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사주세요.
121, 사주세요.
반 년 전의 남천휘는 어땠을까?
돈 많은 유지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호의호식했다. 성격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배움의 깊이는 어디 가서 욕먹지 않을 정도에 불과했다. 무공을 익히기는 했으나, 체계적이지 않았다. 호신술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으리라.
그러니 남천휘와 비슷한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수백 명도 손꼽을 수 있을 터였다.
하나 지금은 달랐다.
산동성의 패주가 되었고, 이제 호북성에서도 비교할 자가 없다. 심지어 무림맹에서조차 남천휘를 염두에 두고 강호의 대소사를 결정할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강호의 절대악이라 치부하던 사령신마저 쫓아냈다.
또래는 물론이고, 강호를 통틀어 비견할 자가 없을 만큼 큰 위명을 쌓은 게다.
너무 장황하여 감이 오지 않는다고?
예를 들어 보자.
강호인은 눈빛만 마주쳐도 칼을 뽑을 만큼 호전적인 종자들이다. 그러니 오대세가의 직계 정도 된다면 하늘 아래 무서운 것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지간한 일은 스스로 처리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것으로 안된다면 지인이나 추종세력을 동원할 터였다. 심지어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가문의 위세를 빌려와 압도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남천휘와 충돌한다면 어떨까?
오대세가의 직계들은 한 목소리로 외칠 것이다.
“남!”
“천!”
“휘!”
그리고 고개를 조아릴 터였다.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꼬리를 살랑거리겠지.
만에 하나 주제도 모르고 가문의 위세를 빌려온다면 어떻게 될까?
“남!”
“천!”
“휘!”
가문의 가주가 직접 내실로 안내할 것이다.
그리고 좋은 술과 음식을 내어주고, 간과 쓸개라도 빼줄 것처럼 아양을 떨며 교분을 쌓고자 할 터였다.
이 모든 것이 사령신의 덕분이다.
남천휘는 사령신을 쫓아낸 것만으로도 같은 위치까지 명성을 끌어올렸다. 단순히 그와 겨룬 것만으로도 천하제일을 거론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하나 남천휘는 그런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이미 강호에 뜻이 있는 자라면 함께 하기 위해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고, 영웅과의 만남을 꿈꾸는 미인들은 수많은 밤을 독수공방하며 그를 기다리는 상황이 아니던가.
게다가 특기 ‘불굴’까지 지녔다.
한데 이번만은 불굴이 발동하지 않았다.
남천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아······.”
◎ VIP 5단계를 통해 새로운 자격이 생성됩니다.
- 시스템의 고급 보안 인가를 획득합니다.
- J.A.I.N.A에 대한 꾸밈이 가능해집니다.
- 메인 퀘스트 신마행에 대한 보조 기능이 추가됩니다.
그래, 저게 문제였다.
‘너 혹시 재이냐?’
잠시 여인의 형체가 출렁거리더니 한층 더 선명하게 변했다. 그리고 목소리도 예전과 달리 기계음이 아닌 사람의 음색을 띄는 것이 아닌가.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렇지 않지만, 주인님께서 변경한 명칭에 의하면 재이가 맞습니다.’
맞구나. 맞아서 더 문제네.
‘그런데 네가 왜 나타난 건데?’
‘VIP등급이 5단계에 이르면서 구체화에 성공했습니다. 앞으로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밀접하게 보좌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보좌는 좋지.
한데 가까이서 보좌를 하겠다는 말이 얼굴을 보이는 것과 무슨 관련일까?
애초에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무섭게끔.’
남천휘는 헛웃음을 지었다.
VIP 등급은 시스템과 별개로 운영되는 선물과 같았다. 초창기에 받았던 것을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내심 5단계가 열렸을 때 바라던 것이 있었다.
바로 새로운 심법이다.
비천무상도가 극에 이르렀으나, 여전히 용린쌍도의 보조 기능은 발동하지 않았다.
무려 50% 성능을 향상시켜주는 기능이 아닌가.
그렇기에 비천무상도를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무언가가 나타날 것이라 예상했다.
한데 재이가 나타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검색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지금껏 다루지 못했던 정보를 확인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결국 검색어는 남천휘가 찾아야 했다.
‘너를 꾸미라고?’
그 순간 손이 있어야 할 곳에 위치했던 안개가 뭉치더니 부딪쳤다.
저걸 박수라고 해야 돼? 말아야 돼?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뒤로 거대한 두루마리가 펼쳐졌고, 그곳에는 온갖 의복과 장신구가 가득했다.
