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276화 (276/305)

124,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124,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괴겁천마는 육신을 버리고, 혼백으로 남아 작은 동굴에 갇혔다.

사령신은 혼백을 버리고 천하를 떠돌았다.

하나 괴겁천마는 앉아서 천하를 눈 아래 뒀고, 사령신은 제 몸조차 건사하지 못했다.

일원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좌사와 우사는 손과 발이 되었고, 중사는 눈과 귀가 됐다.

그렇게 좌사와 우사는 알고 있을 터였다.

무극중사(無極仲使)는 괴겁천마를 대신해 천하를 지켜보고, 괴겁천마의 말을 전하는 자라고 여겼으리라.

틀리지 않다.

다만 무극중사에게 한 가지 역할이 더 있었을 뿐이다.

그는 괴겁천마의 그림자였다.

좌사와 우사가 불멸과 불사를 탐하는 것과 달리 오직 북해빙궁의 복수만 원할 뿐이다. 그렇기에 괴겁천마에서 한 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바로 광혈오주(狂血五主)의 생사여탈권이다.

사령신의 수족을 자처했던 이들은 미치광이가 된 주인을 버린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모르게 귀겁천마에게 귀의했다.

“중사를 배알합니다.”

무극중사는 자신 앞에 꿇어앉은 세 명을 내려다봤다.

첫째는 중경 지방에서 만 명 이상의 양민을 제물로 바친 혈인교주(血人敎主)였다. 혈인교주는 사령신의 십대무학을 세 가지나 전수받았다.

“중사를 배알합니다.”

둘째는 사지가 멀쩡하지 않은 자들이 모인 잔결방의 후예 중에서 골라낸 정예였다. 백인잔결노(百忍殘缺奴)라 불리는 백 명의 괴인은 혈무사혼권을 전수받았다. 사령신과 다른 점이라면 이들은 권법을 몸으로 펼쳤다. 동귀어진(同歸於盡)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미치광이들인 셈이다.

“중사를 배알합니다.”

셋째는 유일하게 홀로 꿇어앉았다.

백발은 세월의 흔적을 더하여 잿빛으로 변했고, 구멍이 여기저기 뚫린 장포는 개방도를 방불케 했다.

하나 그의 얼굴은 본 자는 거지라고 놀릴 수 없으리라. 자색 얼굴에 붉은 눈동자, 검은 입술은 곧 만독노옹(萬毒老翁)의 상징이었다. 신마대전 당시 사천 당문을 홀로 잿더미로 만든 대마두였다.

무극중사는 자신 앞에 고개를 조아린 세 명의 광혈주를 보며 침묵했다.

저들은 모두 신마대전을 직접 겪었다.

백수십 년을 살아왔으니 저들의 심후한 내력은 검증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무극중사를 앞에 두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놓쳤다고?”

세 명의 광혈주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혈인교주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옆구리를 반쯤 잘라서 잠시 경계를 게을리 했습니다. 갑자기 방해꾼이 나타날 줄은······.”

무극중사는 괴겁천마의 대리인이니 부끄러울 리 없다. 오히려 괴겁천마의 노기를 불러일으켰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혈검신의 마이를 놓쳤다고요?”

쿵!

혈인교주는 흙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교주를 신처럼 여기는 교도들이 본다면 경기를 일으킬만한 광경이다. 하나 혈인교주는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고개를 조아릴 뿐이다.

“송구합니다. 태산의 험준함이 예상 외였습니다.”

무극중사는 미간을 좁혔다.

“하늘께서 그대들에게 원하는 건 단 하나입니다. 천마신의의 행방. 그것을 알고 있는 자가 바로 마이요. 그대들이 잡아 죽인 혈검신의가 죽기 전에 토설한 것이니 거짓은 아니겠지. 그럼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소?”

“마이! 마이를 잡아오겠습니다.”

백인잔결노의 수장인 잔결대노가 기회를 틈 타 외쳤다. 혈인교주는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으나, 실패한 마당에 할 말이 있을 리 만무했다.

“방법이 있는가?”

잔결대노(殘缺大奴)는 체구에 비해 커다란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외쳤다.

“놈과 가까운 계집을 잡았습니다. 마이는 도망치는 와중에도 계집을 구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만약 다른 혈검신의가 억지로 끌고 가지 않았다면 분명 잡혔을 겁니다.”

무극중사는 침음을 내뱉었다.

“끌고 와라.”

