 한 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곰곰이 그녀의 제안과 현재 보유하고 있는 현금의 양을 생각하던 그는 무릎을 ‘탁’ 하고 쳤다.
다른 학원들은 그렇게 무너뜨린 곳도 있으면서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는
“유환에게 연락을 다시 한 번 해 봐야겠어. 그 꼬맹이를 빼 오거나, 아니면 한 과목 강사들을 전부 빼 온다. 하하. 이거 일이 크긴 하지만 신성 학원이 성장하는 속도가 워낙 빠르니.”
그들이 망할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최근 확장에 입시 설명회까지, 돈이 드는 일만 해 왔으니 잘하면 한 번에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 *
“유현덕 선생! 여기야, 여기!”
“안녕하셨어요, 선생님. 요즘 바쁘다 보니 통 뵙기가…….”
“아냐, 아냐. 하하. 얼굴이 아주 수척해지셨구먼? 으이고!”
주말 저녁, 퇴근하고 오랜만에 유환 선생님이 같이 술 한잔하자고 해서 온 자리였다.
신성 학원 주변에서 만날까 했으나, 그는 시내에 있는 고급 술집을 추천했다.
이 사람이 이제 돈 좀 벌더니 씀씀이도 커지나 싶었지만, 내가 돈을 낼 일은 없기에 오랜만에 비싼 곳도 한 번 가 보자 생각하고 출발했다.
술집은 화려했다. 여자가 나오거나 하는 그런 술집은 아니었지만 나름 분위기가 있었다.
도대체 왜? 이 남자는 나를 이런 곳으로 데려온 것인지.
그리고 도착한 곳에는 유환 혼자 나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앉아 있는 사람은 처음 보는 20대 중후반의 여성. 딱 봐도 미인이었다.
혹시 소개팅 자리를 유환 선생님이?
이 시점에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미인은 이미도 원장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30대 중반이었다.
지금의 나와는 나이 차이가 열 살 이상.
물론 내가 막 회귀했을 때만 하더라도 내 죽은 나이가 30대 후반이었기에 그 정도 나이의 사람들이 늙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과거의 나로 살게 된지 이제 꽤 시간이 흘렀다.
몸이 어려지고 주변 인물들이 어려지니 여자 보는 눈도 어려진 것일까?
“아! 여기는 김윤지 선생님이라고, 내가 그냥 전부터 알던 분이셔. 유현덕 선생 이야기 몇 번 했더니 한 번 얼굴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나왔어.”
“안녕하세요, 유현덕 선생님. 처음 뵙겠습니다.”
인상으로 사람을 평가하기는 좀 그렇지만, 뭔가 상당한 내공이 있을 것 같은 모습의 여성이었다.
예쁜 외모 뒤에 무엇인가 숨겨져 있을 법한 그런?
“안녕하세요.”
예나 지금이나 여성을 대할 때는 어려움과 어색함부터 느끼는 나인지라 짜증이 슬슬 올라왔다. 그냥 편하게 대하면 될 텐데, 왜 꼭 여자만 만나면 이러는지.
아! 이미도 원장은 예외였구나, 그러고 보니.
인사를 하고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유환 선생님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말을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조용해지네. 하하. 이거 둘이 이야기 좀 해 보지 그래? 하루 종일 일했어?”
둘이 이야기 해 보라더니 본인이 말을 이어 가다니.
“하루 종일은 아니에요. 토요일은 시간 여유 많습니다. 학교도 안 나가니까요.”
“그래? 집에서 좀 푹 쉰 거야?”
“아뇨. 일이 조금 있어서. 번 돈 써야죠. 미래를 위해 투자를 조금 하고 왔습니다.”
“투자요?”
가만히 듣고 있던 김윤지란 여성이 끼어들었다.
투자란 말에 반응을 한다? 단순히 돈에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내 나이가 이제 스물둘인데 투자라니. 놀라울지도 모른다.
“네. 땅 좀 사 두려고요.”
“땅? 웬 땅?”
“혹시라도 잘리면 농사나 짓게요.”
내가 생각해도 이건 끔찍한 농담이라 어디서 웃어야 하는지 포인트를 잡지 못한 둘은 멍하니 서로 얼굴을 보고 웃었다.
몇 주 전 다녀왔던 부동산에서 어제 연락이 왔다. 가격 조건에 딱 맞는 땅이기는 한데 농사를 짓거나 하기는 조금 척박한 곳을 부동산 업주가 찾아낸 것이었다.
주변에 차가 간신히 들어갈 만한 좁은 길 하나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뭐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값이 아주 쌌다.
내가 원한 것은 뭘 할 수 있는 땅이 아니라 단지 그 지역에 지금 가지고 있는 현금으로 최대한 많은 면적을 사는 것.
아침 일찍 가서 확인하니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뭐, 쓸모없다는 산도 돈 주고 사는 판인데.
