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물려줄 게 없어도 그렇지. (完)
138, 물려줄 게 없어도 그렇지.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노인이 눈을 반개한 채 말을 이었다.
“그렇게 최후의 정마대전은 막을 내렸다. 마교는 지리멸렬하여 천산에서 쫓겨났고, 장성 너머 어딘가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다는구나. 하나 그들이 다시 장성을 넘어 중원에 발을 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학당이었다.
그렇기에 훈장(訓長)의 앞에는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줄지어 앉았다. 하나 열 살을 겨우 넘긴 소년들에게 정마대전이란 귀에 닳도록 들었던 비화였다.
게다가 매담자의 흥미로운 구성과 달리 훈장의 이야기는 아이들이 정마대전을 궁금해 할 리 만무했다.
“정파의 세상이 되었으나, 예전과 달랐다. 경세지존은 군림할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과 달리 은인자중하여 협명을 쌓았고, 현월회는 정파의 감시자를 자처하며 스스로 권세와 거리를 뒀지. 그 후 정파는 고인 물이 되어 서로의 이권을 탐하던 예전과 달리 진정 의인이라 불릴 수 있는 명사들이 이끌어가게 되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너희들에게 하는 까닭은 윗사람이 응당 지녀야 할 기품과 마음가짐을 논하기 위함이다. 높은 곳에 있을 때 낮은 곳을 살피고, 가까이 화려한 것을 보기보다 멀리 퇴색된 것을 살펴 천하만민의 안위를 중시하는 것이야 말로 위정자가 반드시······.”
그 때 쥐상을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런데 경세지존이 괴겁천마와 사령신을 죽였다는 증거는 없지 않나요?”
“녀석,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아이가 훈장의 말을 끊고, 개입했다.
“야! 증거가 왜 없어? 우리 할아버지가 다 죽였다고 했잖아.”
“직접 시체를 본 사람도 없잖아. 그러니 네 할아버지 말만 믿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거짓말을 했을지 어떻게 확신해.”
“뭐라고? 너 그런 식으로 우리 할아버지 모욕하면 내가 현월회를 불러 올 거야. 감당할 수 있겠냐?”
“흥! 웃기시네. 현월회가 호남성으로 옮겨간 게 벌써 오십 년 전이다. 지금 곡부에는 기념관만 남아 있잖아. 기념관을 지키는 학사 할아버지라도 불러 오게?”
“너!”
훈장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며 한 숨을 흘렸다. 마냥 평범한 제자였다면 혼쭐을 냈으리라. 하나 두 사람 중 한쪽은 경세지존의 후예가 아니던가.
명확하지만 않지만, 어쨌든 그렇게 알려졌다.
그러니 섣불리 어느 한쪽을 편들기 애매한 상황이었다.
“둘 다 그만하거라.”
“하지만, 훈장님!”
“남서림! 그만 하라 했다. 이곳은 학문을 배우고, 위정의 근간을 다지는 장소다. 옛 이야기를 참고하여 지금의 나를 갈고 닦아야지. 진위 판별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거라.”
남서림은 풀이 죽은 채 자리에 앉았다.
쥐상을 한 녀석이 몇 번이나 혀를 날름거렸지만, 맞대응하지 못했다.
놈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경세지존이면 뭘 해. 남겨준 건 쥐뿔도 없는데······.’
*
천휘장(天輝莊).
본래 명칭은 곡부남가였다.
한데 당시 가주였던 남운군이 신공부의 부주로 임명된 후 애매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장남인 남천홍은 아버지를 따라 신공부로 들어갔다.
차남인 남천익은 상업에 흥미가 없었기에 사부와 함께 천하를 떠돌았단다. 항간에는 화산의 제자라는 말이 있었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동생을 뛰어넘기 전에는 사문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없다는 핑계로 일관했다.
평범한 장원이었다면 막내가 뒤를 이었으리라.
한데 그 막내라는 자가 고금제일인이라 불린 경세지존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세지존은 정마대전 이후 천하를 종횡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둘째인 남천익과 달리 화려하게 천하를 들쑤셨다. 황궁과 관부, 상행과 유림은 물론이고, 불문과 도문까지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소림의 방장이 고개를 경의를 표했고, 무당의 장문인이 형제라 칭했다. 자긍심이 하늘을 찌른다는 오가의 장문인들은 시선조차 마주칠 수 없었다. 오죽 했으면 경세지존의 일에는 개입하지 말라는 황명이 내려왔을 정도였다.