잔결대노는 슬쩍 눈치를 보더니 수하에게 손짓을 했다. 체구가 비정상적으로 큰 사내가 여인을 들쳐 업고 들어섰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연하연이라는 계집입니다. 봉황곡의 곡도였는데 혈검신의와 함께 곡부남가에 머물고 있는 듯합니다. 이 년을 미끼로 마이만 불러내겠습니다. 놈들은 아직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 년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분명 혼자 찾아올 것입니다.”

무극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이다.”

“반드시 마이를 생포하겠습니다!”

잔결대노와 혈인교주가 뒷걸음질 치며 물러갔다.

무극중사는 홀로 남은 만독노옹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한 마디를 건넸다.

“일어나시오.”

만독노옹은 별다른 대꾸 없이 흙을 털고 일어났다.

“일을 어렵게 처리하시는구려.”

“무슨 의미요?”

무극중사의 말에 만독노옹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 몸에게 맡기면 우물과 하천을 통해 백여 종의 독을 살포할 수 있소이다. 넉넉히 삼일이면 곡부남가에 살아 있는 것이 없을 게요.”

“곡부남가에 적을 둔 무인의 숫자만 해도 천이 넘소. 만에 하나 마이가 모든 것을 버려둔 채 그들 속에 숨는다면 어찌할 텐가? 무엇보다 천마신의의 행방을 아는 건 마이가 유일해. 그러니 그는 반드시 살려야 하는 거요.”

만독노옹은 여전히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크흠, 노부가 독에 정통했지만, 의술과 방술 또한 뒤지지 않소. 한데도 천마신의가 꼭 필요한 게요?”

무극중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만독노옹의 눈동자에 질시의 빛이 맺혔다.

결국 질투인 것이다.

마(魔)의 천마신의와 사(邪)의 만독노옹.

백 년 전부터 이어진 대립이기도 했다.

무극중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자였다면 기세로 눌러서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리라. 하나 만독노옹은 광혈오주에 속했으나, 자신과 뜻이 같았다.

불멸과 불사보다 괴겁천마의 재림을 더욱 중시했다.

그러니 만독노옹은 괴겁천마가 새로운 몸뚱이로 활개 치는 모습만 볼 수 있다면 뭐가 됐든 좋았다.

“만에 하나!”

만독노옹이 눈을 빛냈다.

“남천휘가 무당산에서 돌아온다면 이번 일에 개입할 수도 있소. 아니 조금 전의 계집 때문이라도 개입할 게요. 그 때가 된다면 그대의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소.”

만독노옹은 할 일이 생겼다는 것에 기쁜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하늘께서 필요로 하는 건 마이일 뿐, 현월회주가 아니니까.”

무극중사는 먼저 돌아섰다.

그리고 산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정상에서 모든 것을 지켜볼 요량이었다.

그는 눈이 녹아 진창이 된 산길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흰 눈이 내리지 않고, 붉은 꽃은 밭을 이뤘으니 털옷을 벗고 앉아보네. 입김마저 없는 뜨뜻미지근한 날씨는 고향의 것이 아니거늘······.”

시를 읊조릴수록 눈앞의 풍광은 흐려졌고, 이내 새빨갛게 물들었다. 천 년의 세월 동안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던 북해빙궁은 무너졌고, 한파에도 상의를 탈의하고 몸을 자랑하던 궁도들은 하나 같이 시체가 되어 얼음판 위를 나뒹굴었다.

“겉으로만 착한 척하는 쓰레기들.”

조만간 하늘에서 불벼락이 내려와 더러운 정파 놈들을 쓸어버릴 터였다.

“하아.”

흥분을 했기 때문일까.

입술을 비집고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북해의 것과는 온도부터 달랐지만, 왜인지 모르게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불멸? 아니지. 파멸이다.”

*

남천휘는 곧장 곡부남가로 들어섰다.

재이가 정보를 취합하는 시간을 허투루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회주!”

“오셨습니까!”

가솔들은 남천휘가 등장하자, 굳은 표정을 풀었다.

곡부남가의 가솔들은 짧은 시간에 비하여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다. 하나 경험의 부족은 성소 포인트나 은자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할 터였다.

“어디지?”

“이쪽입니다.”

사마의가 구르다시피 달려나오더니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남천휘는 의당에 들어서는 순간 미간을 좁혔다.

누운 자가 둘, 서 있는 자가 하나.

전자는 마이와 성시였고, 후자는 오공이다.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홍칠은?”

사마의는 말없이 고개만 살짝 흔들었다.

남천휘는 소리 없이 심호흡을 했다.

‘죽었다고? 죽어?’

그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특기 ‘불굴’이 자동으로 활성화됐다. 그만큼 마음의 동요를 숨기기 어려웠다.