가격 조건도 미리 협상을 끝내 놓은 상황이라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온 일을 이야기했더니 유환이 ‘너 당했구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일 있었으면 나한테 이야기하지! 괜찮은 수익 얻을 수 있는 부동산이 얼마나 많은데. 그 동네 아무것도 없잖아, 지금? 연락처 하나 줄까?”
이 사람아, 그 땅은 올해 안으로 50배 이상 값이 뛸 거다.
이런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지만 어린 녀석이 벌써 도박을 하냐고 생각할 것이 뻔했다.
정신은 막상 자기보다 열 살 가까이 늙었는데도.
그나저나 이 사람은 왜 갑자기 이렇게 신경을 써 주는 척하는 거지?
원래 친절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다. 완전 로봇 같은 주현필에 비하면 천사라고나 할까?
하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이 힘들 때는 나 몰라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환,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돈을 더 벌고 싶으신 거예요? 땅 투자해서?”
김윤지란 여자가 관심이 있나 보다. 돈인가?
“그것도 있긴 하고요. 은행에 넣어 봤자 요즘은 그냥 보관만 하는 거잖아요.”
“이거 받아 둬. 내 대학 친군데 수학 엄청 잘하더니만 지금 외국계 투자회사 들어가서 몇십억씩 돈 굴린다고 하더라고. 앞으로 많이 벌 테니깐 내 이름 대고 물어보면 잘 도와줄 거야.”
유환이 명함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투자회사, 나도 당할 뻔했지.
이들이 돈을 그렇게 잘 굴리면 본인 돈을 굴리지 왜 남의 돈 끌어다 굴리겠는가. 정보가 있으면 자기 돈 넣고 많이 불리면 되는 건데 남들 돈을 빌리려 영업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덩어리가 커지면 그만큼 수익금도 커지기에 그러는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만.
애초에 나는 이런 부분에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다. 번 돈은 내가 굴려야지 하는 생각. 하지만 생각은 저리 가지고 살아도 전생에는 굴릴 돈이 없었다.
슬픈 이야기.
그래도 예의 있게 명함을 받아 들고는 지갑에 소중히 껴 놓는 척했다.
“그나저나, 이거 한 잔 하고. 할 이야기가 있어서 부른 거야.”
술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할 이야기라. 지금 시점에 유환 선생님이 나에게 할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렇게 비싼 술집으로 데려오면서까지.
재미있는 것은 저 이야기를 하면서 김윤지를 순간적으로 쳐다봤다는 점이었다.
둘의 눈빛을 교환했다고 하기보다는 마치 허락을 구하는 듯한 모습?
아니면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하는?
“유현덕 선생은 신성 학원에서 계속 있을 거야? 몇 년이고?”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그러니깐 돈을 벌려고 신성 학원에 들어온 거잖아. 그러면 돈을 더 주는 곳이 있다고 하면 옮기겠느냐 이런 말이야. 오해하지는 말고, 그냥 궁금해서 그래.”
오해가 아니라 제대로 이해한 것 같은데.
유환은 나에게 다른 돈벌이를 제안하려고 하고 있다. 아마도 다른 학원이겠지?
이제 궤도에 올라 준비한 대로 착착 일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을까?
그리고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지 더 궁금해졌다.
“글쎄요. 저를 데려가겠단 곳이 있어야죠. 아직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문제라서…….”
나는 신성 학원에 뼈를 묻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다른 학원으로 옮기는 것도 우스운 일.
단과반 개설, 비율제, 입시 설명회는 전부 단기 계획이 아니라 장기 계획이었다.
아주 길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그때,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윤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유현덕 선생님, 혹시 지금보다 학생당 페이가 두 배 이상 되는 곳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역시나 이 여자,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누구기에 유환이 이렇게 눈치를 보면서 행동한단 말인지.
“학생 페이가 두 배라고 하더라도 총 학생 수가 적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잖아요. 그리고 저는 그 정도가 되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유환 선생님 같은 분께 더 많이 배워야 해요. 음……. 그나저나 무슨 일 하시는 분이세요?”
물론 능청스러움만 배울 것이다. 이미 충분한 것 같긴 하지만 전생에 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능청스러움이 별로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학원은 다르다.
그리고 나의 질문에 유환이 살짝 당황해하며 흐름을 끊으려 하자, 이 여자가 손짓으로 그를 막았다.
유환보다 높은 사람?
“호호. 성공 대입학원 실장 김윤지 라고 합니다. 조규만 학원연합 회장 조카에요.”
“조규만?”
피로와 술로 둔해진 머리가 그 이름에 곧바로 반응했다.
이 사람들, 신성 학원을 잡으려 하는 것이구나. 그리고 유환이 끄나풀이었어.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었다.
제안이 솔깃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이 꾸미고 있는 것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그들의 제안에 적어도 흥미를 가지는 척해야 하리라.
이것들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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