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6화.
제3강 조금 이른 첫 발걸음
요즘 밤에 잠을 잘 못 자고 있다.
항상 머릿속으로 미래에 대한 계획을 짜고 수정하다 보니 숙면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었다.
이거 다시 태어나도 힘든 것 매한가지네.
과거의 기억으로 조금씩 전보다 나은 삶을 산다는 것은 기대되는 말 같지만, 막상 겪어 보니 그 할아버지에게 세 번째 삶은 가지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산다는 것은 정말로 즐겁고 희열 넘치는 일이지만 그게 너무 반복되면 시작부터 피곤함에 지치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이번이 실질적인 두 번째 삶이었기에 최대한 성공하고 싶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학교에 가서 한 번 들었던 수업을 다시 듣고는 시강을 위해 신성 학원으로 갔다.
시간은 3시가 되기 30분 전이었다.
“일찍 오셨네요?”
이미도 원장은 나를 보고 웃으며 반갑게 말을 걸어주었다. 반면 로비에서 마주친 주현필은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자신의 강의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정말 좀 재수가 없는 걸.’
처음 만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그 사람. 과거에도 정말 싫은 케이스였지만 어딜 가나 저런 사람은 존재했다.
그냥 나의 뛰어남이 신경 쓰이고 거슬려서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경쟁자가 되려나?
“네, 일찍 와야 좋은 인상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나도 활짝 웃으며 이미도 원장의 인사에 응답했다.
“시강 준비는 잘하셨어요?”
“준비는 했는데 만족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볼게요.”
시강 준비가 따로 필요하지는 않았다. 기간제 교사 입장에서 매년 재계약 시즌에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학교와 학원은 분명 크게 다르다.
수업 스타일도 학교는 정해진 진도를 제때에 맞추고 배운 것을 확인하는 문제를 잘 풀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에서 끝이 난다.
반면 학원은 학교에서 정한 진도에 대해 어떤 종류의 문제가 나오더라도 현재보다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진도가 끝났다고 하더라도 쉴 수가 없다.
그렇기에 내가 이곳에서 보여 줄 부분은 단순한 영어 자체에서부터 문제를 푸는 요령, 예상 문제를 만들고 그걸 활용하여 수업하는 모습, 마지막으로 내 특기라고도 할 수 있는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까지였다.
그리고 그 정도는 주어진 자료를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잘하시리라 생각해요. 파이팅!”
“네? 아, 네네. 감사합니다.”
어제 면접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면접은 말 그대로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고, 아마도 괜찮은 인상 이상을 주었으니 수업 부분에 큰 문제가 없다면 바로 돈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실 월급 협상이 문제였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학원에서 바라는 것은 다를 것이 분명했다.
잠깐 커피를 마시며 빈 강의실에 앉아 있으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곧이어 주현필과 이미도 원장이 차례로 내가 기다리던 강의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주어진 교재는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와 모의고사였다.
“30분 드립니다. 교과서 20페이지와 21페이지, 그리고 모의고사 23번 문제를 수업해 주시면 돼요.”
책을 펼치니 내가 가르치던 책은 아니었다.
애초에 교과서 출판사도 여러 곳이고, 내가 교사 생활을 할 때와는 교육과정도 다르다.
하지만 책이 어떻든 가르칠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빠르게 읽어 내리며 요점을 훑었다.
과거 내가 학교에서 근무할 때, 수업 준비를 위해 교과서를 두세 번 읽다 보면 각 지문마다 자주 나오는 문법 사항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컨대 1과에서는 관계 대명사절이 생략되거나 명시되며 나오는 경우, 그리고 관계 부사절이나 의문사절이 비교되며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교과서 첫 부분에 나오는 학습 목표와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결국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에 강조되는 부분은 빈도가 높은 구문들이었다.
이건 전공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부분이나, 신입 때는 그런 것들이 곧바로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혹시나 해서 주어진 모의고사 23번 문제를 보니 역시나였다.
‘요점은 관계 대명사절이구나.’
이것을 원장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만약 원장이라면 그 부분을 파악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려고 고른 지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대충 20분 정도 종이에 끄적거리며 시강할 준비를 마친 뒤,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졌다.
눈을 떴을 때, 원장과 주현필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는 다 끝난 겁니까?”
주현필이 물었다. 여전히 딱딱한 말투였다. 한 번 보자는 식의 말투인가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 번 보여 주자.
“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과거 내가, 아니 미래구나. 어쨌든 사회생활을 하며 또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이런 거 해 볼까요?’나 ‘제가 잘하고 있나요?’ 등의 뉘앙스를 풍기면 상대방에게 전문적이지 못하단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일단 직장에 들어간 후의 일이지만 어쨌든 ‘내가 이 분야의 전문가요’라는 이미지가 필요한데, 상대방에게 일일이 묻고 행동하는 것은 지양할 일이었다.
나의 이런 대답에 주현필의 표정이 이제는 정말로 ‘한 번 해 봐라’ 하는 거만함으로 가득 찼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큰 성공을 위해서는 소극적인 줄타기보다 대담한 행동이 필요하다.
“자, 반갑습니다. 오늘 시강을 하게 된 유현덕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보실 부분은 교과서…….”
