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287화 (287/305)

129, 오늘도 내가 천하제일.

129, 오늘도 내가 천하제일.

하루 만에 강소성을 지났다.

무한상사의 지소를 지날 때마다 말과 마차를 바꿨고, 홍택호에서 가장 빠른 쾌속선을 타고 태호에 이르렀기에 가능한 쾌거였다.

그리고 절강성에 이르렀다.

제아무리 시스템의 힘으로 표시되는 지도라고 해도 성과 성의 경계가 표시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강성임을 알 수 있었다.

재이의 알림 덕이다.

◎ 행정 구역 상 ‘절강성’에 진입했습니다.

이상했다.

지금까지 산동을 벗어난 적이 없지 않거늘 이와 같은 알림은 처음이다.

그 이유가 금세 드러났다.

◎ 숨겨진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백파도 남추의 생전 영상이 등록됩니다.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이와 성시를 치료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참이다.

한데 절강성에 발을 들인 것만으로도 영상이 등록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할아버지가 절강성에서 뭘 한 건가?’

일단 보고 얘기하자고.

◎ 현재 등록 영상은 1회용입니다.

- VR을 통해 영상이 재생됩니다.

안개가 밀려오겠지.

그리고 낯선 광경이 펼쳐질 것이다.

이제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등장하는 VR에 적응이 된 듯했다.

하나 오산이었다.

남천휘는 시야가 까맣게 물드는 순간 고막을 찢을 것처럼 울리는 굉음에 미간을 좁혔다.

콰콰콰콰콰콰콰쾅!

동시에 몸이 아래로 빠르게 추락했다.

생경한 경험에 내공으로 운신을 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다. 아니 애초에 몸뚱이는 통제권을 빼앗긴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으으.’

바람 소리가 이렇게 위협적으로 들린 적이 있을까 싶다. 추락하는 속도가 빠른만큼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 소리를 맹렬했다.

이내 사방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

동시에 누군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익숙한 어투는 재이가 분명했다.

낙하지점, 좌표설정, 보호막, 충돌 대비.

바람 소리를 뚫고 간간히 들려온 단어였다.

‘거대한 무언가가 추락하는 건가?’

이내 엄청난 충돌로 인해 몸 전체에 부하가 걸렸고, 눈과 귀는 제 역할을 상실한 것처럼 평소와 달랐다.

‘으으으.’

남천휘는 자신이 VR을 재생했던 공간이 마차 위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상을 썼다. 자칫 영상 재생이 끝나면 길바닥을 구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익숙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완전히 축이 뒤틀렸군. 이런 경우가 있던가?”

백파도 남추의 목소리다.

이내 문을 연 것처럼 어둠 속에서 사각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빛 너머로 보이는 풍광은 특별할 것이 없다.

산과 들, 나무와 꽃, 푸른 하늘이 전부였다.

하나 남추는 태어나서 평범한 풍광을 처음 본 사람처럼 탄성과 함께 말을 잇지 못했다.

“아······.”

남천휘는 한참동안 남추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그러던 중 이질적인 무언가를 느꼈다.

남추의 복장은 눈이 부실만큼 번쩍거려서 형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한데 점차 빛무리가 사그라지더니 평범한 무복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저간?’

마치 재이가 ‘재이의 상점’에서 옷을 갈아입던 것과 비슷했다.

남추는 조심스럽게 흙 위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아이처럼 한참을 웃으며 날뛰기 시작했다.

한데 요란스런 행동이 산신의 화를 불렀던 것일까.

갑작스레 호랑이의 포효가 울렸다.

‘할아버지에게는 강아지나 마찬가지지.’

남천휘는 코웃음을 쳤다가 이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남추가 호랑이를 잡아봤자 신기한 일도 아니다.

하나 눈 깜짝할 사이에 가죽을 벗겨서 옷처럼 입고 들어설 줄 어찌 알았으랴.

“이거 호랑이야! 호랑이. 보던 것과 똑같이 생겼네. 너도 실물은 처음이지?”

남천휘는 가죽을 쓰다듬는 남추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이때의 남추는 앳된 기색이 역력했다. 일견하기에도 성시와 비슷한 연배가 아닐까 싶다.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떨어졌다니······.’

남추도 재이와의 대화는 심상에서 이뤄졌으리라.

그렇기에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도 괘념치 않았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여기저기서 불이 들어왔고, 무언가 작동하는 듯한 기음이 울렸다.

지잉- 지잉- 지잉-

동시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공간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여 명이 동시에 뛰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넓은 공간과 주변에는 형형색색의 빛을 뿜어내는 불꽃으로 가득했다.