천하를 제집처럼 떠도는 자가 곡부남가에 머물렀을 리 만무했다.
결국 자식이 장원을 대신 지켰다.
경세지존은 고금제일이라 자부할 만큼 고강한 무공을 자랑했다. 게다가 수려한 용모와 훤앙한 체구는 사내라고 해도 부끄러워 할 정도였다.
그러니 강호의 재녀들이 그냥 둘 리 만무했다.
경세지존은 은거할 때까지 여덟 명의 미녀를 받아들였다. 그녀들은 저마다 한 성을 쥐락펴락 할만한 처가를 뒀다.
독부대막성주의 하나뿐인 딸.
천하유림의 적통이라 불리는 여인.
고금제일검후라 불리는 여협.
봉황신궁의 궁주는 핍박받는 여인들의 안식처를 만들어준 후에야 경세지존의 품에 안겼다.
하나 일곱 명과 달리 마지막 한 명만은 이렇다 할 처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간에는 경세지존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손가락질을 할 정도였다.
상선여제(商仙女帝)라 불리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상행과 관련된 모든 법제를 다시 만들고,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상단과 표국을 재편했다.
그로 인해 이익은 몇 배로 늘어났고, 개방과 하오문을 뛰어넘는 정보망까지 만들어낸 것으로 명성을 떨쳤다.
한데 그녀의 출신은 고아였고, 한때 곡부남가의 시비였다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이권을 탐하다가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은 그녀의 신상에 흠집을 냈고, 그로 인해 경세지존까지 폄하하려 했다.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곡부남가로 돌아왔다. 곡부남가의 이름을 천휘장으로 바꿨고, 천만금에 달하는 재산은 약자와 병자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죽는 그 날까지 토끼를 키우며 소일했다고 한다.
남서림은 상선여제의 증손(曾孫)이다.
그에게 있어서 증조모의 기억이란 단 하나였다.
증조모는 숫자도 떼지 못한 증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토끼를 좋아하는 걸 보니 그분을 쏙 빼닮았구나.
남서림은 천휘장의 심처에 만들어진 청와단(靑蝸壇)의 위패를 올려다봤다.
“흐음.”
향 몇 개가 쌉싸래한 냄새와 함께 이리저리 연기를 피운다. 그리고 하루 종일 끓여서 육수를 낸 토끼탕과 은자 다섯 냥짜리 즉묵노주가 밀봉된 채 놓여 있었다.
“술 한 병에 생활비 한 달 치가 날아가네요.”
남서림의 중얼거림에 천휘장주인 남풍이 다가왔다.
그는 남루한 복장을 하고 있지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질 만큼 수려한 인상이 돋보였다.
“증조모께서 매일 같이 증조부께 대접하던 것이란다. 그분께서 경세지존이라 불리실 수 있었던 건 어린 시절부터 토끼탕을 장복하여······.”
“아버지, 벌써 수백 번도 더 들었어요. 조금의 재미만 더한다면 매담자로 나서도 되실 걸요.”
남풍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이 아비는 농사짓는 것이 좋다. 양곡이 익어 황금빛으로 물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간의 시름이 눈 녹듯이 사라지지.”
남서림의 아버지의 꿈을 꾸는 듯 몽롱한 표정을 보며 남몰래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위패를 올려다보며 진심으로 빌었다.
‘할머니, 부디 숨겨두신 재산이 있다면 꿈에 나타나셔서 알려주세요. 이제는 사람들이 경세지존의 후예라는 것도 의심할 정도라니까요. 가세가 후손들의 잘못으로 기울었다면 제가 염치없이 이런 말은 못 하지요. 한데 그것도 아니잖아요. 지난 번 매담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천휘장만한 창고에 금은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면서요.’
매 년 간절하게 비는 소망이다.
‘매담자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후손들이 끼니를 굶지 않도록 비밀 창고도 만드셨다던 데요. 혹시 그게 진짜로 존재한다면 제발 꿈에 나타나서······.’
콩!
남풍은 아들의 머리를 쥐어박은 후 말했다.
“네 얼굴에 욕심이 그득하구나.”