남천휘에게 있어서 혈검신의란 은공이라는 두 글자로 설명할 수 있었다. 성시는 연하연을 이끌고 청도문까지 왔으며 마이와 홍칠은 그들을 지켰다.

만약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남천휘는 연하연을 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칠야대와 창월대보다 더 귀한 영약과 기보를 건넸다.

심지어 성시는 연하연이 친오라비처럼 여기는 사내였다.

그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래도 홍칠이 보이지 않는 이 광경은 너무나 낯설었다.

술을 좋아하고,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며, 쉴 새 없이 떠들던 사내가 바로 홍칠이다.

그것이 남천휘가 알고 있는 홍칠의 전부였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하연이부터 챙깁시다.’

그는 하늘에 있을 홍칠에게 사과한 후 병상을 향해 다가갔다.

“회주.”

남천휘는 억지로 일어나려던 마이를 다시 눕혔다.

“괜찮으세요?”

“아직 살아 있네.”

마이는 마이동풍이라는 별호처럼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유들유들한 표정을 지운 채 연거푸 한 숨을 내쉰다.

남천휘는 혈인도를 띄웠다.

다행히 마이와의 신뢰 관계는 더욱더 끈끈해진 상태였다.

“뼈가 부러지고, 혈맥이 다쳤습니다. 당분간 움직이시면 안 될 것 같네요.”

마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도 홍칠이 이야기는 들었지.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지금 당장!”

하지만 남천휘가 내력을 흘려낸 이상 마이는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전후사정을 얘기해주세요. 그게 먼저입니다.”

마이는 아랫입술에 피가 배어나올 만큼 강하게 물어뜯으며 말을 이었다.

천마신의의 표식을 발견했고, 약속된 장소로 향했단다. 태산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크게 우려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혼자라면 언제든지 몸을 빼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했다.

한데 예기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

때마침 혈검신의 성시와 연하연이 태산 초입의 은신처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는 게다.

그리고 홍칠과 오공이 나타났다.

홍칠은 성시를 찾아갔다가 처소가 빈 것을 확인하고 곧장 마이를 뒤쫓은 게다.

마이가 그들을 탓할 사이도 없이 습격이 시작됐다.

적의를 걸친 무인들이 숲속에서 피의 물결처럼 쏟아져 나왔다.

“우리 중에서 가장 호전적인 녀석은 본래 성시야. 연 소저 때문에 넙죽 엎드리고 살았을 뿐이지. 그래서 가장 먼저 달려들었고, 저 꼴이 되었어.”

남천휘는 맞은편 침상에 누워 있는 성시를 살폈다.

왼 팔은 팔꿈치 어림에서 잘려나갔고, 전신에 자상이 가득했다. 기식(氣息)이 고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마이보다 큰 상처를 입었을 터였다.

대화는 불가능했다.

“난전이었어.”

성시는 길을 뚫으려 했지만, 오히려 포위당한 채 위기에 빠졌다. 그러니 연하연은 뒤를 받치러 뛰어들었고, 마이와 홍칠이 합류했다. 하나 적의 숫자는 기백에 이르렀고, 앞장섰던 성시가 팔을 잘렸다.

“연 소저가 쓰러지는 성시를 대신해서 칼을 받아냈네. 홍칠이 그 사이 성시를 빼냈고, 나 또한 옆구리를 잘렸지. 그리고······.”

마이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연 소저가 끌려갔네. 나는 그녀를 구하러 달려들었고, 결국 홍칠이 내 대신 칼을 맞았어.”

그는 신음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미안하네. 연 소저가 자네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어. 나로 인해 위험에 빠졌으니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군.”

남천휘는 마이를 눕히며 말했다.

“아직 살아 있어요.”

마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진짜인가?”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재이가 검색을 끝냈고, 미연시 위치 추적기가 발동했다. 그리고 태산의 중심부에서 노란 빛이 반짝였다.

“제가 데리고 올 겁니다.”

“나도 가겠네.”

남천휘는 표정을 굳힌 채 마이를 제지했다.

하나 마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침상 옆에 놓인 광목을 당장이라도 허리에 둘둘 감을 기세였다.

“나로 인해 시작된 일이야. 내가 가야 하네.”

“누워계십시오.”

“아니야.”

남천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누워계시라고 했습니다. 명령입니다.”

“뭐?”

마이는 예기치 못한 대응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까지는 곡부남가에 적을 두고 있잖습니까. 그리고 현월회의 명부에 이름을 올렸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구하고, 제가 죽일 겁니다.”

남천휘의 눈빛은 태양처럼 강렬하게 번뜩였다.

마이는 그것을 지켜보다가 어깨에 힘을 뺐다.

“대신 눕지는 않겠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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