‘이건 뭐하는 곳이야?’

어쩌면 시스템이 존재하는 장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남천휘는 시골에서 갓 상경한 사람처럼 내부를 구경했다. 한데 그 사이 남추가 재이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미소를 지었다.

“일주일이면 수리가 끝난다고? 그럼 돌아갈 수 있는 건가?”

칠주야(七晝夜) 후에 떠난다고?

남천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껏 그는 남추의 영상을 몇 개나 시청하지 않았던가. 그 중에는 하루 이틀 사이에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건도 많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남추는 남천휘의 속내를 알 리 없기에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칠일 동안 뭘 할까? 기왕 이렇게 됐으니 관광이라도 해 볼까?”

그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출발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는 변명을 하듯 말을 덧붙였다.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그냥 휴가라고 생각하자.”

그는 기괴한 동혈 밖으로 나가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어디라고? 산동. 좋았어. 길 좀 띄워봐.”

남천휘는 남추의 혼잣말을 멍하니 지켜볼 뿐이다.

어차피 재이, 아니 재이나와 대화를 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남추의 행동보다 그가 남긴 말을 되새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

남천휘의 물음에 대꾸한 건 남추가 아니었다.

재이의 기계적인 알림이 이어졌다.

◎ 재생이 완료되었습니다.

- 현재 영상은 5초 후 삭제됩니다.

*

“봉화도 우리보다 빠르지는 않을 거예요!”

천수련은 절강성에 발을 들이자마자 고향에 돌아온 사람처럼 미소를 되찾았다.

“천응검후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지?”

마이의 얼굴은 혈색을 되찾은 지 오래였다.

성시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절강 정벌대’는 마차 한 대에 모여 앉은 상태였다.

천수련은 쓴웃음을 지었다.

“보타암에 계세요.”

“천목십이회를 설득하시는 게 아니라?”

“대화가 통할만한 방파를 몇 번이나 찾아다니셨어요. 하나 한 쪽의 마음을 겨우 사로잡으면 남은 열한 곳이 몰려와 설득을 하지요. 그런 방식으로 반복이 되니 스승님께서 많이 지치셨어요. 잠시 보타암을 둘러보러 가셨다고 하더군요. 아마 보타암에서 천목십이회를 설득할만한 물건이라도 찾고 싶으신 듯해요.”

성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목십이회는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습니다. 방계끼리 혼인을 하고, 친족끼리 사업을 하지요. 그렇기에 한 곳을 건드리면 다른 하나가 합공을 합니다. 저 또한 예전에 절강에서 작은 싸움을 한 적이 있었는데 큰 곤욕을 치렀지요.”

연하연이 천수련을 손을 맞잡은 채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천응검후께서 평안하시다면 언제고 천목십이회의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천수련은 빙긋 웃었다.

“고마워. 동생.”

“동생은 아니고요.”

“쳇, 도의를 아는 여인이라면 이럴 때 좀 져주는 맛이 있어야 해.”

“천 소저한테 맛보이고 싶지 않아요.”

마이는 두 여인이 농을 주고받으며 경직된 분위기를 풀자,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하, 회주도 있고, 우리도 있잖소. 잘 될 거요.”

성시도 가볍게 말을 이었다.

“만약 천응검후를 돕는 이들이 있었다면 벌써 해결됐을 문제입니다. 우리가 왔으니 이제 검후께서도 한시름 놓으실 겁니다.”

오공은 혀를 날름거리며 손을 비비적거렸다.

당장이라도 칼을 뽑고 싸우려는 듯 투기를 끌어냈다.

“빨리 천응검후께 연통을 하시지요. 그분이 오신다면 저희가 멋지게 뒤를 받치며······.”

천수련이 슬쩍 오공의 말을 끊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회주의 방식대로 처리한다면서요. 사 군사가 술 마실 때마다 하소연을 한다는 그 방식인가요?”

남천휘는 잠시 상념에 빠져 있다고 탄성을 흘렸다.

“아! 당연하지. 우리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고.”

연하연이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저도 이야기만 들어봤기에 조금 기대가 되요.”

싸움을 기대하는 여인이라니.

조금 두근거렸다.

남천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검흥주가부터 가자.”

다른 이들은 별 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나 절강을 고향으로 둔 천수련이나, 경험이 있는 성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흥주가라면 소흥에 있는 방파잖아요.”

“맞습니다. 항주 남쪽의 소흥에 있으니 절강의 중심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마이가 침음을 내뱉었다.

“적의 중심부에 들어가는 꼴이 아닌가. 조금 전에 막간산을 지났으니 그쪽부터 해결하는 것이 어떤가?”

