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소혜야.
1, 소혜야.
“소혜야!”
중년 여인은 미간을 좁힌 채 소리쳤다.
그녀의 앞으로 십수 명의 여아들이 바삐 오갔다.
하지만 소혜는 찾을 수 없었다.
“이 녀석이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곡부남가의 점심은 언제나 부산스럽다.
가주인 남운군은 넉넉한 인품으로 유명했고, 내원의 주인인 안자영은 열정적이다.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결과는 하나였다.
- 가진 것을 베풀라.
그로 인해 곡부남가는 오전부터 수백 명이 먹을 수 있는 점심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솔은 물론이고, 인근의 배곯는 이들까지 모아 식사를 했다. 심지어 유민이나 낭인들에게까지 점심을 대접했다.
강호가 평화롭다고는 하나 그것은 강호인의 이야기일 뿐이다. 양민은 태평성대일 때도 그랬고, 난세일 때도 언제나 배가 고팠다. 곡부남가는 양민들에게 있어서 부모나 마찬가지였다.
“장 여관! 간 좀 봐줘.”
주방의 숙수가 이른 아침부터 수작을 건다.
안자영을 대신해 식사를 책임져야 하는 중년 여인은 못이기는 척 다가갔다.
“좀 싱거운데?”
“먼 길 떠나려면 자극적이지 않은 것이 좋아. 미음에 육수와 소채를 섞었어. 언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잘 먹히는 법이야.”
숙수는 슬쩍 눈짓을 했다.
“나처럼 말이지.”
“흰 소리는 됐고, 소혜 봤어요?”
중년 여인이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숙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모르지. 그 녀석이야 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잖아. 열 살짜리 녀석들은 딱 보면 속이 보여. 한데 소혜는 모르겠어. 무슨 상처가 있었기에 마음을 열지 않는 걸까?”
“밥이나 마저 하세요.”
중년 여인은 숙수를 주방으로 밀어 넣었다.
“이 녀석을 어찌 해야 좋을까.”
그녀의 탄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여아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더니 자신이 만든 음식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그래, 기특하구나. 어머! 네가 벌써 이런 걸 할 줄 알았어?”
장 여관은 병아리처럼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여아들을 보며 웃었다. 이 녀석들은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리라.
“잘했다. 잘했어.”
여아들의 환한 웃음을 보고 있자니 소혜에 대한 근심이 사그라졌다.
소혜는 정오가 훌쩍 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왕방울처럼 커다란 눈매에 먹을 걸 넣어놓은 듯 부풀어 오른 볼을 보고 있자니 귀엽기만 했다.
하나 장 여관은 애써 속내를 숨긴 채 소혜에게 따끔한 한 마디를 건넸다.
“마님께서 너를 거둬주셨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소혜는 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답해보거라.”
“어려움에 빠진 자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어요.”
“네 동무들을 봐라. 오전부터 놀지도 못하고 저 많은 것을 준비했어. 저 아이들이라고 해서 놀고 싶지 않겠느냐? 하지만 가주와 마님의 은덕을 입고, 조금이나 도움이 되려고 애쓰는 거란다. 네가 놀러 다니는 사이에 말이다. 부끄럽지 않느냐?”
장 여관의 말에 소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랫배에 모은 두 손으로 고집스레 앞치마를 만지작거릴 뿐이다.
“너, 아침도 땡땡이였지? 도대체 뭘 하고 노느라 밥 때도 놓치는 게냐. 같은 방을 쓰는 아이들에게 듣자하니 새벽부터 나갔다면서?”
“······.”
“에휴, 너를 어쩌면 좋니?”
장 여관의 한탄에도 소혜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그저 이 시간이 자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침묵을 지킬 뿐이다.
“됐다. 더 늦기 전에 식당으로 가. 밥은 먹어야지. 대신 점심을 먹거든 저녁까지 마당을 청소해라. 알았느냐?”
“네.”
소혜는 고개를 꾸벅인 후 방을 나섰다.
장 여관은 한 숨을 흘렸다.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르겠다.
소혜는 잠시만 눈을 돌려도 자취를 감췄고,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마님이 어여삐 여기신다고 너무 방자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처소를 나섰다.
“모두 모여 봐. 오늘은 바느질을 배워야 하니······.”
여아들이 모였지만, 소혜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또 어디를······.’
잠시 후 내원에서 장 여관의 뾰족한 외침이 울렸다.
“소혜야!”
*
남천휘는 갑작스레 눈을 번쩍 떴다.
눈동자를 굴려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햇빛의 밝기를 따져봤다.
“아!”
이미 정오가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남천휘는 침상에서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탁자에는 수십 권의 책이 널브러져 있었다.
저자에서 유명한 영웅담이 대부분이다.
하나 그 중에서 유일하게 덮여 있는 책이 있다.
남천휘는 그것을 보며 한 숨을 흘렸다.
“엿 됐다.”
서당의 노학사는 대쪽 같은 성정으로 유명했다.
한데 과제를 빼먹고 영웅담만 밤새 읽었으니 대쪽 같은 회초리를 맞아야겠지.
조금만, 조금만 더······.
그러다 보니 새벽까지 봐버렸다.
어제 본 영웅담에 이런 명대사가 있더라.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한계를 모른다고 말이야.
남천휘는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책을 펼쳤다.
“어.”
새것처럼 깨끗해야 할 책에는 온갖 주석이 달려 있었다. 노학사가 요구했던 과제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을 정도였다. 학당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는 웅대 도 이렇게는 못하리라.
남천휘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이야! 잠들기 전에 해놓은 건가?”
그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양 어깨를 다독이며 읊조렸다.
“기특하다. 천휘야. 장하다. 천휘야.”
이제는 숫제 콧노래까지 부르며 나설 채비를 했다.
지옥이나 다름없던 학당이 도원경처럼 느껴졌다.
“응? 새 옷이 있네.”
지난 번 허물처럼 벗어놨던 옷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대신 빳빳하게 펼쳐진 새 옷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좋았어. 오늘 하루도 기분 좋게 시작해볼까!”
그 날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였다.
남천휘는 먹고, 자는 것만으로도 일상생활을 영위했다.
그렇게 공부를 포기하고, 한량을 꿈꾸게 되었다.
이 생활은 특급강호인 승급 체계가 시작하는 그 날까지 계속됐다. 아니, 어쩌면 ‘어우, 깜짝이야! 뭐야 너? 당장 내 머릿속에서 꺼져. 이 년아!’라고 했던 그 시점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