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사막여우.
2, 사막여우.
사풍단(沙風團).
마적떼의 이름치고는 성의가 부족했다.
하나 대충 지은 이름과 달리 악명만은 진짜였다.
사풍단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도 남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지 않던가.
한데 오늘 그들은 하나를 남겼다.
바로 그들의 목숨이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야!”
수십 마디의 욕설을 한 줄로 줄이면 저렇지 않을까 싶다. 하나 그것을 수십 명이 동시에 내뱉고 있으니 심약한 자는 욕지기를 하거나, 졸도할 수도 있을 만큼 위급한 상황이다.
하나 방갓을 쓴 사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풍단이 먼저 덤빌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백여 명의 동료 중 스무 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살육을 벌이는 것이더냐?”
사풍단주가 짐짓 위엄을 보였다.
그러자 사내가 방갓을 슬쩍 들어 단주를 확인했다.
“눈가에 흉터 세 개. 돼지 코, 유달리 못생긴 얼굴. 네 놈이 맞구나.”
사풍단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대머리를 대머리라고 부르면 화를 내듯 추남에게 추남이라는 단어는 살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무, 무슨 개소리야? 누가 추남이래?”
사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배가 고팠어. 나보다 더 초라한 몰골의 아이가 식은 만두를 주더군. 그리하여 추남에게 부모를 잃은 아이의 원수를 갚아주겠다. 뭐 이런 내용이야.”
“누가 추남이야!”
“그래, 네게 중요한 건 그거겠지. 하나 그 아이에게는 아니었어.”
스릉-
사내는 손에 쥔 검을 떨쳤다.
누렇게 펼쳐진 모래 위로 핏물이 방울진다.
“그리고 내게도 아니었다.”
타탓!
사내가 재차 모래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죽여! 갈가리 찢어버려!”
사풍단주의 사심이 섞인 명령에 마적들은 지체없이 달려들었다. 상대가 고강한 무공을 지녔어도 사막에는 사막의 싸움이 존재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모래가 잡아끈다.
발목까지 파묻힌 것도 모자라 쉴 새 없이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게다가 자칫 발을 잘못 들이면 유사에 빠질 수도 있었다.
“쯧.”
사내는 혀를 찬 후 몸을 날렸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마적의 걷어찬 후 놈의 배 위로 내려섰다. 그리고 지척에 이른 적의 곡도를 피해 상체를 눕혔다.
쉭쉭쉭쉭!
짧은 시간 동안 여섯 명이 더 죽었다.
하나 마적들은 겁을 먹지 않았다. 사막에 발을 들인 이상 죽음은 생경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죽은 놈은 어디서든 채워넣을 수 있지 않던가.
“죽어!”
앳된 얼굴의 적이 곡도를 뒤집어 칼끝으로 내리쳤다. 사내는 상체를 슬쩍 비틀어 약관을 겨우 넘긴 듯한 적의 칼을 피했다. 그리고 팔꿈치로 안면을 찍었고, 튕겨져 나가는 놈의 아랫배에 일검을 먹였다.
“크억!”
하나 그 사이 등 뒤에서 접근한 자들이 빠르게 곡도를 휘둘렀다. 피풍의가 찢겼고, 끈이 잘린 방갓은 사풍을 타고 사라졌다.
“응? 사내 놈의 얼굴이 마치 계집애처럼 곱상하구나. 중원에서 온 건가?”
사풍단주는 혀로 아랫입술을 핥으며 음심을 드러냈다.
사내는 살기보다 빠르게 전염되는 음욕의 눈초리를 느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곳이나, 이곳이나 다를 게 무엇인가?”
턱-
사내가 내려놓은 검이 절반이나 모래에 묻혔다.
그러니 마적들이 미처 반응하기 전 옆구리에서 두 자루의 도가 뽑혀나왔다.
“거기서 그랬듯, 여기서도 그래야겠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사내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너희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의미다.”
