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1 대 100. (2)
*
아수라장이어야 했다.
일천 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맞부딪쳤다.
적아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아지경의 상태로 싸워야 마땅했다. 고금을 통틀어 대규모 회전은 늘 그런 방식으로 이뤄졌다.
한데 중지봉 혈투는 달랐다.
“남화대주가 적의 삼중 밀집 대형을 뚫었습니다.”
“남목대주가 좌측 적의 매복을 격파했습니다.”
“남금대주가 우측 적을 기습하여 공터를 선점했습니다.”
“남수대가 선봉인 남화대와 합류했습니다.”
사마의는 쉴 새 없이 전달되는 소식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눈으로는 전장을 살폈고, 귀로는 갑자기 들려올 주인의 전음을 기다렸다.
“남화대 전진! 남목대는 좌측의 협곡을 확보하여 적의 지원을 방비하라! 남금대는 공터에 진지를 꾸려 후속대가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하라.”
“존명!”
황의 무복을 걸친 사내가 달려 나갔다.
사마의의 주변에는 황의 무복을 걸친 자들이 즐비했다. 저들이 남금대의 대원으로 정보 수집과 상황 파악, 그리고 명령 하달을 책임졌다.
그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중지봉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왔다.
평소였다면 오랜 독서로 인해 안력이 흐릿했을 터였다. 한데 중지봉에 들어선 이후 정확하게는 남천휘가 떠난 이후부터 시계가 맑았다. 마치 안력이 상승하여 전황을 또렷하게 파악하는 가능했다.
‘흐음, 이건 아니겠지?’
사마의는 중지봉 곳곳에서 벌어지는 기사를 목도하며 침음을 흘렸다. 그가 상념에 잠긴 사이에도 보고는 계속됐다.
“백룡대와 흑린대가 좌측 산길을 뚫고 중지봉 팔부 지점을 확보했습니다.”
창월대와 칠야대가 우측을 확보하여 포위망을 완성했다는 보고도 이어졌다.
“현월사대와 남오행대의 포위망이 완성되면 빠르게 좁힌다!”
사마의의 명령에 남토대의 무인이 달려나갔다.
그의 뒷말은 말을 자처하는 자만이 들을 수 있었다.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 버리겠어.”
사마의는 입꼬리를 올렸다.
어중간한 자비를 베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강호는 백 년 간 정파의 세상이었기에 전면적으로 싸움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주변 방파의 눈치를 봐야 하고, 멀리는 무림맹을 신경 썼기 때문이다.
사마의는 최근 들어 곡부남가의 위세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느꼈다.
평화의 시기에는 성장에도 한계가 있는 게다.
그렇기에 기회를 기다렸다.
혈풍이라는 이름의 기회.
‘광혈오주만큼 뒤끝없는 피바람이 어디 있으랴.’
그는 슬쩍 한쪽 눈을 찡그린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쩌면 정말 하늘이 돕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깃발이 올라왔습니다!”
사마의는 서역에서 큰돈을 주고 구입한 천리경으로 정상을 살폈다.
정상 주변에 세 개의 깃발이 펄럭인다.
“시작하라!”
*
혈인교주는 일각 넘게 표정을 굳혔다.
“얼마나 남았냐?”
“삼백 명 조금 넘게 남았습니다.”
“적은?”
수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혈인교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짜증을 삼켰다.
“물러가라.”
사실 물을 필요도 없고, 들을 대답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혈인교주 역시 절벽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땠어?”
그는 수족인 혈룡팔부 중 한 명에게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개개인은 저보다 훨씬 약합니다. 교도 서넛이면 해치울 수 있습니다. 저 또한 한 명씩 해치운다면 서른 명도 가능합니다. 한데 다섯 명 정도만 뭉쳐도 상대하기가 곤란합니다. 무엇보다······.”
“지금 머뭇거릴 시간 없어!”
“놈들은 지치지 않습니다. 아니 지치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립니다. 방금 전까지 어깨를 늘어트리고 헐떡거리던 놈이 내력이라도 주입받은 것처럼 다시 날뜁니다. 게다가 놈들은 대규모 회전을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시야가 넓어요. 저 놈들에게 뭔가 있습니다. 분명 사술을 쓰고 있을 겁니다.”
혈인교주는 수하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멍청한 새끼야! 사술을 쓰는 건 우리지. 사술에 대한 건 우리가 최고라고. 사파의 지존으로 군림했던 우리가 사술에 당한다는 게 말이 돼?”
“그게 아니면 설명할 길이······.”
수하는 답답함을 숨기지 못했다.
혈인교주는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미뤄두듯 화제를 전환했다.
