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주인공 없는 무림대회. (2)
*
신강에서 시작된 피의 불길은 가뭄이 더해진 것처럼 빠르게 번졌다. 신강을 뒤덮고, 청해와 서장으로 내려간 불길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중원의 경계라 할 수 있는 감숙성까지 마도의 발아래 무릎을 꿇어야 했다.
“지금 기세라면 화산과 종남이 있는 섬서성까지 점령할 수 있습니다!”
마교를 지탱하는 것은 팔대가문이다.
교주였던 마천종 역시 팔대가문 출신이었고, 새롭게 교를 장악한 십비마존 역시 팔대가문에서 발탁됐다.
그리고 당대 마교주인 십비마존(十臂魔尊)은 마천종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진군을 주장하고 있었다.
마천종은 높다란 누각의 꼭대기에서 마을을 내려다봤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이곳은 감숙성의 패주였던 대설문의 심처였다.
하나 대설문의 영역을 오가는 이들은 모두 흑의를 걸쳤고, 그 숫자는 기천에 이르렀다.
모두 마교도였다.
마천종은 침음을 내뱉었다.
십비마존의 주장처럼 저들과 함께 질풍처럼 나아간다면 화산과 종남도 두렵지 않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선두에 서서 정파의 위선자들을 주살했을 터였다.
하나 손을 내저었다.
“아니 될 말이다.”
“교주! 백 년 전 제 아비에게 약속했던 것을 잊으셨습니까? 본교는 괴겁천마와 손을 잡고, 천하를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 선봉에 마천종이라는 마도의 희망이 있었지요. 우리는 당신을 믿었기에 백 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왔습니다. 가짜 교주 행세를 하면서도 마천종에 대한 신뢰는 굳건했지요. 제 아비가 눈을 감을 때 가장 원통하게 여겼던 것은 당신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곁에 서지 못함이었습니다. 한데 이제 와서 정파를 눈앞에 두고 머뭇거리다니요. 구천에 계실 제 아비가 피눈물을 흘리실 겁니다.”
마천종은 분루를 흘리는 십비마존의 어깨를 다독였다.
“약속을 기억하는가?”
“예! 천하를 피로 물들여 마도의 시대를 열겠다는 그 약속을 어찌 잊겠습니까!”
“나는 정파를 멸절할 것이고, 천하를 피로 물들일 것이다. 그리고 마도의 시대를 열 것이다!”
십비마존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속하에게 명령만 내리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섬서성을 피로 물들이겠습니다!”
끼이익-
그 때 제 삼자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십비마존은 혈의를 걸친 노인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노인은 고목처럼 삐쩍 마른 몰골에 해골의 눈두덩 이처럼 시커먼 안광을 번뜩였다.
“흑천괴뢰.”
십비마존 역시 괴겁천마 아래 사성신위가 한 몸처럼 움직였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나 사마천세가 재개된 이상 흑천괴뢰는 마교의 경쟁자라 여겼다.
반면 마천종과 흑천괴뢰는 눈인사를 나눴다.
괴겁천마가 있는 한 두 사람의 싸움은 불필요한 소모전임을 오랫동안 몸과 마음에 새겼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니다.”
“뭐가 말이오?”
“지금은 진군할 때가 아니다. 초대장을 보냈으니 곧 손님이 올 것이야. 그러니 자네는 연회 준비만 잘 하면 된다네. 아! 자네가 아주 좋아할 피의 연회니까 잘 준비할 것이라 믿네.”
하나 십비마존은 여전히 불퉁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마졸만 해도 만 명이 넘습니다. 게다가 오늘만을 기다려왔던 마도의 은거기인들까지 모두 나섰습니다. 이미 개방도와 하오문의 잡졸들이 수십 번이나 오갔더군요. 저들이 우리의 규모를 아는데 미쳤다고 이 자리까지 오겠습니까?”
흑천괴뢰는 입꼬리를 올렸다.
“올 것이야.”
“지금 당신의 호언장담만 믿고 마도의 내일을 맡기라는 의미인 게요?”
“어린 새끼가 말버릇하고는.”
마천종은 흑천괴뢰와 십비마존이 기세를 흩뿌리자, 중재를 위해 나섰다.
“흑천의 말은 일리가 있어. 얼마 전 산동성 중지봉의 이야기를 들었는가?”
“경천쌍도가 광혈오주에게 엿을 먹였다지요. 다섯 중에 셋이 죽었으니 아주 꼴좋군요. 빌어먹을 사도의 잡종들은 죽을 때도 쓸모가 없더이다.”
