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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회귀해도 개고생이네-1화 (프롤로그) (1/200)

[1] 1화.

프롤로그

이런 젠장…….

나는 죽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끝내리라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나에 대해서 정리를 한 번 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우리 부모님은, 왜 항상 본인 소개를 할 때 부모님부터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한 분이셨다.

지극히 평범함, 그것이 그들을 규정짓는 하나의 특성이리라.

아버지는 흔한 회사의 흔한 회사원이셨다.

그래도 나름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은 받으셨던 모양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은 없었으니…….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흔한 가정주부셨다.

내가 학교에 다녀올 때면 어머니는 맛있는 빵을 준비하고 나를 맞아 주셨다.

커 오면서 가끔 내가 잘못할 때 맞기도 하고 했지만 그것들은 전부 나를 위해서임을 다 큰 후에야 이해했다.

고등학교까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퇴사하시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내색은 하지 않으셨더라도 회사 일이 힘드셨던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술도 잘 못 드시는 아버지가 술을 잔뜩 드시고는 집에 들어오셨다.

“아버지?”

이것이 내가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술에 취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서 한 말이었다.

참 멋도 없다.

아버지는 나를 꼭 껴안으시며, “너 힘들게 하지는 않을 거야. 공부나 열심히 해라, 아들!”라고 말씀하시고는 곧바로 안방으로 들어가 뻗으셨다.

내가 술을 잘 먹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이때의 충격이 컸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것 가지고 충격을 먹다니, 나도 참 샌님이었다.

지금이야 의도치 않은 술로 질펀한 대학 생활도 끝났고 어엿한 사회인이 된 입장이라 남들 술 먹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술은 죄악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 죄악인 술에 취하시다니…….

그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은 이후 우리 집에 여유를 주지 않고 들이닥쳤다.

“아들!”

하고선 나를 부르시면 내가 쪼르르 달려가 아버지의 큰 품에 뛰어들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그 든든했던 아버지가 내가 커 가며 점점 쪼그라드시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뭐 어쩌랴. 이게 사람 사는 것인데.

아버지는 퇴사 후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신 적이 없었다.

괜찮은 곳에서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하셨던 것이 그의 전성기였으리라.

그리고 그 전성기는 지나가 버리고 다시 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 후로 일을 나가시며, 야자를 마치고 10시가 넘어 집에 들어오면 아버지의 수척한 모습이 나를 반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좋으신 분이셨다.

든든함이 안쓰러움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그냥 적당한 지방의 사범대학에 들어갔다.

공부를 아주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잘한 것도 아니었기에 이 정도가 딱 적당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스스로 말을 했던 것 같다.

‘이게 네가 있을 자리야.’ 하고…….

영어 교육을 전공하면서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를 가지고 끌탕하느라 고생깨나 했지만, 그래도 4년 동안 영어만 줄곧 파니 졸업할 즈음에는 애들 가르칠 수준은 됐다.

보통 사범대학을 졸업하면 임용시험을 봐서 공립 중고등학교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기간제 교사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루트이다.

그리고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나는 사람은 일정 나이에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배워 왔다.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얼마 전 돌아가시기 전까지 집에 계셨던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말씀이신 것 같다.

내 주위에 졸업한 후 몇 년간은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내가 그 길을 가기는 싫었다.

대학까지 졸업을 했으면, 그리고 그만큼 부모님 덕을 봤으면 이제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할 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교사는 괜찮은 직업이었으니, 그리고 자리도 여기저기 많았다.

영어 하면 괜찮은 과목이지 않은가?

다른 교과보다 자리도 분명 많았다.

하지만 그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50대가 거의 다 되어서야 겪었던 전성기의 끝자락이 나에게는 훨씬 빨리 다가왔다.

출산율이 훅 떨어진 시기, 그리고 그 여파가 학교로 들어오는 시기에 나는 학교에서 일을 하겠다는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이었다.

곧 내가 있던 자리는 사라졌다.

내가 일을 시작한 뒤 딱 4년 만이었다.

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많은데 자리는 급격히 줄었다.

정부와 언론에서는 출산율이 경제에 가져오는 영향을 언급하며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고 있었지만 전부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내가 애를 낳아야 출산율이 올라가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애를 낳으려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하려면 경제적 안정이 확보되어야 하고, 경제적 안정이 확보되려면 제대로 된 일자리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일자리가 줄어들어 일을 구하는 사람만 많아지고, 일을 못 잡으니 결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데 무슨 애를 낳으란 말인가.