평범한 옷, 화려한 옷, 특이한 옷까지.
그리고 여느 상점과 다름없이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또 VIP 포인트를 쓰라는 거야?‘
남천휘는 허탈함을 금치 못했다.
차라리 퀘스트를 통해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수정이라면 용인할 수 있었으리라. 반면 VIP 포인트는 얻기도 힘들고, 쓸 곳은 수두룩했다.
‘진짜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성소 포인트로 전환하거나, 특기 레벨을 올릴 때 사용할 수 있다. 정보를 검색할 때마다 소모됐고, 심지어 무기를 변환할 때마다 1000포인트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하아.’
남천휘가 한 숨을 내쉬자, 재이를 휘감고 있던 안개가 출렁였다. 마치 남천휘로 인해 안개가 흩어지는 듯한 형국이다.
‘이거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데?’
재이는 남천휘의 미심쩍은 한 마디에 도리질을 쳤다. 그럴 때마다 길게 늘어트린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출렁이기 시작했다. 새하얀 얼굴과 대비되는 머리카락에서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인걸요.’
얼씨구. 감정 섞인 목소리 봐라.
교태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나저나 안개가 흩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재이의 얼굴은 인세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아름다웠다. 안개에 휘감긴 체형 또한 고금의 미인들에게 뒤지지 않을 터였다. 하나 그래봤자 존재 유무조차 알 수 없는 시스템의 형상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남천휘는 개똥이와 제비의 미모로 단련한 사내였다.
그러니 S급 특기 불굴을 지닌 남천휘가 휘둘릴 까닭이 없다.
남천휘는 헛기침을 하며 가판대에 놓인 물품 중 하나를 가리켰다.
‘크흠, 그럼 저걸로.’
띠링-
◎ 800 VIP 포인트가 소모되었습니다.
- 조금 낡은 장의를 구매했습니다.
- 조금 낡은 당혜를 구매했습니다.
예뻐서 사주는 거 아니다.
그저 지금까지 도움을 받았으니 적선하는 셈치고 내줬을 뿐이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라?’
하나 재이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안개가 흩어지며 빛무리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남천휘의 앞에는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있는 재이가 존재했다. 장의를 입고, 당혜까지 신겨놓으니 영락없는 벽촌의 여아가 아닌가.
‘지금 마차에 앉아 있는 거냐?’
남천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어느새 미지의 공간은 사라졌고, 무당파의 제자가 몰고 있는 마차 내부였다. 그리고 재이는 남천휘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VR의 변형입니다. 증강 현실로 이해하시면 될 거예요.’
이해가 안 되는데.
남천휘는 재이의 짧은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자신에게만 보이는 광경이니 문제될 것은 없을 듯했다.
한데 예기치 못한 알림이 뒤이었다.
◎ 의복과 신발의 착용으로 인해 검색 속도와 검색 량이 0.1% 증가했습니다.
아! 꾸며주라는 의미가 이것이었던가.
좋은 것을 사주면 그만큼 능력이 향상될 터였다.
남천휘는 한 숨을 내쉬었다.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는 겪을수록 난해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할 터였다.
‘어쨌든 이번 퀘스트가 끝났으니 다음 퀘스트는 언제야?’
‘현재 대기 중입니다.’
‘신마행에 대한 보조 기능이 생겼다며?’
‘차후 확인이 가능합니다.’
이거 왠지 800 VIP 포인트를 날린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남천휘는 혀를 찼다.
‘됐다. 갑자기 네게 뭘 바라겠냐?’
사령신과 싸우는 과정에서 얻어낸 보상도 제법 짭짤했다. 재이와 끝없는 질답을 이어가느니 보상을 정리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자수정은 다시 삼만 개 정도 모였고, 그나저나 쓸모 없는 아이템을 모두 정리해야 하는데······.’
수십만 개의 자수정으로 회회회판을 돌렸더니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끙끙 앓던 중 밖에서 청송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주.”
남천휘는 갑작스런 청송진인의 방문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나 맞은편에 있던 재이는 언제 사라졌는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아! 현실에 덧씌워져서 진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 했지.’
남천휘는 천상의 기술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네, 말씀하세요.”
“잠시 시간을 빼앗아도 되겠는지요?”
청송진인의 존대가 부담스러웠지만, 그의 말처럼 이제는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괜찮습니다.”
