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성소 싹쓸이. (2)
불현 듯 남추가 추락했을 때의 영상이 뇌리를 스쳤다. 예전에 들었을 때에는 낙하지점이나 좌표설정과 같은 재이의 기계음으로 인해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하나 돌이켜 봤을 때 그 날 남추는 분명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완전히 축이 뒤틀렸군. 뒤틀렸군. 축이 뒤틀렸어.’
예전의 영상에 조금 전 보았던 영상이 덧씌워졌다.
‘살기 위해서 싸운다고 했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핑계다.
한순간에 호랑이를 잡고, 한순간에 가죽을 벗겨서 옷으로 입을 있는 존재였다. 무엇보다 천상의 능력을 가진 자가 싸움을 하기 위한 이유로는 너무나 하찮았다.
첫 번째 영상부터 확인을 시작했다.
남위기에 축을 검색하고, 당시 보았던 광경을 일일이 집어넣었다. 검색어가 추가될수록 검색량이 줄었다.
그러던 중 눈에 띄는 정보가 있었다.
‘시공역천문문.’
방사(方士)들의 자료였다.
진법의 일종이었고, 주술의 일종이었다.
시간과 공간의 축을 비틀어 천의를 엿볼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이어졌다. 심지어 시공역천문문에 성공한다면 장차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단다.
‘개소리 같은데.’
불로장생하고 싶은 부호나 내일의 일을 미리 알고 싶어 하는 몽상가들에게서 재료비를 뜯으려는 요량이었겠지. 평소였다면 신경도 쓰지 않고 귓등으로 흘렸으리라.
한데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또한 남추의 혼잣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산과 나무, 꽃과 풀을 처음 본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호랑이라는 것을 기록으로 본 것처럼 들떠 보였다.
‘이상하게 끌리네.’
이번에는 아예 시간축과 공간축을 검색어에 집어넣었다.
정보창이 등장했다.
한데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울렸다.
◎ 허가되지 않은 보안 정보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 실패했습니다.
- 실패했습니다.
그 이후로 실패라는 알림이 연이었다
남천휘는 정보창을 지운 후 입꼬리를 올렸다.
시스템은 완벽해보이지만, 가끔 이런 식으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맹점이 있지 않던가.
실패했다는 건 성공했을 때 무언가 존재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허가되지 않은 보안 정보라면 시간축과 공간축에 관련 정보일 터였다.
‘신마행을 시작하면서 고급 정보에 접근이 가능하다고 했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실패했다면······.’
진정한 천의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하겠지.
아니, 시스템의 핵심이라고 해야겠네.
결국 남위기로 검색한 시공역천문문이라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정보를 얻었건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스템은, 재이는,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는.
하늘의 것, 천상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천상의 것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납득할 수 없는 세상에서 왔음이 분명했다. 그제야 남추가 양 부인을 떠나면서 살기 위해서 싸운다고 했던 의미를 알아버렸다.
‘그 날 대가 끊겼다면 아버지도 없고, 나도 없고, 내 자식도 없겠지. 그리고······.’
남추도 없었던 걸까?
남천휘의 표정이 괴상망측하게 변했다.
“자칫하면 내 쪽이 할아버지일 수도 있는 거잖아.”
이쯤 되면 재이가 튀어나와서 장난을 치든 조롱을 하든 했어야 할 순간이다.
한데 녀석은 조용했다.
더불어 대두동은 풀벌레마저 울지 않을 만큼 고즈넉하다.
탁.
남천휘는 술잔을 내려놨다.
“아직도 남추의 능력이 내게 전해진 이유를 모르겠네. 하지만 그가 살기 위해 싸웠으니 나도 일단은 살아야겠다. 살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자. 어때?”
호연지기를 자랑하듯 외쳤지만, 마지막 한 마디는 재이에게 건넸다.
재이가 슬쩍 고개를 내밀더니 배시시 웃었다.
‘그 날까지 주인님을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그런 얼굴로 그런 표정을 짓지 말라고.
사람도 아닌 녀석을 보면서 두근거리고 싶지 않아.
남천휘는 애써 재이를 무시한 채 즉묵노주의 술병을 기울였다.
불현 듯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남추는 괴겁천마와 사령신을 유인해서 뭘 하려던 것일까?’
불멸과 불사를 미끼로 끌어들였다.
결국 사령신은 혼백이 증발한 상태로 몸뚱이만 남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기억을 잃고, 백치처럼 강호를 떠돌았을 터였다.