“크하하하! 허장성세도 적당히 해야지. 어디서 감히 허풍을 떨어! 놈의 다리 힘줄을 잘라서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사풍단주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적들이 쇄도했다. 하나 그들은 사내와 일 장 거리를 두고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화아아아아아-
도를 타고 휘몰아치는 강렬한 기운.
대막의 열기를 닮은 붉은 강기였다.
사내는 히죽 웃으며 사풍단주를 향해 손짓했다.
“귀찮으니까 한 번에 다 덤벼라.”
잠시 후 사풍(沙風) 대신 혈풍(血風)이 휘몰아쳤다.
*
대막의 객잔은 언제나 번잡스럽다.
서역으로 향하는 상인과 표사들은 물론이고, 관부의 눈을 피해 장성을 넘은 범죄자도 즐비했다. 거기에 더하여 온갖 사정을 지닌 자들이 가득하니 싸움과 술이 빠지지 않았다.
오늘의 객잔은 싸움보다 술에 집중한 듯했다.
중원에서 온 매담자가 취객들을 한껏 끌어 모았기 때문이다.
“강호의 평화는 끝이야! 끝!”
매담자의 일갈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시작은 현월회주겠지. 약관의 그가 한 일을 늘어놓으면 오늘 아무도 길을 못 떠나. 산동에 삼정이라는 세력이 있거든? 유가의 신공부, 명문의 황보세가, 그리고 이거의 청도문이지.”
매담자는 엄지와 검지를 부비며 웃었다.
설을 풀 것이니 값을 치르라는 의미였다.
철전이 여기저기서 날아왔다.
“삼정이니 사정이니 해봤자, 변두리 방파잖아. 그런 거 말고 중원의 이야기를 해보라고!”
“어허! 그렇게 성격이 급해서 대막은 어찌 건너려고 하는가. 어차피 삼정은 시작에 불과했어. 사령신의 보고가 등장하고, 남궁세가와 얽힌 것이 불과 얼마 전이라고 하더군. 그리고 최근에는 무림맹의 문상이었던······.”
사람들은 금세 이야기에 집중했다.
남천휘의 행적을 쫓는 것만으로도 웅지가 샘솟았다.
마치 자신이 대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관심을 보였다.
“그런 자라면 대단한 이들과 함께 다니겠군. 따지고 보면 신마대전 이후 제대로 된 서열이 없었잖아.”
호사가들은 강호의 전면에 나설 수 없다.
나설 수 있다면 호사가가 되는 대신 강호인이 되었으리라. 그렇기에 그들은 새로운 영웅을 언제나 환영했고, 저들끼리 서열을 나누기 일쑤였다.
“이제 슬슬 일황이나 이제, 삼성을 나눠야 하지 않겠어? 이보시오. 그러니 현월회주의 인맥 좀 들어봅시다.”
매담자는 거친 수염을 쓰다듬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것 또한 처음부터 논해야겠지. 용봉삼협이라고 들어봤는가? 신공부의 백협, 검후의 제자인 화협, 그리고 지모가 뛰어난 귀협을 일컫는 별호라네. 그 중 귀협이 바로 남천휘인데······.”
그가 한창 이야기를 이어갈 때 객잔 구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걸음마저 비틀거리는 듯했다.
그는 셈을 치룬 후 피풍의로 몸을 감싼 채 객잔을 나섰다.
“후우.”
대막의 삭풍은 중원의 늦겨울만큼 사람을 괴롭혔다.
사내는 객잔 안에서 들려오는 남천휘라는 이름 세 글자를 입안에 굴려봤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다고 여겼는데······.’
하나 만은 버려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버리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하나 정도는 품고 있어도 되겠지.’
사내는 새로 구입한 방갓을 쓰고 발길을 돌렸다.
하나 서너 걸음 내딛고는 이내 멈춰 섰다.
이곳도 추운데 북쪽은 또 얼마나 더 추울까?
‘귀찮은데 그냥 돌아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