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네가 왜 거기서 나와?
120,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장내의 분위기가 묘했다.
무당파의 제자들은 목소리를 낮춰 대화를 나눴고,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던 세가의 빈객들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그리고 남천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반면 제갈세가의 가솔들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한 채 눈치를 봤다.
참으로 묘한 광경이다.
사마천세라 불렸던 암흑기의 한 축이자, 절대지경의 고수인 사령신이 도망을 쳤다. 신마대전 당시 사령신은 스스로 물러갔을 뿐 도주하지 않았다.
그만큼 절대적인 존재였다.
한데 그런 사령신이 패퇴했음에도 목소리를 높여 환호하는 이가 없다.
“후우.”
제갈학이 장탄식을 토해냈다.
흉중의 답답함은 곧 두려움이었고, 그것을 몰아내니 뒤늦게 머리가 맑아졌다.
그는 허리를 펴고 주변을 돌아봤다.
제갈세가의 가솔들은 모두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슬쩍 지팡이를 바꿔 잡았다.
손바닥에 맺힌 땀이 지팡이를 타고 흐를 정도였다.
텅!
철장으로 바닥을 찍어 이목을 사로잡았다.
본래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솥에 넣는 법이다. 하나 오늘의 사냥개는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자신이 솥에 처박힐 형국이 아닌가. 그러니 사냥 전부터 먹으려고 군침을 흘렸던 먹잇감을 처리하기로 했다.
“제갈표! 이 불의한 놈아! 수백 년 간 내려온 본가의 의기와 희생을 대악종에게 팔아먹어? 네 놈이 그러고도 사람이더냐?”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에 가득한 한 마디였다.
하나 가솔들은 이전과 달리 동요하지 않았다.
사령신이 직접 증언하지 않았던가.
그를 보며 괴겁천마의 졸자라 했고, 이후의 과정은 의심의 여지없이 변절자의 행태와 같았다.
그러나 제갈표는 오히려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한 걸음만 물러서면 천애절벽이 아니던가. 살기 위해서라도,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위해서라도 버텨야 했다.
“수십 년을 살고도 진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게요? 세상에 믿을 놈이 없어서 사령신의 말을 믿다니! 돌다리도 두들겨본 후 건너며, 확신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 제갈의 가풍이외다. 천하제일지가라 불리는 본가의 가솔들이 이처럼 분위기에 휩쓸릴 것 같소?”
“염치도 없는 놈! 이 상황에서도 혀를 놀리다니.”
제갈학은 치를 떨었다.
권세에 대한 욕망은 차처하고라도 제갈표의 대응은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가솔들은 들어라! 사령신은 재해다. 재해가 창궐하여 본가를 휩쓸었으니 일치단결하여 훗날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한데 가주 자리를 놓고 싸워야 하는 웃어른을 보며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아이고, 열사 나셨네.
남천휘는 제갈표의 열정적인 일장연설로 인해 상념에서 벗어났다.
가솔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령신의 한 마디에 좌지우지된다는 것도 이상한 노릇이다.
‘우리가 너무 쉽게 믿는 건 아닐까?’
‘사령신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는데······.’
제갈표는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깨닫고, 입꼬리를 올렸다.
“본래 악귀란 달콤한 말로 지자를 꾀어내 타락하게 만든다. 너희들은 사령신의 흉계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게냐? 놈의 검은 속내에 휘둘리지 마라!”
그는 당당했다.
제갈학이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그 때 냉랭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배신자 주제에 지랄하고 있네.”
예의와 범절을 한데 뭉쳐서 뻥 차버린 것처럼 신랄한 한 마디였다.
“사령신의 검은 속내? 흉계? 웃기는군. 신마대전 때부터 돌이켜봐도 사령신은 단 한 번도 머리를 쓴 적이 없다. 아니! 쓸 줄 모른다. 놈이 천주봉에서 내려와 거짓을 말한 적이 있는가? 제 힘만 믿고 날뛰는 사령신이 머리를 썼다고 우기다니. 웃기지도 않는구나.”
남천휘의 말이 이어질수록 제갈학의 표정은 밝아졌고, 제갈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무엇보다 혈천괴뢰의 수하들이 천주봉에 나타난 걸 어찌 설명하겠느냐?”
제갈표는 한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오직 그만이 천주봉의 출입을 허가할 수 있지 않던가.
“그, 그 또한 사령신의 말만 믿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더냐!”
남천휘가 기다리고 있던 반박이다.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천주봉 정상에서 사령신에게 쫓겼고, 중턱에서 암습하려던 혈천괴뢰의 수하들과 마주했다. 그 숫자가 백 명을 넘겼지. 지금이라도 천주봉에서 가서 확인해볼까?”
제갈표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남천휘는 자신의 뒷목을 가리켰다.
“혈천괴뢰의 수하들은 특정한 표식을 남긴다고 했지. 혈천괴뢰의 꼭두각시가 되겠다는 맹약의 일종이지. 여기에 사람을 뜻하는 대(大)자를 새겼어. 나는 천주봉의 시신에서 대자를 발견할 수 있다는데 전재산을 걸겠다. 너는 뭘 걸래?”
제갈세가의 문사들이 뒤늦게 탄성을 내뱉었다.
남천휘가 남위기에서 확인한 혈천괴뢰의 맹약은 제갈세가 내부의 기록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렇기에 제갈세가의 가솔들이 남천휘의 말에 신빙성을 부여했다.
“크흑.”
제갈표는 실핏줄이 터져서 시뻘개진 눈을 번뜩였다.
눈빛만으로 해를 입힐 수 있다면 남천휘를 갈가리 찢어발길 듯한 눈빛이다.
