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2화.
다음 날,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학원으로 갔다.
이날은 3시 수업이 마지막이었다.
어제 주현필 때문에 한숨도 못 잘 것 같았지만, 의외로 피곤했는지 집에 도착해 곧바로 잠들었다.
하마터면 수업을 놓칠 뻔했다.
학원에 들어가 나보다 먼저 출근하신 선생님들께 인사를 드리러 강의실 투어를 한 번 하고(매일 하는 일이었다.) 곧바로 이미도 원장의 강의실로 들어갔다.
똑똑.
“들어오세요.”
어제 내가 본 상황을 이야기하면 뭐라고 말할까?
도대체 이 원장의 정체는 무엇일까.
혼이 나려나?
이미도 원장은 책상에 무슨 서류 더미를 잔뜩 펼쳐 놓고 정리를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저 출근했습니다.”
“응? 조금 일찍 왔네요? 수업은 다 듣고 온 거고?”
그녀가 대학 수업까지 신경을 쓰는 이유는 스펙 때문이다.
재수 종합반 이야기를 나에게 꺼내기는 했으나, 당장 나를 대표 강사로 넣는 것은 불가하다.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사람한테, 혹여 외국에서 고등학교라도 졸업했다면 모를까, 재수 학원의 대표 강사를 맡길 수는 없다. 지금의 나보다 나이도 많은 학생들이 수두룩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대표 강사를 언급한 것은 아마도 계속 지금처럼 성과를 낸다면 대학을 졸업하고 그 자리를 줄 수 있다는 의미렷다.
하지만 지금 내가 다니는 대학 졸업장으로 재수 종합 학원의 영어과 대표 강사 자리는 턱도 없는 소리였다. 게다가 한참 뒤의 이야기이다.
“네. 오늘 조금 일찍 끝나는 날입니다.”
“무슨 할 이야기 있어요?”
인사하고 바로 나가지 않고 가만히 문가에 서서 기다리자 그녀가 그제야 서류 더미에서 눈을 떼 나를 쳐다봤다.
“네, 원장님. 조금 여쭤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혹시 시간 되시나요, 지금?”
“시간 있어요. 무슨 일인데? 주현필 선생하고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았나요?”
“아뇨, 그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조금 혼나서요.”
“혼?”
곧바로 흥미가 생긴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혼까지는 아니고, 제가 원장님께 바람을 넣었다고 하시면서 원장님께서 우리 학원을 이 정도 규모로 유지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요?”
아직도 약간의 미소를 짓고 있다. 걱정했던 것보다 불편한 내용은 아닌가?
“주현필 선생님은 아시고 저는 모르는 걸 알고 싶습니다.”
“으음.”
그러고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한 모습.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어떤 부분을 알고 싶죠?”
“이건 조금 선을 넘는 질문일 수 있어서, 혹시 불편하시면 흘려들으셔도 괜찮습니다. 미리 사과드립니다.”
“무슨 사과를 먼저 하고 있어요. 어서 물어봐요.”
등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뭔가 대단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내가 이 학원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실수가 아니었을까.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
하지만 학원에서 애들 가르치며 일하는 것이 감당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일단 시작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원장님은 부자이신가요?”
아, 뭔가 조금 더 심오한 분위기로 끌고가고 싶었는데, 처음 나온 질문은 저것이었다.
신체적 나이가 어려지니 머리도 약간은 그에 적응을 한 것일까?
“부자? 하하. 주현필 선생이 그래요? 내가 부자라고?”
다행히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다.
아니, 그보다도 질문 자체가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쪽팔렸다.
“아, 이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네, 나 부자 맞아요. 굳이 숨기고 하는 건 아니에요.”
시원하게 넘기는 저 여유.
“그런데 왜 이렇게 작은 학원을 운영하십니까?”
“부자는 작은 학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씀?”
그녀의 반문에 말이 막혔다.
안될 것은 굳이 없지 않을까.
다만 기사가 따로 있을 정도로 부유하다면, 왜 굳이 이렇게 작은 학원에서 아웅다웅하며 매달 힘들게 일을 하는 것일까?
“아뇨,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쓸 수 있는 돈이 있으시면 조금 더 편하게 운영하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단순히 그 돈으로 즐기기 위한 것이라면 편하게 가도 되죠. 하지만 이 일 자체가 즐거운 거라면? 그러면 큰 학원은 오히려 재미가 없어지지 않을까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시작하는데?”
“그, 그야 맞는 말씀이시네요.”
“그리고 제가 부자인 것은 맞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부자인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이 부자에요.”
“가까운 사람이요?”
지인이 부자? 그게 어디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돈 문제가 얽히면 좋은 관계로 끝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삶은 어차피 경험이 적다하더라도, 이전 삶에서 그런 관계의 종착지는 대부분 서로 물어뜯고 좋은 관계도 싹 다 정리당하고 마는 것뿐이었다.
“보통 같다면 나는 그 사람의 딸이지만, 우리는 그런 관계는 아니에요. 그 사람에게 저는 있지만 없어야 하는 그런 존재고……. 분명 존재하지만 무시해야 하는,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있는지 계속해서 이것저것 신경을 써 주려하고 나는 피하려 하는 그런 관계죠.”
이런 걸 사생아라 하는 것인가?