남서림은 정수리를 매만지며 입술을 삐죽였다.
“천하제일거부였다면서요. 그러니 지금보다 풍족하게 살아도 되잖아요.”
“녀석, 뭐든 과하면 부족함만 못한 법이야. 천휘장은 수백 명에게 소작을 줬고, 그로 인해 매달 천 냥 이상의 거금을 벌고 있다. 한데 더 풍족할 이유가 무엇이더냐?”
남풍의 말에 남서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천 냥을 벌면 무엇 하나요? 매일 같이 생면부지인 자들에게 밥을 나눠주고, 여비를 챙겨주느라 정작 우리는 세 가지 반찬에 잡곡밥만 먹어야 하잖아요. 심지어 이 달에는 즉묵노주를 사기 위해 반찬까지 줄였다고요.”
“만민양생은 곡부남가 때부터 전해져 내려온 가풍이니라. 네가 얻고, 만들어낸 것을 어떻게 쓸지는 내가 관여할 수 없겠지. 하나 네가 입고, 먹고, 쓰는 모든 것이 천휘장에서 나오지 않더냐. 정녕 풍족하게 살고 싶다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매 년 증조모에게 간절하게 비는 소망만큼이나 반복되는 대화였다.
“네.”
남풍은 시무룩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일은 특별히 토끼를 잡아서······.”
“아! 토끼 지겨워요.”
경세지존의 전생은 분명 풀이었으리라.
그러니까 이렇듯 토기를 잡아 족치는 것으로 심화를 달랬겠지.
남풍은 조상을 원망하며 책을 펼쳤다.
아버지의 말처럼 공부를 해서 출세를 해야 했다.
“두고 봐! 진짜 뇌물이라는 뇌물은 죄다 받아먹어서 호화롭게 살 거야!”
*
낡은 관제묘는 몇 년 째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했다. 하나 관제묘에 모인 이들은 흙먼지를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추레한 몰골을 했기에 오히려 낡은 관제묘가 더럽혀질 정도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정말 하실 생각입니까?”
눈가에 흉터가 있는 사내가 인상을 썼다.
“해야지! 나는 해룡마가의 적장자야.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면 나는 지금쯤 산동과 강소, 절강의 주인이 되었을 게야. 묵표! 설마 마가의 맹약을 잊은 건가?”
묵표라 불린 중년인은 사내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해룡마가의 묵 가는 언제나 해 가의 충복을 자처할 것입니다.”
사내는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나 고개를 숙인 채 사내의 말을 듣고 있는 묵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정마대전이 설령 괴겁천마의 승리로 끝났어도 해룡마가는 성세를 되찾지 못했을 겁니다.’
당시 마교의 근간은 팔가였다.
해룡마가는 팔가의 서열 중 마지막이다.
그렇기에 마도천하가 되었을 대 변방이라 할 수 있는 동부를 배정받았다. 하나 그것은 십비마존의 입 바른 소리에 불과했다. 해룡팔가는 고수의 숫자보다 교도의 머릿수로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마도천하가 이뤄졌더라도 가장 먼저 숙청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묵표! 묵표!”
해룡마가의 마지막 핏줄인 추백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꽂혀들었다.
“예, 말씀하십시오.”
“수하들이 몇이나 남았냐고 묻잖아.”
“오십여 명 정도 됩니다. 하나······.”
묵표는 말끝을 흐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오십 명의 수하 중 해룡마가와 관련된 자는 전무했다. 모두 사파의 잔당이거나 범죄자였다. 한 마디로 그들은 흔하게 볼 수 있는 비적(匪賊)일 뿐이다.
하나 추백은 일당백의 고수라도 되는 양 만족스러워했다.
“좋아! 천휘장을 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묵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천휘장은 엄밀히 따지자면 경세지존의 뿌리나 다름없다. 하나 현월회가 호남으로 자리를 옮겼고, 곡부남가가 신공부에 흡수된 이상 별다른 무력을 갖추지 않은 상가에 불과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주군, 꼭 천휘장을 쳐야겠습니까? 정녕 재물이 필요하시다면 다른 곳을 알아보겠습니다.”
“닥쳐라! 감히 나를 하찮은 필부로 보느냐?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조상의 원수를 갚고, 마도의 한을 풀기 위함이다! 놈의 핏줄을 죽인다면 지하에서 괴겁천마도 기뻐하리라!”