‘한데 언제부터 떠돈 거지?’
술 한 잔과 연계하듯 남위기를 켰다.
그리고 사령신의 행적을 역추적하고, 비슷한 사례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검색을 한 끝에 대략 시기를 추정할 수 있었다.
‘십 년 전후부터 사령신의 흔적이 엿보인 건가?’
의구심은 이어졌다.
그렇다면 몸뚱이가 날아간 괴겁천마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원의 세력이 날뛰는 것으로 보아 괴겁천마와 모종의 관련이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무극중사가 괴겁천마의 대리인처럼 행동하지 않았던가.
‘혼백만 남아서 명령을······.’
불현 듯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거 영락없는 귀신 아니냐?
부적이라도 몇 장 구해다가 품고 있어야 할 듯했다.
◎ 무림대회 십일 전입니다.
남천휘는 잡다한 것을 인벤토리에 넣은 후 침낭을 꺼냈다.
“날이 바뀌었으면 벌써 자정이 지난 건가? 빨리 자야지.”
천하의 중지(衆志)가 모이는 무림대회는 기억에서 지운 채 잠을 청했다.
뭐가 됐든 괴겁천마만 죽이면 되잖아?
*
남천휘에게 있어서 무림대회를 통한 전력의 충원은 부수적인 해결책이다. 이 모든 위협은 괴겁천마와 사령신의 죽음으로만 해결이 가능했다.
무인들이 모였다고 해서 그것이 이뤄질까?
사마천세 시절에도 하지 못했던 일을 백 년 동안 무위도식한 현재의 무인들이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내가 해야 해.’
그렇기에 무림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어차피 남위기로 갱신되는 정보를 확인할 때마다 강호의 정세를 파악하고 있지 않던가.
곡부남가에 위기가 있지 않는 한 미리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놈! 오늘은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사령신이 성난 맹수처럼 이빨을 드러낸 채 쇄도했다. 그는 불사라는 말은 거짓이 아닌 듯 몇 번이나 인벤토리를 드나들었어도 죽지 않았다.
다만 피폐함이 깊어질 뿐이다.
그렇기에 사령신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
수만 개의 촛불을 켜놓은 것처럼 새하얀 공간.
한데 아무 것도 없었다.
다리가 끊어질 것만 같아서 쉬지 않고 움직였지만, 끝을 찾지 못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리라.
그러나 사령신은 버텼다.
그리고 지금도 생각과는 달리 죽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 남천휘를 죽이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죽어!”
사령신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공세를 펼쳤다.
남천휘의 공세는 자신의 불사를 뚫지 못한다.
그렇기에 용린쌍도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 와중에 남천휘의 몸에 구멍을 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
촤악!
그 순간 백룡도가 횡으로 그어졌다.
이십 일 남짓한 기간 동안 수 없이 봐왔던 초식이다. 한데 오늘은 어딘가 달랐다. 본능이라는 녀석이 오랫 동안 잊고 있던 낯선 감정을 끄집어냈다.
녀석은 목이 째져라 외쳤다.
위험하다!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월아혈천수를 황급히 멈췄다.
그리고 남천휘의 목을 노리려던 손을 재빨리 빼냈다. 하나 백룡도의 끝에서 흘러나온 백색 강기가 손끝을 스쳐갔다.
촤악-
손끝의 저릿함.
사령신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릿함을 시작으로 후끈함이 몰아쳤고, 이내 두 눈은 손끝을 확인했다.
가장 긴 손가락인 중지의 한 마디가 잘려나갔다.
“아.”
남천휘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사령신의 육신을 고깃덩이처럼 다져놨지만, 신체를 잘라내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목이 자를 수 없으니 죽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한데 백파신공의 이초식인 절(絶)로 인해 사령신의 손가락이 잘렸다.
‘자를 수 있네?’
재이의 알림이 호응하듯 들려왔다.
띠링-
◎ 백파신공의 숙련도가 50에 이르렀습니다.
- 무공의 성취가 5성까지 상승했습니다.
- 초식의 형에 의를 담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 의념이 담긴 초식으로 인해 시스템에 대한 접근 인가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백파신공의 성취가 오르면 시스템에 접근을 할 수 있다고?’
결국 백파신공 자체가 시스템을 움직인다는 의미가 아닌가. 돌이켜 보면 남추가 진무성흔을 남겼을 때 읊조린 일곱 개의 난제는 천하의 섭리라 했다.