남천휘는 마차 안으로 들어온 청송진인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그는 무당제일검이며, 도가문파에서 상징적인 위치를 맡고 있다. 한데 그처럼 고결해야 할 위인의 복장은 그대로였다. 피가 말라붙은 도복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조차 수습하지 않았다.
“아, 의관이 불결하여 죄송합니다. 제자들의 상태가 좋지 않아 힘을 보태야 했습니다.”
“무당의 도장들은 괜찮으십니까?”
청송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야지요. 그리고 괜찮을 겁니다.”
남천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무당산에 도착한다면 혈인도와 의술을 사용하여 도움을 주고자 홀로 다짐했을 뿐이다.
“본산에서 지원이 왔습니다.”
청송진인은 허락을 구한 후 달리는 마치의 문을 열었다. 남천휘는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가 탄성을 금치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당은 제갈세가에서 빌려온 마차와 수레를 탄 패잔병의 행렬이었다. 한데 어느덧 마차와 수레 주변으로 수십 명의 무당 제자들이 따라붙었다.
말을 탄 자도 있었고, 수레를 바삐 보는 자도 있다.
그리고 경공을 펼치며 따라붙은 자들이 하나둘씩 예를 표했다.
그 숫자가 무려 이백여 명에 이르렀다.
“무당파는 자소봉에만 위치한 것이 아닙니다. 무당산 곳곳에 퍼져서 각자의 방식대로 구도를 행하지요. 그렇기에 저들을 모으려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다행히 회주의 신위로 저들까지 피해를 입지는 않았군요.”
남천휘는 탄성을 흘렸다.
“허, 저 정도면 거의 전력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는 걸요?”
그도 그럴 것이 경공을 펼치는 자들은 태청구궁대진을 펼친 무당제자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아마도 검진에만 매진했던 제자들보다 각자의 능력은 한 수 위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사령신은 공적입니다. 함께 맞서야 하는 적이니 모두가 모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장문사형을 비롯해 몇몇은 무당산에 남아 있습니다.”
청송진인은 문을 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이제야 본론을 꺼내려는 듯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듯하군요.”
“신마대전 이후 강호 곳곳에 묘한 기물이 등장했습니다. 만든 것도 있고, 새겨놓은 것도 있고, 파묻은 것도 있지요. 아마도 제갈세가의 천주봉에도 그런 것이 있었던 듯싶군요.”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VR을 통해 남추의 손길이 닿았음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장문사형을 비롯한 몇몇은 그것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요?”
“방금 후발대를 통해 들은 소식입니다. 장문사형께서는 회주가 그것을 봤으면 하신다는군요.”
“그것이라면?”
청송진인은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흔적입니다.”
*
남천휘는 무당산에 오르자마자 장문인과 가볍게 인사만 주고 받은 후 어디론가 이끌렸다. 그리고 구름을 뚫고 치솟은 절벽 앞에 서서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이게 도대체 뭡니까?”
무당장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백 년 간 많은 사람이 매달렸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만든 사람만이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 전해졌지요. 그리고 그 사람이 사령신과 괴겁천마를 이긴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다.
남천휘는 눈앞에서 시작된 흔적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절벽을 깊이 파헤친 흔적은 구름이 휘감은 곳까지도 끊이지 않았다.
그런 흔적이 무려 수십 개였다.
신장이 강림하여 거대한 검을 휘두른다면 저런 흔적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강기를 저 위치까지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남천휘는 강기를 만들 수 있고, 탄강마저 펼칠 수 있다. 하나 강기를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트려 십여 장 이상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셋이다. 세 명이 만들어낸 흔적이야.’
보면 볼수록 탄성이 흘러나왔다.
인간이 만들어낸 신위라고 볼 수 없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장문인은 절벽을 마주한 이들의 모습을 자주 봤는지 말없이 지켜볼 뿐이다.
남천휘가 한참 동안 흔적을 바라볼 때였다.
띠링-
◎ 백파도 남추의 생전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재이가 구체화되어 옆에 섰다.
‘이게 무슨 소리야? VR 대신 흔적이라니?’
처음에는 새로운 무공의 단초인가 싶었다.
한데 재이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듯했다.
‘VR의 존재유무만 확인이 가능합니다. 현재 제 능력으로는 접근이 제한되어 있는 영상입니다.’
그녀는 그 말을 내뱉으며 낡은 장의를 슬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겨 다시금 가판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
재이는 슬쩍 얼굴을 붉히더니 가판대 상단에 놓은 비단옷을 가리켰다.
‘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