묵표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객잔의 매담자가 떠들던 말을 반복해서 되뇌던 추백이 아니던가. 상선여제가 천만금을 뿌린 후 후손을 위해 금은으로 가득한 동굴을 남겼다는 허황된 소리였다.
‘상징적인 의미를 제외하면 저 버러지 같은 놈들로도 충분해.’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주군. 주군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뭔데?”
“놈들을 죽이고, 돈을 챙기는 순간 산동을 뜨셔야 합니다. 복건이나 광동까지 가시겠다면 제가 따르겠습니다.”
추백은 이미 일이 성사된 것처럼 좋아했다.
“크하하! 걱정 마. 따뜻한 남쪽의 풍류를 즐겨보도록 하자고.”
다음 날 추백과 묵표를 비롯한 오십 명의 비적이 천휘장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한데 초겨울과 어울리지 않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우리를 돕는군!”
묵표는 희희낙락한 추백과 달리 표정을 굳혔다.
갑작스런 비가 왜인지 모르게 마뜩찮았다.
“뭐해? 가자고!”
추백의 말에 묵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담을 넘었다.
“마누라와 아들부터 인질로 잡아라. 그렇다면 놈도 재산을 내놓지 않을 수 없으리라.”
*
“상선여제가 남긴 재산을 내놓아라.”
남풍은 묵표의 말에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몇 번이나 말했잖소. 창고에 있는 양곡과 돈은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아. 대신 내자와 아들을 풀어주시오. 상선여제는 후손들에게 천휘장만 남기셨다는 걸 잘 알지 않소이까.”
묵표는 미간을 좁혔다.
그는 남풍과 구면이다.
사업 상의 문제라기보다 수하들과 함께 몇 번이나 밥을 얻어먹은 기억이 있다. 그렇기에 남풍의 인품이 얼마나 놀라운지 잘 알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된 이상 푼돈이라도 챙겨서 산동성을 떠야할 듯했다. 한데 그 때 묵표도 예상하지 모했던 일이 벌어졌다.
추백이 녹슨 칼을 뽑았다.
“빌어먹을 놈! 네 자식이 죽고 난 후에도 그렇게 뻗댈 수 있는지 보자.”
“주군, 안 됩니다.”
“안 되기는 뭐가 안 돼! 마누라도 있잖아. 일단 한 놈 죽이고 시작하자.”
묵표가 황급히 말리려 했으나, 추백의 칼에는 자비가 없었다.
“죽어!”
남서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출세는 고사하고, 이름 모를 비적에게 죽을 줄 어찌 예상이나 했겠는가.
‘살려줘.’
입안에서 맴도는 한 마디를 유언으로 삼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살려줘!”
그 때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났다.
허공에 구멍이 뚫린 듯하더니 남서림의 앞으로 고깃덩이가 떨어졌다.
추백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러섰다.
“아이! 씨벌, 이거 뭐야?”
그는 진심으로 놀란 듯 몇 번이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심호흡을 한 후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인상을 썼다.
그리고 남서림을 향해 재차 칼을 내리쳤다.
“죽어!”
턱!
고깃덩이에서 무언가 솟구치더니 칼을 잡았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팔이 아닌가.
남서림은 고깃덩이로 보였던 것이 사람임을 알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머리?’
머리카락 한 올도 찾아볼 수 없는 정수리를 지나 고깃덩이와 눈이 마주쳤다. 시커먼 구멍처럼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을 보는 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아.”
남서림은 침음을 흘린 것에 대해 금세 후회했다.
대머리가 남서림의 목소리에 반응한 듯 움찔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서서히 눈을 뜨고, 남서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 아, 아······.”
‘응?’
“아빠? 아빠!”
남서림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야? 이 미친놈은!
추백 역시 남서림과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뭐야? 이 미친 새끼는!”
그는 칼을 잡아당겼다.
대머리는 힘없이 칼을 놓았다.
추백은 그 모습에 용기를 얻고, 재차 칼을 내리쳤다.
“죽어!”
대머리는 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뜸 일갈을 내질렀다.
“우리 아빠 괴롭히지 마!”
콰콰콰콰쾅!
