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18화.
이렇게 치졸한 일을 꾸민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쯤 아마 자신들의 예상과 다른 결과에 조금은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사교육이라면 모름지기 정정당당하게 강의력과 자료, 적중률로 승부를 봐야 하는 것인데 이런 꼼수를 쓰다니.
하지만 그 꼼수 때문에 내 계획이 중도에 날아갈 뻔했다.
위험했다. 그래도 이제는 정리가 어느 정도 된 상태.
내가 지금 어디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여기 땅은 별로 쓸모가 없으실 텐데…….”
땅……. 무엇인지 예상이 되는가?
“괜찮습니다. 쓸모가 없으니 이 정도 돈으로 꽤 살 수 있잖아요. 저, 여기에서 여기까지 범위 중에 가장 싼 곳만 조금 골라 주세요. 2억으로 최대한 넓게 살 수 있는 곳이요.”
돈이 일정 수준 이상 모이면 넣어 둘 곳을 결정한다.
어차피 내가 들고 있어 봐야 은행에 넣어 두는 것 외에는 특별히 쓸 곳도 없다.
가끔씩 이렇게 정신없는 일상을 피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려고 죽었다 다시 산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만 내가 무슨 전생에 경제 관련 일을 했던 것도 아니기에 단지 기억에 기초하여 값이 오를 땅을 사 두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주식?
주식은 위험하다. 평생을 주식과는 담 쌓고 지내 왔다. 학교에서 애들 가르치던 사람이 주식에 대해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는가.
하지만 땅은 분명 오를 곳이 있었으니, 바로 학원 인근의 충남 연기군 땅이었다.
지금은 2001년 말, 이곳이 오르려면 신도시 건설 계획이 나와야 하는데, 이건 완전히 정책적 부분이라 아직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할 때다.
2002년 12월 대선일까지 이제 딱 1년 남았다.
그리고 그때 땅을 팔면…….
땅 투기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1년간은 이것저것 심어 보고 할 생각이다.
그래도 땅 투기는 투기다.
죽고 다시 살아서 진짜 돈을 왕창 벌어 보고 싶단 생각을 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죽기 전의 나라면 아마 하지 않았을 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일을 계속하며 돈을 벌겠다는 보통의 근로자 마인드에 돈이 돈을 불러올 수 있을 만한 생활을 해 보고 싶다는 희망, 그것이 이런 일을 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연락 주십쇼. 바빠서 못 받을 수도 있으니 문자 남겨 주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네. 파실 분 있는지 확인하고 연락드릴게요. 조심히 가셔요.”
당장 사는 것은 아니니, 이 정도면 팔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까지 이 지역 주민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생업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거, 막상 실행하려 하니 조금 죄 짓는 기분이 드는 걸.’
* * *
낮에 잠시 조금 멀리까지 다녀온 터라 몸이 피곤했다.
대학 강의? 지금은 12월이다.
2학년 2학기가 끝나고 겨울방학에 돌입한 시점이라 학원 출근을 조금 일찍 하고 있지만, 오늘은 다녀올 곳이 있어 학원에 도착하니 네 시였다.
승강기가 학원 층에 멈추고 문이 열렸을 때, 평소와 다르게 무척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원장 어디 있냐니깐? 이야기 좀 하러 왔다고!”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복도를 따라 있는 강의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나도 내 강의실이 아니라 소리가 나는 반대편 복도로 들어갔다.
소리가 들리는 곳은 주현필의 강의실이었다. 이미 문 앞에 다른 선생님들도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원장님 찾으시는 분이 오셔서…….”
“원장님이요? 아직 안 나오셨어요?”
보통 이 시간이면 이미도 원장은 이미 출근했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아직 출근하지 않은 것 같았다.
유환 선생님이 내 귀에다 대고 조용히 말했다.
“출근하시기 전에 저 아저씨 왔거든. 주현필 선생님이 원장님께 연락드려서 오지 마시라고 했어.”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은 생각이 들 때,
“연락을 해 달라니깐? 나 학원연합 회장 오광필이야! 몇 시간째 이러고 기다리게 하면 어떡해?”
남자가 말했다.
학원연합? 그건 또 뭐란 말인가.
주현필이 특유의 낮고 굵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휴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기다리신 것은 회장님 자의로 기다리신 거지 기다리시면 오신다고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
별로 흥분하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엄청 흥분한 오광필 이라는 남자와 그에 대응하는 주현필은 참으로 대조적인 이미지였다.
“어? 원장님? 오셨어요?”
복도에 있던 선생님들 전부가 내가 조금 전 내렸던 승강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도 원장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제8강 학원 연합
“여, 이미도 원장, 오랜만이구먼.”
마치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은 말투.
저 오광필이란 중년 남자가 회장을 맡고 있다는 학원연합이란 곳. 혹시 학원 간의 어떤 담합이나 불필요한 경쟁을 줄이기 위해 만든 연합체인가?
“그러게요, 오광필 회장님. 무슨 일로 오셨나요?”
이미도 원장은 별로 반기지는 않는 눈치였다. 아마 서로 별로 각별한 사이는 아닐 터.
오광필이 이미도가 뚫고 들어온 인파(전부 우리 학원 강사 선생님들)를 슬쩍 보더니 대답했다.
“이렇게 청중들이 많은 곳에서 계속 서서 이야기할 텐가? 숫자 보니 많이 성공했구먼. 따로 둘이 이야기하지?”
순간 이미도 원장이 주현필과 뭔가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 감정이 실린 그런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쫓아라!’ ‘네!’ 뭐 이런 것 같았다.