경천쌍도(驚天雙刀)는 중지봉 혈사 이후 사마의가 의도적으로 퍼트린 별호였다.
그는 자신의 주군이 공명심을 숨기지 않는 성격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최대한 멋있으면서 효과적인 별호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무한상사와 하오문의 힘을 빌려 경천쌍도라는 별호를 천하에 퍼트렸다.
“그 날 혈인교주, 백인잔결노, 만독노옹이 죽었어. 모두 경천쌍도에 말일세.”
“제가 사성신위에는 미치지 못하나, 광혈오주 정도는 모조리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하나 중지봉 혈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네.”
마천종은 무극중사를 통해 입수한 정보를 낱낱이 밝혔다. 중지봉에서 곡부남가의 무인들이 어떤 상태였고, 그들을 상대해야 했던 사파의 무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진법으로 그런 게 됩니까? 사술인가?”
마천종은 흑천괴뢰를 응시했다.
흑천괴뢰는 혀를 차며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다.
“모른다.”
십비마존은 침음을 내뱉었다.
그는 흑천괴뢰를 싫어했지만, 마천종에 비견할 만큼 강자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 중에서 부적과 주술의 일종은 천하에서 손꼽힌다고 인정하지 않았던가.
한데 흑천괴뢰가 연유조차 모른다면 위험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을 이리로 유인하려는 겁니까?”
“정확하게는 난주지.”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는 현재 아비규환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마교도가 난립하여 살육을 자행하니 관부는 벌써부터 도망쳤고, 양민들조차 짐을 싸고 고향을 등진지 오래였다.
“난주에 이미 쓸 만한 것들을 잔뜩 배치해뒀다. 그러니 네가 수하들을 난주에 배치한 후 정파를 맞이한다면 살육의 연회를 열 수 있으리라.”
“결국 남천휘 한 명 때문에 마도가 투기를 잠재우고, 적이 오기를 기다려야한다는 게요?”
“그렇다.”
“그렇다고?”
“그렇다. 남천휘는 그 만한 가치가 있다. 홀로 사령신을 대적한 자다. 네가 광혈오주를 상대로 광오하게 떠들 수 있을지언정 사령신에게는 그러지 못할 게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니 남천휘를 잡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할 필요가 있다.”
십비마존은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천종은 수하를 달래듯 말을 이었다.
“난주에는 흑천괴뢰의 주술뿐 아니라 천명지괴의 기관진식까지 설치됐다.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를 해뒀으니 네가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쓸만할 것이다. 또한 용봉쌍휘가 우리와 함께 할 게야. 이만하면 네가 생각하기에도 우리가 유리하지 않겠는가?”
“용봉쌍휘가요?”
십비마존은 탄성을 흘렸다.
용봉쌍휘는 한쌍의 부부로 광혈오주 중에서도 특별했다. 개개인은 그리 강하지 않지만, 둘이 함께 싸운다면 누구도 쉬이 상대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심지어 사령신이 심심할 때 그들 부부를 데리고 비무를 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흐음, 하나 이 모든 계획은 정파가 스스로 범의 아가리에 몸을 던진다는 전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마천종은 확신하듯 말했다.
“놈들은 올 것이다.”
“어째서 확신을 하십니까?”
“네가 그 증거다.”
십비마존은 반박을 하려다 탄성을 흘렸다.
자신조차 공명심에 진군을 주장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입신양명에 사활을 거는 정파인들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정마대전이라는 용어만큼 무인의 피를 끓게 만드는 것은 없을 터였다.
마천종과 흑천괴뢰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십비마존을 설득하기 위해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이들이 확신하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괴겁천마께서 그렇다고 하신 이상.’
‘남천휘는 반드시 온다.’
두 사람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십비마존은 회가 동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하루라도 빨리 그 날이 왔으면 좋겠군요.”
마천종이 호응하듯 말했다.
“지금쯤 놈들은 급진과 온건을 나뉘어 한바탕 싸움을 하고 있을 게다. 저들이 모르는 곳에 함정을 설치하고, 매복을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남았다.”
십비마존은 포권을 한 후 빠르게 누각을 내려갔다.
“백 년을 기다린 수하에게 너무 하는군.”
흑천괴뢰의 조롱에도 마천종은 느긋했다.
“천하를 피로 물들이고, 마도의 시대를 열겠다고는 했지. 하나 저들과 함께 한다고는 하지 않았잖아. 그러면 된 거지.”
*
마천종과 흑천괴뢰의 예상대로 무림맹에는 때 아닌 설전이 시작됐다.