시강은 순식간에 끝난 기분이었다.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수업을 한다는 것, 어찌 보면 굉장히 길고 준비하기 어려운 시간인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면, 그러니깐 본인의 수업 틀이 없다면 견뎌 내기 어려운 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정한 틀만 제대로 잡혀 있으면 수업의 효과를 떠나서 보는 사람이 신뢰할 만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
효과를 떠난다는 말을 굳이 붙인 것은, 결국 공부는 학생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20시간은 학원의 입장에서 많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렇게 8년 동안 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하며, 나의 수업 틀은 완전히 잡아 놓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빠르게 수업을 진행하고 중요 요점 정리를 한 뒤, 시계를 보며 끝을 내고 앞에 놓여 있는 물통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저…….”
제시간에 모자라지도, 넘기지도 않고 딱 맞게 끝이 났기에 원장과 주현필의 무반응이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뿐.
“정말 처음 맞아요?”
이미도 원장이 처음 내뱉은 말은 이것이었다.
‘처음 아닙니다. 8년 동안 학교에서 근무했는데 처음이라니.’
“네, 처음 맞습니다.”
원장은 다시 앞에 놓여 있는 메모지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잠시 뭔가를 쓰는 것 같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내 자리에서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혹시 아까 준비 시간에 쓰시던 종이 좀 볼 수 있을까요?”
‘이건 왜 보여 달라고 하는 거지?’
“네, 여기 있습니다.”
내가 적어 놓은 부분들은 교과서를 보면서 문법 사항들만 짚어 놓은 것이었다.
말 그대로 교과서 사본과 모의고사 종이에는 몇 군데 그려져 있는 동그라미, 그리고 빈 A4 용지에는 ‘관계 대명사’, ‘관계 부사’, ‘의문 대명사’, ‘의문 부사’, 그리고 다음 차시 예고로 ‘분사 구문’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잠깐 동안 그 종이를 보더니 곧바로 그녀는 주현필에게 종이를 넘겨주었다.
그는 얼이 빠졌는지 처음에는 원장이 자신에게 종이를 넘기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말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살짝 그 종이를 보고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거 처음 하시는 수업이 아닌걸요?”
주현필의 말이었는데 말투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나를 인정하고 키워 보려나 싶었으나, 순간적으로 그는 원장을 한 번 쳐다보더니 나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잘하시는데, 저희가 채용하려는 자리는 파트타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죠.”
원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파트타임으로 들어오실 분은 아니죠. 어떠신가요? 제가 채용하는 건 아니지만 확인은 해 보고 싶어서요.”
파트타임?
내 입장에서 나쁜 조건은 아닐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따로 있었다.
“파트타임도 괜찮습니다만, 고정급이 아닌 비율제로 하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비율제란 보통 단과 수업에서 수익을 일정 비율로 학원과 나누는 것을 의미했다.
동네에 있는 작은 학원에서는 비율제 대신 고정급 형태를 취해야 강사 입장에서도 안정적으로 수입이 있고, 학원 입장에서도 고정적 지출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데 유리하다.
하지만 그만큼 고정급 체제에서 학생 판촉은 학원의 일이 되며 큰 성장보다는 안정적 유지에 집중하게 된다.
내가 비율제를 생각한 건, 죽기 전 학원에서 근무하던 친구 준서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졸업을 하고 학교로 곧바로 들어간 나와는 다르게 그는 여러 학원을 돌다 자리를 잡고 돈도 많이 벌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가 아직 그런 결정을 내리기 훨씬 전이다.
지금의 나는 준서의 삶을 모델로 삼고 따라가는 경향이 있었다.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돈이 돈을 버는 구조를 만들려면 일단 수중에 돈이 있어야 할 테니, 지난 삶보다 훨씬 이전에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일을 구하는 것이었다.
‘강의로 승부하자. 내가 가진 경험을 극대화시키려면 최대한 바짝 당겨 보는 수밖에…….’
내가 따로 주식을 하거나 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먼저 성공했던 준서를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그것도 그가 성공하기 훨씬 이전 시점에서…….
“비율제요? 단과 수업에서 쓰는 비율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마 이것도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으리라.
처음 일을 해 보겠다는 사회 초년생, 아니 대학교 신입생이 학원일 어느 정도 해 본 사람에게서나 나올 법한 제안을 하다니.
이번에는 이미도 원장의 표정도 오묘했다.
아직 이 시기에는 이런 정보들이 많이 돌아다니지 않았다.
아마 내가 처음 일을 한다는 것을 원장도 슬슬 의심해 보는 것 같았다.
“네, 맞습니다. 일정 부분 고정급에 학생 수가 증가하는 만큼만 비율제로 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 학원은 아직 단과를 전문적으로 운영할 만한 규모나 여건이 되지 않아요. 계획상에 없던 일이라 조금 당황스럽네요.”
공격적이거나 아주 거부하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다.
단순히 신선함, 그리고 현재 학원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랄까?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아직 신성 학원의 규모는 단순한 동네 학원 수준이었다.
내가 언급한 비율제 단과 반은 일반 보습 학원에서 운영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