잠시 내가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그녀는 말을 이어 갔다.
저런 말을 하면서도 참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여기까지. 호호. 그래서 어젯밤 내가 퇴근하는 걸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군요?”
이런, 알고 있었구나.
하긴 전 생애에서도, 지금의 현실에서도 나는 결국 평범한 교사, 강사일 뿐이었다.
완벽한 스파이 짓은 할 줄도 모르고, 할 일도 없었고.
나는 숨는다고 숨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아무튼, 여기까지가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 더 알고 싶어도 일단은 참아요. 굳이 알 필요도 없고.”
“그러면 지금 확장을 하시는 것은 왜 주현필 선생님은 반대를 하시는 건가요?”
“글쎄요. 아무래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할 것 같네요. 나랑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이다 보니.”
위험?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을까?
고작 학원을 확장하는 것뿐인데?
“표정 보아하니 도대체 학원 하나 운영하는데 왜 위험해질까 생각하고 있나 보네요.”
독심술을 쓰는 것 같다.
평범한 학원 원장이 아니다, 절대로.
그냥 단순하게 부자 아버지를 둔 사생아도 아니다.
뭔가 더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당장 전부 말을 해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네. 그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말씀해 주시기 불편하신 문제라면 저는 모르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가족이 따로 있으세요, 아버지는. 가족들에게는 저를 숨겨 둔 상태고요. 만약 가족들이 알게 되면 위험해질 수 있어서 대놓고 도와주시지는 못하지만 이것저것 도움을 받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장 이 건물만 하더라도…….”
“건물이요? 이 건물 원장님 소유입니까?”
“제 소유는 아니에요. 주현필 선생 소유로 되어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공식적으로는 주현필이 이 건물을 가지고 있지만, 비공식적으로 그 돈은 그녀,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의미.
그래서 확장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매사 주현필의 의견을 물어봤던 것도 일종의 배려였으리라.
“나는 경쟁을 한 번 해 보려는 거 에요. 숨어 지내는 것 말고 제대로 드러났을 때 필요한 돈을 만들어 보려고요.”
경쟁이라.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의 집안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정말로 큰 재벌집이라면 학원을 확장하는 것 정도로 경쟁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당당해 보였다.
“그래서, 유현덕 선생님 도움이 많이 필요해질 겁니다.”
결국 이런 이유였다.
내가 학원을 들어온 것도 돈을 벌기 위함이고, 내가 돈을 많이 벌면 학원의 입장에서도 돈을 더 벌게 된다.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만 경쟁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위험부담은 당연히 안고 가야 하는 것이고.
“음, 저도 혹시 위험한 상황이 오지는…….”
“뭐? 걱정 마세요. 유현덕 선생이 뭐라고 위험해져? 호호. 그런 걱정하지 말고 지금처럼 성공할 방법이나 계속 찾아봐요. 아직까지는 경쟁 상대가 없었으니 이 정도 성장할 수 있었지만 우리 규모가 커지면 여기저기에서 기웃거릴 거야.”
특수한 능력이 있어 내가 나름 이 정도 성공한 것이 아니기에 매 순간 적절한 결정을 내리고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계획대로라면 성공할 것이다, 분명히.
“유현덕 선생님의 다음 계획은 뭐가 될까요? 학원 확장하고 인터넷 강의로 홍보한 뒤?”
“아, 생각은 있습니다. 저, 그러면 학원 확장은 언제쯤 될까요?”
“오늘 계약하고 왔어요. 리모델링 업체. 우리 학원 바로 위층으로 확장하는 것으로. 한 달 정도 공사 예정이야. 유현덕 선생 전용 강의실로 최대 70명까지 받을 수 있도록. 다른 것은 뭐 필요한 것 없어요?”
역시 엄청난 부자였다.
확장 건의를 한 것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계약까지 끝내다니.
그녀의 사정은 신기하긴 했지만 내 사정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내 성공이 같은 방향에 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나는 그녀 말마따나 큰 성공을 거두기만 하면 된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재수 종합반은 그러면…….”
“그건 내년 초 예정. 아마 1월부터 시작할 거야. 유 선생이 곧바로 거기 담당하는 건 졸업장이 없어서 힘들어. 대신 지난번에 이야기한 대로 이대로 계속 성장해 주면 졸업 후 대표 강사 자리 확답.”
졸업하면 24살인가?
군대 전역하고 나서라면 26살.
나쁘지 않았다.
그래 봐야 완전 애송이 강사겠지만, 그건 그때까지 충분한 성과로 증명하면 될 일이었다.
“주현필 선생님은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호호.”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첫 만남 때만 하더라도 이런 활기찬 모습은 아니었는데.
왠지 이번 생애에도 나만을 위한 삶은 살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를 위해 살면, 내가 성공하면 할수록 함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쁘지는 않았다.
“원장님, 저 면접 때 말씀드렸던 내용…….”
“면접 때? 하도 여러 가지 말을 해 줘서 뭔지 모르겠는데?”
“교육과정 개편에 따른 입시 설명회 있었잖습니까?”
“아, 그거? 네. 그거에 관해서요?”
“제가 준비해 봐도 되겠습니까? 재수 종합반 시작하기 전에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역시, 이제부터 엄청 바빠지겠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