“부교주는 도대체 왜 안 오는 거야?”
“전서구를 보냈으니 곧 적의 후미를 공격할 겁니다.”
“닥쳐! 조금 전에도 그 얘기를 했잖아.”
“죄송합니다.”
여덟 명의 혈룡은 초조함을 숨기지 않았다.
적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진격했다.
그로 인해 혈인교와의 거리가 삼십 장 이내로 좁혀졌다. 이제 두어 개의 둔덕과 작은 협곡만 빼앗기면 적과 전면전을 벌여야 했다.
혈인교주가 미간을 좁혔다.
“이상하지 않냐?”
혈룡팔부가 이목을 집중했다.
“아니, 이상하잖아. 우리에게는 계집이 있어. 남천휘의 계집이 있단 말이야. 그러면 저 놈들은 더 급하게 움직여야 해. 아니면 더 은밀하게 움직였어야했지.”
“다른 계집도 있다고 하던데요. 설마 저 계집은 놀이개였던 걸까요?”
혈인교주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니야. 생각해 봐라. 곡부남가는 짧은 시간 엄청난 성장을 이뤘어. 하지만 신공부나 황보세가를 바탕으로 성장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했을 게다. 명숙이나 고수를 끌어들이기도 쉬웠을 게야. 하나 놈은 곡부남가를 강화했어. 그만큼 자신의 것을 챙긴다는 의미다. 그러니 놈이 계집을 포기했을 리 없어.”
“그럼 적의 동향은 확실히 이상하군요.”
혈룡팔부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교주, 설마 백인잔결노가······.”
모두가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던 ‘배신’이라는 두 글자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적은 잔결대노가 서찰을 보내기 전 이곳을 기습했습니다. 게다가 백인잔결노는 계집을 끼고 돌 뿐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요.”
쾅!
혈인교주의 옆에 있던 나무가 산산조각 난 채로 흩어졌다.
“광혈오주에 속한 잔결대노가 배신할 리 없다.”
하나 그의 눈동자에는 의심의 빛이 진하게 맺혀 있었다.
“노옹! 노옹!”
만독노옹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잔결대노에게 가봐야겠소. 함께 가시겠소?”
“좋네.”
혈인교주의 청을 만독노옹은 흔쾌히 수락했다.
만에 하나 백인잔결노가 배신을 했다면 자신의 독이 무효화된 것도 납득할 수 있게 된다.
‘내가 펼칠 독을 알고 있다면 해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말고는 말이 되지 않아. 누군가 배신자가 있는 게야!’
만독노옹의 눈동자가 녹빛으로 일렁였다.
백 년 전부터 광혈오주라고 묶여 불렸지만, 개개인의 친분은 없다시피 했다. 오히려 사령신의 관심을 받기 위해 경쟁하던 사이였다. 그렇기에 그는 배신의 진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핑계거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단 계집부터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네.”
혈인교주가 만독노옹의 속내를 모를 리 없다.
‘능구렁이 같은 노괴로다! 함께 해서 좋을 것이 없어.’
하나 지금은 오월동주의 복심이 필요했다.
“갑시다!”
*
백인잔결노는 백 명으로 이뤄졌다.
다만 백인잔결노에 속하고 싶은 자들은 수두룩했다.
몸이 불편한 이들은 좋지 않은 시선을 받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것이 일상이다. 하나 백인잔결노에 속한다면 그 모든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가능했다.
사람을 죽이고, 여인을 취하고, 재물을 빼앗는 모든 행위를 밥 먹듯이 할 수 있는 게다.
승자가 되는 기분.
백인잔결노는 늘 그러한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평소에는 쳐다볼 수도 없는 미인이 눈앞에 있을 때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클클, 피부가 아주 백옥을 갈아 만든 것처럼 하얗군. 피 색깔은 어떨까 모르겠어.”
“새빨갈 것이야. 내가 많이 봤거든. 야! 건드리지는 마라. 대노께서 아시면 하나 남은 네 팔이 아니라 머리를 자르실 거다.”
“끄응, 알고 있어. 윗분들이 건드릴 때까지는 충분히 참을 수 있다고.”
중지봉 정상 부근의 주인 없는 암자에서 들려온 대화의 일부였다. 암자 내에는 백여 명에 이르는 잔결노가 무규칙하게 퍼져 있었다. 이들에 있어서 법칙이란 오직 하나였다.
- 대노의 명령에 따른다.
그것을 제외하면 무슨 짓을 해도 간섭을 받지 않았다.
반면 암자 밖에 모인 다섯 명의 표정은 어두웠다.