맹주는 그것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하나 수십 명의 명숙들은 맹주를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속내를 드러냈다.
“함정입니다! 놈들이 무슨 짓을 해놨을지 알고 감숙에 발을 들인단 말이오. 애초에 병법에 이르기를······.”
“놈들이 스스로 뭉쳐 있지 않소. 일망타진할 절호의 기회란 말이외다. 탁상공론으로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놈들의 세력은 점점 늘어날 게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장 무림대회를 통해 정마대전을 선포해야 마땅하오.”
“사령신을 상대해야 할 경천쌍도는 보이지 않고, 무림대회에 모인 이들의 면면을 봐도 그리 쓸만하지 않소. 자칫 감숙에 발을 들였다가 실기라도 한다면 강호의 명운을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게 정파의 협객으로서 할 말인가? 이미 곤륜이 무너졌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방파가 수십 곳이나 멸문했소. 죽은 양민의 숫자가 기천이며 나라에서도 손을 놓은 상태요. 한데 저들과 싸우는 것이 두려워 기다리자고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외까?”
“그게 아니라! 현실을 보자는······.”
쾅!
무림맹주인 칠절신군이 탁자를 내려치는 순간 좌중이 고요해졌다.
“며칠 전만 해도 사마외도를 단박에 일소할 것처럼 떠들던 자들은 어디로 간 것인가? 또한 지난 백 년의 세월 동안 무위도식하다가 이제야 칼을 빼드는 자들의 면면은 어떠한가? 정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무림맹의 심처에서 철부지들처럼 떠드는 자들의 이야기를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 건가?”
명숙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투쟁심과 호승심이 가득한 반면 두려웠고, 미심쩍었다. 그렇기에 겁을 먹은 개처럼 서로를 향해 짖기만 할 뿐 물어뜯지 못하는 게다.
“우리는 감숙으로 간다.”
칠절신군의 일갈에 급진파와 온건파는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파의 미래가 달린 일을 이리도 쉽게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게다.
“맹주!”
하나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하는 총군사를 보며 다시금 말을 아꼈다. 총군사는 맹주에게 눈인사를 한 후 두툼한 책자를 건넸다.
“이건가?”
맹주는 총군사가 아니라 뒤를 따르던 사마의를 향해 물었다. 사마의는 대전에 모인 이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습니다! 현월회의 회주께서 목숨을 걸고 수집한 정보입니다.”
중진들은 사마의의 호언장담에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개방과 하오문을 통해 시시각각 새로운 정보가 쏟아지는 상황이다.
그러니 남천휘의 무공이 대단하다고 한들 수많은 사람들의 정보력을 따를 수 없다고 여겼다.
맹주는 책자를 총군사에게 건넸다.
총군사는 사마의에게 다시 책자를 넘겨줬다.
사마의는 히죽 웃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크흠! 감숙성에는 현재 마교의 전력이 집중되어 있고, 섬서성과의 경계인 천수와 서화, 그리고 평량현 일대에 전선이 완성되었습니다.”
중진들은 침음을 흘렸다.
이미 알려진 사실이 아니던가.
하나 사마의의 말이 이어지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감숙성에 모인 마교도의 총원은 일만칠천육백사십이 명이고, 이 중 절정의 경지에 오른 자는 칠천이십 명입니다. 초절정의 고수로서 구파의 장로급이 상대해야 하는 마두는 모두 삼백예순다섯 명으로 각기 이름은 따로 나눠드리는 보고서로 갈음합니다.”
“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요?”
“일단 끝까지 들으세요.
그 와중에도 현월회의 무인들이 두툼한 책자를 명숙들에게 나눠줬다.
사마의의 말이 이어졌다.
“또한 난주에는 광혈오주의 한 명인 천명지괴의 기관진식이 대규모 펼쳐져 있습니다. 북쪽에서 시작되는 기관진식의 위치와 명칭, 그리고 위험도 또한 정방향으로 나눠드린 보고서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특히 염두에 둬야 할 대상은 마교의 팔대가주, 광혈오주 중 최고수인 용봉쌍휘입니다. 이들은 각기 아홉 곳의 장소에 퍼져 구중천의 역할을 하며······.”
좌중은 사마의의 말이 이어질수록 진저리를 치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상세한 정보가 아닌가. 그들 중 몇 명은 겁먹은 표정으로 허공을 두리번거렸다.
“······.이상으로 감숙성에 포진한 적도의 세력에 대한 일차보고가 끝났습니다. 아직도 감숙성으로 진군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사마의는 잠시 후 히죽 웃으며 무림맹주에게 말했다.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