나만의 상상일지 모르지만.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불쑥 찾아오시고 시간을 내 달라 하시면 저희는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뭐 좋은 기억이 있는 손님도 아니시고요, 회장님은.”
“거참, 이사람 딱딱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치도 않네, 자네는. 내 성격 모르나? 대화 전에는 안 가.”
그나저나 나는 머릿속으로 과연 저 오광필이란 학원연합 회장이 학원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말투로 보면 예상되는 나이보다 더 늙은 사람인데, 학원연합이란 것의 수장을 맡고 있다?
학원이란 것이 원래 굉장히 세대교체가 빠른 직종이라 40대만 되더라도 젊은 세대에게 성과로 밀리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50이 되어서도 엄청난 돈을 버는 강사들도 있지만, 그것도 체력적으로 버텨 주는 선에서 가능한 일.
은퇴 후 명예직으로 받는 직함인가?
이대로라면 순순히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지 이미도 원장이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선생님들, 괜찮으니 강의실로 돌아가서 수업 준비해 주세요. 오광필 회장님, 주현필 강사는 같이 있어도 되겠죠?”
“자네 수족 같은 사람인데 뭐. 그러시게나.”
“제 강의실로 가시죠. 주현필 선생님도요.”
“네, 원장님.”
다들 뭔가 아쉬운 표정으로 강의실로 돌아갔다.
영어과에 주현필이 있다면 수학과에 유환 선생님이 있기에 혹시 그도 그 자리에 같이 있고 싶어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는 거의 제일 먼저 자신의 강의실로 돌아갔다.
이런 호기심 가는 일에 관심이 없는 건지…….
하긴 그는 자신의 강의와 수익 외에는 평소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야말로 엄청 궁금하긴 했지만 재미있는 볼거리는 거의 지난 것 같아 강의실로 돌아갔다.
5분쯤 뒤, 주현필이 내 강의실로 들어왔다.
“유현덕 선생, 시간 있으면 잠시 원장님 강의실로 가 봐.”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내 말소리를 엿들을 수 있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긴장되어 그에게 굉장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 아냐. 들어가 봐. 오광필이 너 보고 싶대.”
도대체 저 남자가 왜 나를 보고 싶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원장이 찾는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현필의 표정을 보아하니 큰일은 아닌 것 같았다.
똑똑.
“들어오세요.”
“원장님, 저를 찾으셨다고…….”
“자네가 유현덕이라는 복덩이야? 아직 새파랗게 어리구먼.”
나는 들어가자마자 이 새로운 인물을 쳐다봤다.
실로 기이한 노인? 중년? 같은 이미지의 남자.
얼굴은 대략 40대 후반~5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말투는 거의 60대 노인 같았다. 그래서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뭔가 목소리와 말투와 얼굴이 일치되지 않는 느낌?
“어른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복덩이라고 하드만 싸가지는 없나 보군.”
“아, 안녕하세요. 누구신지를 몰라서…….”
“학원연합 회장이셔요. 이제는 전 회장.”
“어허, 그냥 ‘전’자는 빼고 불러 주지. 이미도 원장은 사정도 잘 알면서 왜 그러나.”
둘의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전혀 파악되지 않았다.
이미도 원장의 표정을 봐서는 썩 좋은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이 사람은 굉장히 친한 척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친한 척인지 친한 것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 우리 학원으로 넘어와서 두 달만 강의하게.”
이건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지.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그리고 이 사람이 말하는 학원은 또 어떤 곳인 줄 알고 내가 거길 가고 말고 한단 말인가.
“아직 저는 동의해 드린 적 없는걸요?”
이미도 원장이 기분 나쁘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이것도 조금 의아했던 상황. 둘이 금방이라도 싸울 것 같이 시작하고선…….
“이게 서로를 위해 좋다니깐 그러네. 내 여기 이 젊은 선생 딱 두 달 만에 돌려주지. 그러면 서로 좋은 것이야.”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직접 그쪽을 뚫을…….”
“우리가 그쪽에 있는 학원이야. 그러니 학생들 끌어오고 유현덕 선생 다시 신성 학원으로 데려가면 그 학생들 전부 신성 학원 원생이 되는 걸세.”
그런 방법이 있었다.
사실 이 노인이 말하는 것이 현재 신성 학원으로서, 그리고 내 단과 반을 급격히 늘리는 방법으로도 최적이다.
하지만 그 어느 학원이 자신들의 텃밭을 다른 학원에게 고스란히 넘겨준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이 노인이 원하는 것은?
“어르신이 얻으시는 것은 그러면 무엇입니까?”
뭔가 쉬이 볼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아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허허허. 바로 파악을 하는구먼. 물론 이런 제안에 학원 밥 어느 정도 먹은 사람들은 바로 알아채지. 내가 공짜로 이러는 것은 아니겠지, 하고 말이야.”
“그러면…….”
“저희가 상의해 보고 연락 다시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죠, 회장님.”
뭔가 답변이 나올 것 같았는데 이미도 원장이 대화를 끝내 버렸다.
궁금하긴 하지만 곧 그녀가 말을 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자.
그나저나 이 판이 생각보다 복잡하게 돌아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하게 잘 가르치고 원생들 늘리고 하면 성공하는 것 같았는데, 하나의 허들을 넘어서면 다른 더 높은 허들이 생기는 듯한 모습.
어쨌든 분위기는 나쁘지는 않았다.
“빨리 대답 주게! 나도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
저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강의실을 나갔다.
곧바로 잠시 나가 있던 주현필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원장님?”
“어쩌긴요. 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더니 그녀가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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