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나는 너를 찾을 것이다. (2)
*
곡부는 태평성대를 누렸다.
어진 임금을 만나지는 못했으나, 곡부남가로 인해 양민들은 매일 같이 노래를 불렀다.
늦은 밤의 골목길도 두렵지 않았다.
곡부남가의 무인들이 순찰을 돌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문을 걸어잠그고 잠을 청하지 않았다.
곡부남가의 무인들이 순찰을 돌았기 때문이다.
양민들은 마음 편히 생업에 종사했다.
상인과 표사들은 곡부남가의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긴장의 끈을 놓았다. 칼 위를 걷는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낭인들조차 곡부남가에 들어서면 칼을 거뒀을 정도였다.
남천휘가 성소를 통해 끊임없이 포인트를 주입한 결과 곡부남가의 무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이제 남천휘가 없더라도 신공부와 황보세가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사마의와 소혜의 조합은 업무의 영역을 무한대로 늘리는 것이 가능했다.
매일같이 수많은 상단과 거래를 시작했고, 수많은 무인들을 가솔로 받아들였다.
이제는 빈객의 숫자만 해도 백을 넘겼고, 소속 무인의 숫자는 천여 명에 이르렀다.
당금 강호에서 단독으로 십여 개의 타격대를 운영할 수 있는 곳은 구파오가를 제외하면 없다시피 했다.
가솔들의 무공 수준을 논한다면 구파조차 따를 수 없으리라.
“오늘 치 영약입니다!”
아침에는 혜소가 두 대의 수레에 영약을 싣고 와 무인들에게 제공했다. 저녁이면 무진철원의 감찰단주인 유설옥이 찾아왔다.
“유 단주! 오셨습니까?”
“오늘도 고생이 많으십니다.”
유설옥의 등장에 하루 종일 땀을 흘렸던 무인들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고, 헝클어진 무복을 가다듬었다.
“유 단주!”
그녀는 비록 미연시의 벽을 넘지 못했으나, 피 끓는 청춘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정도는 됐다.
그녀는 청년들의 시선을 즐기며 말했다.
“부탁하신 검과 도를 가져왔어요.”
사마의는 소혜를 힐끔 바라 본 후 예를 갖췄다.
“소 원주께 큰 신세를 지는군요.”
유설옥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원주께서 현월회주와 약조하신 걸요.”
그녀의 말처럼 소용녀는 무진철원을 무사히 접수했다. 철신의 재주를 고스란히 체득한 그녀의 등장에 전임 원주는 기꺼이 무진철원을 돌려줬다. 그리고 그녀는 남천휘와 약속한 대로 헐값에 질 좋은 무기를 제공했다.
곡부남가의 무인들은 내외로 천하를 통틀어 으뜸이라고 자부할만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니 하루가 다르게 강성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살펴 가십시오.”
사마의는 유설옥을 떠나보낸 후 나직이 읊조렸다.
“아까 양대안을 보니까 입이 귀에 걸렸더이다. 하나 한 여인을 마음에 품은 이 사마의는 공적으로만 대했지요. 너무 감격하실 필요는······.”
그는 어느새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소혜를 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어디까지 들은 걸까?”
시동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살펴 가시라는 말을 하실 때였습니다.”
“아, 그래. 알려줘서 아주 고맙다.”
“헤헤, 저는 사 군사의 수족인 걸요!”
사마의는 자신의 허리춤도 오지 않는 어린 소년을 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쳇, 어린 녀석이 되바라져서 말대꾸나 하고 말이야.’
하나 그렇다고 해서 못살게 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남천휘가 떠나면서 남긴 말이 귓가에 선연했다.
- 자네의 신산이 8이라면 저 녀석은 4야. 그러니까 잘 키워보라고.
신산과 숫자의 의미는 모르겠지만, 잘 키우라니 잘 키울 수밖에 없다.
사마의는 바쁘게 움직이는 가솔 사이를 지나 처소로 향했다. 그러던 중 내원의 월동문 근처를 지나다가 걸음을 멈췄다.
손을 가릴 만큼 펑퍼짐한 학사의를 걸친 무리였다.
저들은 냉혹한 검술과 신의라 불릴 만큼 뛰어난 의술을 자랑했다. 그리고 범재의 수준을 뛰어넘는 학식까지 갖췄으니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재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터였다.
하나 저들은 하는 일이 없다.
그저 가주 대리인 남천홍의 처소 근처를 하루종일 배회하며 한량처럼 시간을 축낼 뿐이다.
‘안타깝군.’
사마의는 입맛을 다셨다.
그와 같은 군사는 능력 있는 자를 그냥 두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부려먹어서 더 많은 결과를 내고 싶어 했다.
하나 저들에게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천마신의의 후손만 아니었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혈검신의 마이가 사마의를 보고 멀리서 포권을 했다. 사마의 또한 마이에게 공손하게 손을 모은 후 한 숨을 내쉬었다.