이래 봐야 다 사회적 약자의 힘없는 하소연일 뿐이니 이쯤에서 그만두고, 내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그 이후로 학교에서 전보다 월급도 조금 받는 단기 기간제 같은 것들로 살아갔다.

그리고 엊그제 집에서 연락이 왔다.

바쁜 삶에 부모님을 뵙지 못한 지도 1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현덕아.

어머니였다.

목소리가 좋지 않으셨다.

예전 같으면 곧바로 ‘잘 지내냐, 밥은 잘 먹고 다니냐, 요즘 힘들지?’ 이런 식의 대화로 이어졌을 텐데, 이날 어머니는 저렇게 나를 부르시고는 한참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머니? 무슨 일이에요?”

뭔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가 우시는 건가 싶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전자음으로 바뀌어 내 전화기를 통해 귀로 전달됐다.

잠시 그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대략 1분 미만의 시간이었겠지만, 나에게는 불안감과 초조함 그리고 궁금함에 가득한 영겁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내 인생도 이렇게 바꿔 버렸다.

-아버지 돌아가셨다.

여기에서 잠깐 처음으로 돌아가자.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이 내 인생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여기에서 내 씁쓸한 인생사의 종착역이 결정되었다.

뭐 특별히 나쁘지는 않았는데, 끝이 너무 씁쓸했다.

굳이 말하자면 너무 쪽팔려 누구에게 이야기하기도 어려운 내 인생의 마침표.

나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자마자 곧바로 연가를 내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말 그대로 ‘달려갔다.’

나에게는 그 흔한 차조차도 없었다.

사실 이럴 때 차를 운전해서 병원을 가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감정이 크게 동요한 상황이라 나뿐만 아니라 남들까지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차가 없으므로 그런 걱정은 필요가 없었다.

택시를 타고 한달음에 달려간 병원에서 앞으로는 사진에서나 찾게 될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는 펑펑 울었다.

어머니도 옆에서 그렇게 울고 계셨다. 3일 내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마지막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깐 내가 도대체 어떻게 죽게 된 거냐고?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나는 술을 잘 하지 못한다.

먹지 말아야 할 것 중에 하나였다. 먹기만 하면 다음 날을 제대로 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조금 먹어야 했다.

집 앞 슈퍼가 있다.

주인아주머니는 내 표정을 보고는 뭔가 일이 있나 보다 싶은 듯했지만,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평소에도 내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으니깐.

소주 세 병을 사 들고 들어와 적막함을 없애 주는 TV를 켜 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한 잔, 한 잔이 몸에 들어갈 때마다 아버지가 떠올랐다.

잊으려 먹는 술이었는데, 역시나 힘든 기억을 더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리웠다.

그래서 계속 한 잔씩 마시고 빈 술병에 두 개가 되었을 때, 이제 그만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조금 짜 보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이제까지 나는 내 능력과 세상에 순응하면서만 살아왔다.

성적이 되니 일자리가 괜찮다는 사범대학에 들어가 교사 일을 했다.

그리고 적당한 월급에 적당한 수준의 삶을 살아왔다.

나의 부모님처럼 지극히 평범한 삶.

그것이 내가 바랐던 나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에는 허전함이 남았다.

어디서인지 모를 그 허전함은 내가 남에게 더욱 인정받는 방향으로 삶을 꾸려 나가는 것을 막았다.

이제와 생각하면 불만이 조금씩 생겨났던 것 같다.

졸업을 하고 학원으로 들어간 친구들은 내 연봉의 세 배, 네 배나 되는 돈을 받고 일하고 있었다.

그들의 삶이 딱히 부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돈은 부러웠다.

돈 쓸 시간이 없어 못 쓴다는 말, 그 말이 부러웠다.

만약, 아주 만약에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학교로 들어가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굳이 친구들처럼 학원을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 보고 싶었다.

‘다시 태어날 수 없으니 그러면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결론에 도달하고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몸이 땀에 절어 있어 샤워를 하려고 욕실에 들어갔다.

컴퓨터는 그대로 켜져 있었다.

빈 워드 페이지에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글이 적혀 있는 상태였다.

욕실에 들어가 씻고 나니 기분이 조금 개운해진 것 같았다.

머리가 맑아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밖에서 친구들과 술을 한 잔 할 때처럼 길가에 쓰러질 일은 없었다.

그리고 머리를 말리기 위해 방으로 들어와 헤어 드라이기를 집어 들었다.

여기에서 그만두었어야 했다.

그냥 자연적으로 마르도록 뒀어도 괜찮은 머리 길이였다.

하지만 굳이 헤어 드라이기를 집어 들고 콘센트에 꽂았을 때, 손에서 ‘파직’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산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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