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사주세요. (2)
남천휘는 여러모로 평범한 존재였다.
주루의 이층에서 물끄러미 저자를 지켜보자면 한 시진이 서넛은 볼 수 있을 만큼 무난했다.
그것은 성욕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지만, 그걸 얻기 위해 애쓸 만큼 근면한 성격도 아니었다. 게다가 천수련과 연하연의 미색은 천하에 손꼽힐 정도였다.
‘라고 미연시가 그랬잖아.’
그러다 보니 미인에 대한 기준이 범인보다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이는 예뻤다.
남천휘에게 있어서 아름다움과 예쁨이란 다른 의미였다. 아름다움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수가 있다. 예를 들어 꽃이 그럴 것이고, 그림이나 시회가 그럴 터였다. 반면 예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어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요망한 것이 저렇게 귀여울 줄 누가 알았을까?’
만약 무당의 고아한 도장들이라고 해도 재이를 보게 된다면 함박웃음을 지을 것이다. 당과라도 하나 쥐어주고 싶어서 사비를 털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남천휘가 홀리는 건 죄악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만 하는 일반적인 반응인 셈이다. 꽃을 보면 향기를 맡고, 그림을 보면 감상을 하듯 자연스러운 반응인 게다.
그래서 남천휘는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한 채 물었다.
‘뭐?’
이럴 때에는 놀라지 않고, 원래 사주려고 했었던 사람처럼 여유로움을 잃지 않아야 한다.
······.라고 책에서 그랬다.
한데 재이는 선택을 남천휘에게 미뤘다.
그렇다면 최소한 재이가 가리켰던 가판대 상부의 물건을 골라야 할 터였다.
‘저건.’
남천휘는 황색 바탕에 검은 무늬를 어지럽게 수놓은 의복을 바라봤다. 일견하기에도 진한 시대에 유행했던 의복으로 다양한 무늬로 유명했다.
한데 남천휘가 시선을 집중하는 순간 옷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너울거렸다. 그러더니 한순간 재이의 의복이 바뀌었다.
첫 느낌은 따스함이다.
온 몸을 꽁꽁 싸맸으니 한겨울에도 고뿔에 걸리지 않을 만큼 온기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재이 또한 옷깃을 여미며 배시시 웃었다.
‘따뜻하네요.’
그래, 그래 보인다.
혹시 모르니 축복받은 확인서를 사용했다.
《왕소군의 화의(華衣)》
- 진한 시대의 미녀 왕소군의 의복입니다.
- 북방으로 향할 때 착용했던 의복입니다.
- 검색 범위가 새외까지 확장됩니다.
- 새외 세력과 친화력 20% 증가.
- 번역률 15% 상승.
- 구매가 13000 VIP포인트.
역시 능력 수치가 붙어 있었다.
낡은 장의에 붙어 있던 수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하지만 통과.’
결코 꽁꽁 싸맸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지금은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옆에는 뭐지?’
화의 옆에 진열된 것은 의복이라고 하기 애매할 만큼 축 늘어져 있었다.
남천휘가 손가락을 튕기자, 재이가 옷을 갈아입었다.
마치 부호가 여러 종류의 비단을 늘어놓고 첩에게 갈아입히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나 남천휘는 위화감을 느낄 사이도 없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두 번째 옷이 왜 그렇게 볼품없어 보였는지 알겠다.
겉옷은 가슴골이 훤히 드러났고, 소매부분은 아예 매미날개처럼 반투명했다. 게다가 허리에 둘러야 할 요대를 가슴 아래까지 끌어올렸기에 고혹적인 느낌은 배가 됐다.
‘크흠.’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눈을 둘 곳이 없다.
‘이건 조금 부끄럽네요.’
재이가 얼굴을 붉히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가뜩이나 깊이 파였던 앞섬 부분이 색정적으로 느껴진다.
‘축복받은 확인서.’
일단 더듬거리지 않은 자신에게 찬사를 보냈다.
《귀비 양옥환의 나삼(羅衫)》
- 당대의 미녀 양귀비의 의복입니다.
- 시화가무에 대한 검색력이 상승합니다.
- 남성에 대한 정보 검색력이 상승합니다.
- 여인에 대한 정보 검색력이 하락합니다.