‘남추에게 있어서 천하란 강호가 아니다. 그가 살던 세상을 천하라고 칭했겠지. 그렇다면 백파신공 자체는 지금이 아닌 천상의 기술력을 활용하는 수련법이나 마찬가지로구나.’
남천휘의 상념이 끊겼다.
사령신이 손가락을 부여잡은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내 손! 아아아아! 아파. 내 손! 내 손! 으아아아아!”
팔을 잘린 것도 아니고, 단전이 깨진 것도 아니다.
그저 손가락 한 마디가 잘린 것을 가지고 왜 저렇게 호들갑일까.
고통을 느낀 적이 없어서겠지.
그러니 남의 고통에 무감각했겠지.
그렇기에 그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웃었겠지.
눈물과 콧물까지 흘린 채 울상을 지은 녀석을 보고 있자니 욕지기가 일었다.
“크허허허. 내 손. 으어어.”
남천휘는 사령신의 턱을 걷어찬 후 튕겨나가는 놈의 옷자락을 낚아챘다.
파팟!
그 순간 사령신은 인벤토리로 사라졌다.
남천휘는 다시 상념에 잠기려다 혀를 찼다.
“젠장! 산통 다 깨졌네.”
결국 즉묵노주를 꺼냈다.
요즘 들어 맨날 술이야.
저 새끼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앞으로도 더 남이라고 생각하고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패야겠다.
“그나저나 요즘 포인트 쌓이는 속도가 둔화된 것 같다?”
‘성소는 개발이 되거나, 인지도가 올라갈 때 포인트를 생성합니다. 대두동이나 대화동의 경우 발전 가능성과 성장 가능성이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곡부남가 또한 새로운 퀘스트를 통해 등급을 올리지 않는 한 더 이상의 포인트 채굴을 어려울 듯합니다.’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재이는 평소와 달리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으로 남천휘의 반문을 원천봉쇄했다.
“쯧,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는 없잖아. 요즘 남위기에 갱신되는 정보를 보면 무언가 일어나고 있어. 서장에서 시작된 혈겁이 우후죽순 격으로 퍼져나가는 듯해. 무림대회가 코앞인데 포인트가 없으면 곤란하다고. 방법이 없을까?”
남천휘의 물음에 재이는 지금까지의 포인트 획득 방법을 정보창에 띄웠다.
역시 남위기였다.
“성소가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면 새 성소를 얻으면 되는구나!”
남천휘는 금맥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환호성을 내질렀다.
“좋아! 백파신공부터 완성하고, 성소를 모으러 떠나자!”
무림대회 삼일 전.
남천휘는 빠르게 짐을 꾸렸다.
무림대회에 참가하기 위함이 아니다.
예정 보다 빠르게 대두동을 떠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백파신공의 성장이 멈췄다.
본래 5성에 이른 후 가파르게 성장할 것이라 여겼다. 하나 며칠 째 사령신을 베고, 또 베었어도 숙련도는 상승하지 않았다.
‘사령신으로 5성, 괴겁천마로 5성인가?’
‘그게 아니라면 지금 상태로는 5성이 한계인가?’
전자는 애초부터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후자일 터였다.
장소를 바꿔야 했고, 수련법도 바꿔야 했다.
그렇기에 가장 가까이에 있을만한 성소를 찾아 떠나려는 것이다.
지도를 확장했다.
하나 산동과 강소, 절강 쪽에는 획득 가능성 성소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삼성의 방파들이 곡부남가에 굴종한 이상 자동으로 성소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들의 비밀 창고를 제 것처럼 쓸 수 있으니 재화와 포인트는 차고 넘쳤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부족했다.
‘상대는 괴겁천마라고.’
그리고 일원으로 확인된 흑천괴뢰와 마천종의 수하가 더해졌다.
“포인트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띵띵띵띵띵-
남천휘는 재이가 펼쳐놓은 지도를 보며 침음을 내뱉었다.
“이 중에서 역사가 짧고, 퀘스트 많은 곳을 선별해봐.”
성소의 위치를 나타내는 붉은 점이 한순간에 사라졌고, 특정 지역의 방파가 등장했다.
“하북 장가구로 시작해서 산서성의 오태산으로 이어지는 최단 거리를 표시해줘.”
띠링-
◎ 축지지책이 가능한 최단 거리가 표시됩니다.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땅따먹기 하는 기분인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