묵표는 남풍에게 겨눴던 칼을 늘어트렸다.
대머리가 손을 내뻗는 순간 추백은 하얗고, 누렇고, 벌겋게 변해서 흩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수만 개의 육편으로 변해 사라진 게다.
“히익!”
대머리의 신위에 겁을 먹은 비적이 남풍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 아버지. 야! 우리 아빠, 살려줘!”
남서림의 외침에 대머리가 반응했다.
그는 손에 잡힌 것을 그대로 내던졌다.
콰쾅!
비적은 의자에 부딪치는 순간 피떡이 되어 튕겨나갔고, 벽을 부순 후에도 몇 장이나 나뒹굴었다.
“어! 연순이랑 양 씨 아저씨, 소 씨 아주머니, 아이 씨! 우리 집 사람들 다 구해줘!”
남서림은 비적들이 가솔들을 향해 달려들자, 악을 쓰듯 외쳤다.
대머리는 이번에도 반응했다.
하나 전처럼 달려드는 대신 자세를 한껏 낮췄다.
양 손바닥을 하늘로 한 채 무언가를 들어올리는 것처럼 힘을 썼다.
“으아아아아앙!”
그 순간 대지가 붉게 물들더니 천휘장을 감쌌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벽이 되어 하늘로 솟구쳤다.
천휘장 전체가 붉은 새장에 갇힌 듯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비적들이 달려나가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대머리는 비적들이 놀라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돌아섰다. 그리고 남서림에게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것처럼 머리를 들이댔다.
“하아, 이것 참.”
남서림은 인상을 쓰면서 천천히 대머리에 손을 얹었다.
*
남천휘는 언덕 위에서 붉게 물든 천휘장을 바라봤다.
“어쩐지 비가 오더라니. 소혜가 부른 거였구나.”
스르륵-
재이가 슬쩍 모습을 보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고 싶으세요?’
그러더니 슬쩍 목록을 띄운다.
그곳에는 남천휘와 연을 맺은 여덟 명의 여인들의 일대기가 영상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오늘은 더 대단한 걸 봤으니 되었다.”
남천휘는 기막을 걷어냈다.
서늘한 빗물이 온 몸을 적신다.
그는 빗물을 손으로 받으며 읊조렸다.
“아무 것도 주지 못해서 미안했는데 정작 네 후손은 내 모든 것을 가져갔구나.”
재이가 검지를 흔들며 말했다.
‘가져갔다고 하시면 안 되지요. 이미 주인님께서는 칠십 년 전에 비책을 제외한 시스템의 모든 기능을 포기하셨잖아요. 그 때 나는 재이만 있으면 돼! 라고 하셔서 얼마나 감동했다고요.’
“훗, 신발 사줬을 때가 아니라?”
‘그 때와 비슷한 감동이었어요.’
남천휘는 수백 장 밖에서도 천휘장 내부의 일을 모조리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왜 나는 남추의 인벤토리를 물려받았는데 아무 것도 없었던 거지?”
‘당시 선주의 인벤토리에 있던 물품은 모두 삭제되었습니다.’
재이의 말에 남천휘는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그럼 내 인벤토리의 물품도 삭제됐어야 하잖아. 한데 저 놈은 나타났어. 설마 저 새끼는 그 상황에서도 삭제가 되지 않은 거야?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불멸과 불사를 이룬 거네. 아 백치가 되었으니까 그것도 아닌가?”
‘시스템의 설정 상 삭제 가능 목록 중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인간을 인벤토리에 넣은 건 주인님이 처음인 걸요.’
흐음, 뭔가 반인륜적 존재가 된 듯하지만.
“나쁜 놈이니까 뭐 어때? 그냥 넘어가자.”
남천휘는 뒷짐을 진 채 발을 내딛었다.
“자! 그럼 뭐가 됐든 새로운 곳으로 가 볼까!”
재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마침내 연료가 가득 찼습니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무슨 소리야? 나는 안 떠나. 미쳤다고 내가 최고인 곳을 떠나서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가겠냐?”
재이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남천휘가 그런 재이를 보며 엄중한 경고를 날렸다.
“만에 하나 퀘스트를 띄우면 너 반납할 거야.”
재이는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 축지지책이 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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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휘는 빙긋 웃으며 갈라진 공간 사이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