- 구매가 22000 VIP포인트.
속으로 욕이 절로 나왔다.
남천휘는 유림에 속했지만, 유림과 조금의 관련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시화가무(詩畵歌舞)에 대한 검색력의 상승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지금이라고 해서 안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다만 모든 능력이 20% 상승하니 왕소군의 것보다는 상급의 물품이다.
‘여자와 사이가 안 좋았나? 이러다가 개똥이나 제비와도 사이가······.’
남천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눈을 부릅떴다.
‘엇!’
연애를 미연시로 배우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실패할 확률을 줄여주니 예행 연습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 실전까지 시스템에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천수련이나 연하연에게 적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광 좋은 곳을 노닐거나, 저자를 구경한 적도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매일 같이 연무장에서만 만났네.’
그녀들에 대한 기억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수련이 끝난 후 땀에 젖은 얼굴뿐이었다.
새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주인님.’
남천휘는 갑작스런 재이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 이건 연애가 아니다!
백파도 남추의 숨겨진 비화를 엿보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남천휘는 재이의 눈을 마주하지도 못하면서 애써 되뇌었다.
‘이것도 통과.’
양귀비의 나삼은 눈요기하기에 좋을 뿐 지금 상황에서는 크게 쓸모가 없어보였다.
‘다음.’
이제는 익숙하게 손가락을 튕겨 옷을 갈아입힌다.
재이는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기에 남천휘는 처음의 목적을 되새기며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이럴 때 불굴이라도 발동해주면 참 좋을 텐데.
그렇게 시대와 미녀에 따라 각양각색의 의복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에 확 띄는 능력 수치를 찾아냈다.
‘아!’
이번만은 남천휘도 재이의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몸에 달라붙은 붉은 비단의 테두리는 금사로 장식했다. 그리고 몸의 굴곡에 따라 황금조각을 엮어놓았다. 체형이 도드라지는 것이 고혹적이기는 하나, 의복 자체의 아름다움도 상당했다.
《아직은 때가 오지 않은 기포(旗袍)》
- 새외의 이족이 착용하는 의복입니다.
- 향후 천하에 널리 알려져 유행할 의복입니다.
- 기포를 착용할수록 검색력이 상승합니다.
- 천하에 널리 알려질 의복이기에 모든 정보에 대한 저항력이 상쇄됩니다.
- 대상자와 관련이 있는 누군가가 좋아하던 의복입니다.
남천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의복이 성장형일 수도 있구나.’
상세 정보를 확인하니 검색 능력은 최초 10%에서 50%까지 상승한단다. 무엇보다 장막에 가려져 있는 정보 또한 제한 없이 검색이 가능했다. 그러니 절벽의 흔적을 마주한 남천휘에게 꼭 필요한 의복일 터였다.
‘하아, 설마 할아버지의 취향이 이런 쪽이었던가?’
기포는 나삼에 비해 몸매가 드러날 뿐 발목까지 늘어졌기에 색정적인 느낌은 덜했다. 오히려 활동적으로 보였고, 자유분방함이 느껴졌다.
남천휘는 할아버지와 조금 더 가까워졌음을 느끼며 가격을 확인했다.
‘아우! 뭐 이런 팔다 남은 자라 껍데기 같은 가격이 다 있냐?’
VIP 30000 포인트였다.
남천휘가 VIP등급 5단계를 열기 위해 모아야 했던 포인트가 무려 십만 점이다. 아마 사령신과 ‘도전! 황금종’이 아니었다면 쉽지 않은 도전이었으리라.
상태창을 열어 VIP 포인트를 확인했다.
‘54000.’
살 수는 있다.
하지만 VIP 포인트를 사용할 곳은 차고 넘쳤다.
이걸 사야 돼? 말아야 돼?
남천휘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했다.
‘저는 이 옷이 별로네요.’
재이가 남천휘의 눈치를 보며 옷을 벗었다.
적금에 황금으로 치장했던 기포를 보다가 낡은 장의를 보고 있자니 안쓰러움은 배가됐다.
‘사! 그걸로 사!’
남천휘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한순간 절반이 넘는 포인트가 자취를 감췄다. 단전의 내공을 절반 넘게 써도 이처럼 허탈하지는 않으리라.