잔결대노와 수십 년을 함께 한 네 명의 잔두(殘頭)였다.
“대노, 어쩌시렵니까?”
“흐음.”
“혈인교가 밀리고 있던데요. 조만간 저쪽에서 도움을 청할 겁니다.”
“흐음.”
“제 계집을 내세워서 무슨 수라도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빌어먹을! 인질이 있는데도 저렇게 달려드는 걸 보면 혹시 쓸모없는 년이 아닐까요?”
“······.”
“헤헤, 일단 저 년에게 천당의 맛을 보여준 후 생각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네 번째 잔두인 일교(逸敎)는 어린 시절 나무에서 떨어진 후 머리가 이상해진 놈이다. 모든 욕념이 사라지고, 색욕만 남은 것처럼 여인을 밝혔다. 다만 잡념이 없으니 살인에 대한 재능이 출중해졌기에 수하로 삼은 게다.
“중사는?”
첫 번째 잔두가 산 위를 가리켰다.
“산 정상에 계십니다. 혹여 하늘과 접선이라고 하고 계신 건 아닐까요?”
잔결대노는 인상을 썼다.
그는 잔두들과 달리 사마천세 시절을 살았던 노괴다. 그렇기에 하늘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수하의 말이 얼토당토않음도 알고 있었다.
하나 수하의 그릇한 믿음을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지금은 놈들의 맹목적인 충성이 필요했다.
‘이상하군. 이상해. 계집을 인질로 잡은 이후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 심지어 무극중사까지 별 다른 대처를 하고 있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어.’
일교는 몸이 달았는지 엉덩이를 들썩였다.
“하아, 저 미친놈들이 먼저 건드리면 안 되는데······.”
그러던 중 암자 내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안 돼!”
잔결대노를 비롯하여 네 명의 잔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씨벌, 어떤 새끼가 먼저 건드렸나 보네.”
일교는 벌떡 일어나 암자로 달려갔다.
잔결대노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여인을 양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떤 새끼가 허락도 없이 먼저 맛을 봐?”
쾅!
일교는 암자의 문을 걷어찼다.
하나 기세 좋게 달려갔던 것과 달리 머뭇거렸다.
“어.”
암자 내에는 구십오 명의 잔결노가 있어야 했다.
한데 한 명이 늘었다.
멀끔하게 생긴 놈이 잔결노 한 명의 멱살을 쥔 채 계집의 앞을 막아선 게다.
잔결노가 제일 증오하는 부류였다.
“너 뭐야?”
“남천휘.”
일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애시당초 호북성에 있어야 할 놈이다.
만에 하나 놈이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다고 해도 산 아래 있어야 마땅했다.
“날개도 없는데 여기를 어떻게?”
빡!
“쓸데없는 소리.”
잔결대노가 뒤늦게 도착하여 일교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리고 기형곡도를 뽑으며 남천휘를 향해 턱짓을 했다.
“네 놈이 남천휘라고?”
“그래.”
잔결대노는 입꼬리를 올렸다.
“잘 됐구나.”
“뭐가?”
“수백 명이 몰려와서 어떻게 해야 하나 했었지. 한데 대어가 스스로 그물에 들어왔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으랴.”
남천휘는 피식 웃었다.
그러다 이내 주춤거리며 몸을 움츠렸다.
“야! 내가 갑자기 나타나지 말라고 했지? 응? 뭐라고? 진짜!”
잔결대노를 비롯한 잔결노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미친놈인가?’
반면 남천휘는 갑자기 등장한 재이와 대화를 주고받던 중이다.
“그럼 줘봐.”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재이는 양 손으로 허공에 큰 네모를 그렸다.
띠링-
《1 대 100》
- 사랑하는 그녀를 구하라.
- 인간 이하의 악귀들에게 신의 철퇴를 선사하라.
- 성공 조건 : 백봉 연하연 구출.
백인잔결노의 전멸(0/100)
- 실패 조건 : 연하연의 사망. 잔결노 도주.
※ 성공 시 잔결노 1인 당 100점의 VIP 포인트가 지급됩니다.(제한시간 00:15:00)
남천휘는 헤죽 웃었다.
부족했던 VIP포인트를 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 이 가뭄의 단비 같은 놈들.”
촤라라라락-
남천휘의 반대편 손에 백룡도가 등장했다.
한데 무기의 형태가 평소와 달랐다.
기다란 쇠막대기에 철구가 달렸고, 철구에는 뾰족한 가시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일단 백 점!”
빠각!
남천휘는 멱살을 쥐고 있던 잔결노의 머리를 후려쳤다.
◎ 철퇴는 단지 비유에 불과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