사람들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마이의 말에 동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절강의 북부에 위치한 막간산은 전설의 명검인 간장(干將)과 막사(莫邪)가 만들어진 장소였다. 그렇기에 막간산의 동서에는 각기 절강성으로 진입할 수 있는 목길이 존재했다.

“막간산의 동서를 관리하는 천장문과 막아방부터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마이의 말처럼 천장문(千將門)과 막아방(莫牙幇)은 천목십이회 내에서도 약한 축이다.

하나 남천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소흥부터 갑시다. 오늘 천하에 이름을 날린 소흥주가 얼마나 맛있는지 맛을 봐야겠어요.”

다른 사람의 말이었다면 만류하거나, 무시했으리라.

하나 남천휘를 겪어본 이들은 쇠바늘에서 꽃을 피운다고 해도 믿을 터였다.

“가자!”

“가자!”

“갑시다!”

“클클, 소흥에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벌써부터 매우 궁금하구려.”

그렇게 마차는 남쪽으로 빠르게 질주했다.

*

검흥주가(劍興酒家).

이름처럼 절강성 소흥에 위치했고, 술을 팔아 재화를 충당하는 방파였다. 하나 절강의 요처 중 한 곳인 소흥에 터줏대감이라는 것만으로도 경계하기에 충분했다.

검흥주가의 가주는 삼두룡패검이라 불리는 소자경이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절정의 고수가 되었고, 뛰어난 상재도 지녔다. 그렇기에 불과 삼십 년 만에 이름 없는 주조장(酒造場)을 천목십이회의 한 축으로 키워냈으리라.

그는 여섯 명의 제자를 모두 절정고수로 만들었다.

그리고 천하에 손꼽히는 소흥주를 팔아 만든 재화로 많은 고수를 초빙했다. 그렇기에 천목십이회 내에서도 중상에 속할 만큼 성세를 이뤘다.

검흥주가에 속한 무인만 삼백 명이 넘었기에 호사가들은 오대세가가 부럽지 않을 것이라 평가했을 정도였다.

어제까지는 그랬다.

“아으으으.”

검흥주가주인 소자경의 독문병기였던 용중패검은 반토막이 난 채로 연무장을 나뒹굴었다. 하나 주인의 몰골에 비하면 차라리 나은 편이리라.

소자경은 얼굴이 퉁퉁 부은 채 손발을 떨며 경련을 일으킬 뿐이다. 간간히 신음을 흘리는 것으로 보아 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나 누구도 소자경을 돕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금을 들여 초빙한 고수는 모두 도망쳤고, 제자들과 수하들은 어딘가 한 곳이 부러진 채로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마치 가을에 추수를 한 후 짚단을 널어놓은 듯한 형세였다.

남천휘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연무장과 대전으로 이어지는 계단 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깎은 것처럼 반듯한 바위가 놓여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검흥주가의 초석인 듯했다.

“여기에 앉아 볼까?”

남천휘는 제 집 안방인 양 바위에 앉은 채 소흥주를 내려놨다. 금박을 한 유지로 밀봉된 것으로 보아 최고급 소흥주가 분명했다.

뽁!

그는 백룡도로 구멍을 뚫은 후 동이 째 들이켰다.

“쯧, 구관이 명관이라지. 나한테는 즉묵노주가 더 맞는 것 같아.”

오공은 검배에 손을 올린 채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돕기 위해서 뭐라도 해보려는 순간 번쩍번쩍 하더니 모든 것이 끝났다.

“회주, 몇 놈 도망쳤는데요.”

“응, 일부러 보낸 거야. 그래야 다른 열한 곳이 동시에 달려들지 않겠어?”

마이는 술을 홀짝이며 탄성을 흘렸다.

“허허, 회주의 방식이 이런 거였소? 호쾌하기로는 고금을 통틀어 최고라 칭송받을 수 있겠어.”

연하연이 슬쩍 다가와 앉았다.

“저도 한 잔 주세요.”

그녀는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입을 살짝 댔다.

“저도 즉묵노주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이건 끝 맛이 별로네요.”

천수련도 질세라 달려들어서 술잔을 가득 채웠다.

마이와 성시가 부어라, 마셔라 하는 사이에도 오공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멀뚱히 서 있을 뿐이다.

‘술판이라니. 술판이라니.’

그는 검흥주가의 가솔들이 도망간 방향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회주,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겁니까?”

남천휘는 잠시 허공을 응시한 후 말했다.

“음, 3시간 43분 정도 이러고 있을 거야.”

오공은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뭐라는 거야? 벌써 취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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