하나 재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옷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저렇게 좋아하는데 사주자.’
게다가 남추의 비밀을 풀려면 기포만한 것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헤헤, 주인님의 취향은 이런 쪽이었군요.’
뭐라고?‘
기포(旗袍)가 취향을 논할 만큼 파격적인 의상은 아니잖아. 하나 재이가 상체를 비틀며 옆모습을 보여주는 순간 절로 입이 벌어졌다. 발목까지 가려주는 것처럼 보였던 치맛단이 펼쳐지더니 허벅지까지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말을 편하게 타기 위해서 갈라진 것 같네요.’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남천휘는 헛기침을 하며 속내와 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네.’
재이는 남천휘의 속도 모르고, 방년의 소녀처럼 깔깔 웃으며 말했다.
‘매일 이 옷만 입고 다닐 거예요!’
너 그 옷 밖에 없잖아.
하지만 이번에도 속내를 드러내는 대신 화제를 전환했다.
‘자! 빨리 이 절벽에 뭐가 있는지 알아내보자.’
‘네!’
남천휘는 절벽을 살피는 재이를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얼음장 같던 녀석이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모습이 우습기만 했다.
한데 남천휘는 재이의 뒷모습을 보다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재이의 신발은 여전히 짚을 엮어 만든 당혜가 아닌가. 그리고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고정한 것은 나뭇가지였다. 심지어 팔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의복 때문에 가냘픈 손목이 시선을 끌기도 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남천휘는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재이가 만들었던 가판대에 의복 말고 장신구가 있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제발······.’
*
진무성흔(眞武聖痕).
무당파의 제자들이 절벽에 남겨진 흔적을 칭하는 말이다. 마치 무당파의 개파조사인 진무대제가 현신한 것처럼 웅혼한 기세와 압도적인 파괴력으로 남겨진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당의 진인들은 진무성흔의 의미를 깨우치려고 무수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누구 한 명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장문인은 소리없이 침음을 흘렸다.
‘확실히 다르다.’
그는 선대의 고인들이 진무성흔을 마주했을 때의 기록을 읽었다. 어느 정도 무위를 갖춘 자라면 진무성흔을 앞에 두고 한 가지 반응만 보였다.
투지(鬪志).
범인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흔적이었다.
그렇기에 대항하려 한 것이다.
한데 남천휘는 진무성흔을 보는 순간 웃었다.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반가워했다.
‘사령신은 운으로 몰아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장문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남천휘를 의심하지 않고, 믿어준 것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했다.
‘하나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다.’
그는 이미 무림맹과 비경회 쪽으로 연통을 넣은 상태였다. 괴겁천마와 사령신의 과거 흔적만으로도 강호는 몸살을 앓았다. 한데 사령신이 죽지 않고 나타났으니 강호가 힘을 모아야 마땅했다. 사령신이 살아 있다면 괴겁천마 또한 생존했을 터였다.
하지만 남천휘는 한 명이다.
그러니 이 기회에 진무성흔을 보고 성장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었으면 좋겠는데······.’
장문인은 청송진인에게 손짓을 한 수 귀엣말을 건넸다.
“괜찮은가?”
“버틸만 합니다.”
“남 대협의 표정을 보아하니 무언가 건진 듯하군. 그러니 자네가 직접 호법을 서게.”
“사령신은 융중산을 벗어났을 뿐 호북성 내에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장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이 옳아. 적송팔검과 태극오제도 불렀네. 곧 그들이 자네의 뒤를 받쳐줄 것이야. 남 대협의 생사가 어떤 의미인지 알겠지?”
청송진인은 결연한 눈빛을 드러냈다.
“목숨을 다해 지킬 것입니다.”
장문인은 멀리서 남천휘를 지켜봤다.
“남 대협의 표정을 보게. 고뇌의 빛이 역력하군. 우리가 대신할 수 없을지언정 조금이나마 짐을 덜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무당의 제자라면 응당 그러해야지요.”
청송진인의 말에 장문인은 어깨를 다독이는 것으로 칭찬을 대신했다.
“나는 일단 호북의 방파들을 소집하겠네. 남 대협의 이름을 내세운다면 그 누구도 거절하지 못할 걸세.”
“그 누가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