“흐음, 안타깝다. 안타까워.”
등롱을 들고 앞장 서던 시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서에 이르기를 상열지사는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 군사께서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심기가 상할까 걱정이 됩니다.”
“이 놈아! 아니야.”
사마의가 주먹을 쥐고 흔들자, 시동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저는 언제나 사부님의 편입니다.”
“이 놈의 자식은 저 불리할 때만 사부지.”
혈검신의 마이는 멀어져가는 사마의와 시동을 보며 빙긋 웃었다.
“보기 좋은 사제지간이로구나.”
검을 점검하고 있던 오공이 입꼬리를 올렸다.
“사제지간의 격이 없음을 따지자면 사부님과 저도 뒤지지 않지요.”
마이는 혀를 찼다.
“쯧쯧, 살수였다는 녀석이 왜 이리 경망스러운 게냐.”
“살수 수업만 받았을 뿐 살행은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소우주는 어느 정도나 느끼게 되었느냐?”
오공은 뒷짐을 진 채 등을 보이고 있는 사부를 보며 나직이 한 숨을 내뱉었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마이동풍이라는 별호가 너무도 잘 맞아떨어졌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말이야.’
하나 마이가 슬쩍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오공은 공손한 자세로 대꾸했다.
“단전에서 시작하여 임맥과 독맥을 따라 소우주를 그리고 있습니다.”
“잘하고 있다. 임독맥의 타통이 끝난다면 네게도 우주류검술을 전수해주마.”
마이의 말에 오공은 언제 투덜거렸다는 듯 헤벌쭉 웃었다.
“헤헤, 감사합니다. 한데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내야 하는 겁니까?”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고, 편안한 잠자리에서 잠을 청할 수 있다. 뭐가 더 필요한 게냐?”
오공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눈치 보여서 그렇지요. 어찌됐든 연 소저가 회주와 가까운 사이잖습니까. 경쟁자나 다름없는 천 소저는 검후라는 뒷배를 뒀지만, 연 소저는 우리 밖에 없다고요.”
마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뭐라도 돕고 싶은 게냐?”
“공짜 밥만 먹을 수는 없잖습니까.”
“지금은 공짜 밥을 먹는 것으로 족하다.”
마이는 무릎을 슬쩍 굽혔다가 폈다.
그것만으로도 일장 높이의 나무에 오를 수 있었다.
“곡부남가 전체에 드리워진 활력을 보아라. 나는 지금껏 악인을 처단하고, 병자를 치료했다. 거기까지였어. 하지만 회주는 세상을 바꾸고 있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회주가 깨끗하다고, 무조건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야. 다만 그는 세상을 올바른 쪽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되고 있으니 더더욱 놀랍지 않느냐?”
“운이 좋군요.”
마이는 오공의 투덜거림을 탓하지 않았다.
제 사부가 천하에서 으뜸이라고 믿는 마음을 어찌 탓할 수 있으랴.
“소림도, 무당도 이러 풍광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회주에게는 명분과 힘, 그리고 돈까지 충분해. 그럼에도 군림하지 않고, 지존으로 그치니 참으로 본받을만한 존재란다.”
“그런 것 같습니다.”
마이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한데 말이야. 저처럼 새하얀 비단에 먹물을 떨어트린다면 어떻겠느냐?”
“설마 우리가 먹물이라는 겁니까?”
“사마천세로 인하여 신마대전이 벌어졌고, 정사마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마도의 무공을 익힌 것이 숭배 받는 세상은 아니란다.”
오공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천마신의께서는 신마대전도 반대하셨다고 하셨잖습니까. 마도를 수습하여 백도와의 공존을 꿈꾸셨다면서요. 그리고 신마대전 이후에는 약자와 병자를 도왔다고 했습니다. 강남 의술의 총본산이라는 성의림의 수백 명보다 더 많은 사람을 살렸다면서요. 그런데도 그분을 적대시하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마이는 혀를 찼다.
“도대체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살수가 되려고 했는지 모르겠구나.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네 마음만 같다면 싸움과 반목이 왜 생기겠느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타탓-
마이는 오공의 곁에 내려앉으며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회주가 돌아올 때까지 곡부남가의 직계를 지키는 것. 이것이 회주와의 약속이었다. 깊이 개입한다면 곡부남가의 흠이 될 수도 있어. 그러니 지루하더라도 참거라. 회주가 돌아오면 혈검신의가 그러했듯 천하를 떠돌며 재주를 뽐내자꾸나.”
오공은 강호를 종횡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 듯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그 전에 임맥타통을 끝내야 한다.”
두 번째 알았다는 대답은 왜인지 모르게 기운 빠진 목소리였다.
“형님! 형님!”
마이는 미간을 좁혔다.
사제인 홍철이 시뻘개진 얼굴로 달려왔다.
“너! 대낮부터 또 술을······.”
평소였다면 대사형을 피해 도망치기 바빴을 그였다. 하나 그는 황급히 다가오더니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말을 이었다.
“이것 좀 보세요. 사조, 사조의 흔적입니다.”
마이는 홍철에게서 종이를 받아든 후 미간을 좁혔다. 종이에는 삐뚤삐뚤한 필체로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 환자를 진료하는 동안 또는 진료과정 이외에도, 사람들의 삶에 관하여 보고 들은 모든 정보를 외부에 알리지 않고, 비밀을 지키겠노라.
오공은 곁눈질을 하다가 탄성을 흘렸다.
“헙! 이건 조사께서 의술을 알려주실 때 신신당부하셨다던 선서 문구가 아닙니까.”
마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천마신의께서 혈검신의를 모아놓고 가장 먼저 내려주신 가르침이었다. 이것은 천하에 오직 천마신의와 혈검신의에게만 공유되는 것이야.”
그는 굳은 표정으로 홍철에게 종이의 출처를 질문했다.
“누군가 저자에 수백 장을 뿌렸어요. 누군가 우리에게 존재를 알리는 것이라고요.”
마이는 손가락을 헤아린 후 되물었다.
“형제들의 위치는 알고 있느냐?”
“장성을 넘어간 녀석도 있고, 해남도까지 내려간 자도 있어요. 어차피 혈검신의는 산동과 절강을 중심으로 움직이니 우리가 전부겠지요.”
“전대 혈검신의는 모두 죽었다. 그렇다면 이건 혈검신의가 보낸 것은 아닐 터······.”
홍철은 흥분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천마신의께서 출관하신 걸까요?”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두 사람이 고민에 빠진 사이 오공이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가짜일 리는 없겠지요? 제가 저자의 영웅담을 많이 봐서 아는데 이런 식으로 음모를 많이 꾸미더라고요.”
마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래쪽에 표식이 있다. 우리에게만 전해지는 표식이야. 가봐야겠다.”
홍철은 당연하다는 듯 마이를 따라 움직였다.
“너는 이곳에 있어라. 전후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상 모두 자리를 비워서는 안 돼.”
“성시도 있잖습니까. 저도 가겠습니다.”
마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녀석은 안 돼. 연 소저의 곁을 떠나지 않는 녀석이다. 괜히 심란하게 만들지 말고 일단 함구해라.”
*
비가 온다.
봄이 코앞이거늘 여전히 겨울비가 내리는구나.
하지만 남천휘에게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막을 펼쳐놓은 까닭에 빗물은 옷에 닿지 않은 채 튕겨나갔다.
‘고수라서 행복해요.’
재이가 슬쩍 옆에 나타나 충고를 했다.
‘주인님, 이런 식으로 내력을 소모하는 건 권장하지 않습니다.’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진저리를 쳤다.
말을 타고 달리는 자신을 허공에 둥둥 뜬 채 쫓아오는 건 그렇다고 치자. 다만 빗물이 몸을 그대로 통과하는 광경은 목불인견이나 마찬가지였다.
‘야! 들어가. 들어가.’
남천휘는 재이를 쫓아낸 후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곡부남가의 지척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비가 그치지 않았다.
개구리가 울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그는 히죽 웃으며 품에서 세 가지 물건을 꺼냈다.
무당파에서 받아낸 세 가지 기물이다.
‘개구리 하나, 개똥이 하나, 제비 하나.’
그러지 않아도 재이에게만 옷을 사줘서 마음이 불편했던 참이다.
“셋이 한꺼번에 울면 곤란한데.”
남천휘는 가진 자의 여유를 만끽하며 말을 몰았다.
“점심은 집에서 먹자!”
하나 오래지 않아 말을 멈춰야 했다.
곡부남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칠야대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회주께서 돌아오셨다!”
“회주!”
남천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곡부남가로 돌아오는데 급급하여 성소의 정보나 지도의 상황을 살피지 않았다. 하나 곡부남가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경고음이 울릴 터였다.
“칠야대가 여기까지 순찰을 돌던가?”
낯이 익은 조장 한 명이 진흙탕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회주! 큰일 났습니다.”
아! 이런 분위기 정말 싫은데.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뭐야?”
조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연 소저가 납치됐습니다.”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짜증과 분노는 잠시 미뤄두고, 불굴부터 발동시켰다.
‘지도.’
곡부남가 인근의 지도가 눈앞에 등장했다.
‘산동성 전체로.’
지도가 확장되어 수많은 방파와 강산의 위치를 드러냈다.
‘성소 정보를 띄우고, 지금부터 조건에 맞지 않는 새끼들을 걸러낸다.’
◎ 성소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최대한 상세하게 검색 목록을 작성해. 포인트는 다 써도 좋아.’
남천휘는 시야 상단의 막대가 검게 물드는 것을 기다리며 이를 갈았다.
“살아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나머지는 다 죽여도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