“크아아아아!”
그는 좌우의 무인들을 뿌리친 후 남천휘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너 때문에!”
콰직!
남천휘가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제갈표는 안면 전체에서 피를 쏟아내며 튕겨나갔다.
그가 지척에 이르렀을 때 팔황지존보의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니 제갈표는 경직으로 인해 남천휘의 일격을 고스란히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겠군.”
남천휘의 읊조림은 제갈표에 대한 판결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무도한 놈을 당장 포박해라!”
제갈학은 철장을 신경질적으로 몇 번이나 내리치며 말했다. 제갈세가의 가주가 뒤바뀌는 순간이거늘 모든 조명을 남천휘가 받는 형국이다. 사령신을 막아낸 것도 모자라 제갈세가의 적폐까지 홀로 해결한 셈이 되어버렸다.
‘범이 날개를 달았군.’
제갈학은 결심을 내리는 순간 잽싸게 표정을 관리했다. 수하로 둘 수 없다면 동료로 남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터였다.
“회주. 본가를 방문했다가 큰일을 겪으셨소이다. 조만간 새로운 가주가 추대될 것이니 차후 오늘 일에 대한 사과와 감사를 표시하겠소.”
짐짓 인자한 말투를 이어갔다.
“본가는 정마를 구분하기도 보다 절대적인 선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가문이외다. 그러니 회주와 앞으로도 함께 할 일이 참으로 많을 듯하구려.”
제갈학은 손자뻘인 남천휘에게 존대를 쓰면서도 조금도 인상을 쓰지 않았다. 그는 남천휘에게 슬쩍 다가가 귀엣말을 하듯 속삭였다.
“회주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가 아주 많소이다. 앞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잘 어울려 봅시다.”
그는 남천휘의 어깨를 다독이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남천휘는 제갈표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냉랭한 한 마디를 읊조렸다.
“늙은이가 미쳤나. 누구를 만지려고 해?”
제갈학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십 년 간 강호의 큰 어른으로 대접을 받아왔다.
심지어 가주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막강한 권세를 누려왔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이런 대접을 받은 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너, 너!”
“뭐?”
“지금 제갈세가를 적대하려는 것인가?”
남천휘는 불을 토할 것처럼 이글거리는 제갈학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너야말로 지금 나를 적대하려는 건가?”
“뭣이라?”
“산동성의 패주이며, 무림맹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비경회의 핵심 전력이 바로 나다.”
제갈학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
하나 남천휘는 뒤로 물러나려는 제갈학의 옷깃을 슬쩍 당기며 말을 이었다.
“사령신을 이긴 게 누구지? 네가 아니라 나다. 그리고 네 입맛에 맞는 가주를 세울 수 있게 된 것도 내 덕이야. 그런데 지금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고?”
제갈학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마 수치심 때문에 노기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으리라. 하나 보신의 일인자답게 현실에 대한 판단력을 잃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령신이 다시 나타난다면 누가 막을 건데?”
“크흠.”
남천휘는 나직이 읊조렸다.
“위군자 짓은 계속 하도록 해. 제갈세가의 대장이 되어서 하고 싶은 거 다하란 말이야. 무림맹에 영향력을 발휘해 이권도 챙기고, 죽기 전까지 권력이라는 놈을 꽉 잡고 버텨. 하지만······.”
잠깐의 침묵 이후 생각지도 못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내 앞에서는 눈깔아.”
눈빛과 눈빛이 마주쳤다.
찰나간의 대치를 끝으로 제갈학은 손자뻘인 남천휘의 시선을 피했다.
남천휘는 제갈학의 목례를 받은 것처럼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태상 가주께서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갈표라는 놈이 나쁜 거잖아요. 제갈세가 또한 큰 피해를 입었으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갈학은 자신의 상체를 일으키는 남천휘의 손길에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남천휘는 빙긋 웃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외쳤다.
“말학후배로서 한 손 보탤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포권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제갈세가의 가솔들은 뒤늦게 환호성을 내지르고, 박수를 쳤다.
강호의 신구(新舊) 무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광경처럼 보기 좋았던 게다.
“안 웃어?”
제갈학은 뒤늦게 억지 웃음을 지었다.
남천휘는 그런 제갈학의 웃음에 화답하며 말했다.
“연기 잘하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알겠소.”
그는 장내를 정리하겠다며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남천휘는 흔쾌히 보내주었다.
‘이쯤 했으면 제갈세가의 비처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겠지?’
그는 ‘3-3 퀘스트’의 보상으로 받은 상태였다.
이제 오늘 있었던 일이 호북성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다. 그리고 남천휘는 산동성 때와 마찬가지로 호북성 내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될 터였다.
‘보상을 정리해야 하는데.’
남천휘가 으슥한 곳을 찾으려는 사이 두 명의 도인이 다가왔다.
청송진인과 청일진인이다.
남천휘는 제갈학을 대할 때와 달리 예를 표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두 도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빈말이라도 괜찮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무당파 제자 중 스스로 거동할 수 있는 자는 서른 명 정도였다.
“회주의 공으로 사령신이라는 재해를 이겨낼 수 있었소이다. 무당과 정파 무림을 대신해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청일진인이 깊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청송진인은 한 쪽 팔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예를 잊지 않았다.
“회주,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남천휘의 흔쾌한 대답에 청송진인은 제갈세가의 가솔들을 살폈다.
“이곳은 어수선하니 오래 머물기 힘들 듯합니다. 본문으로 초빙하고 싶은데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진인의 표정을 보아하니 처음부터 계획을 한 듯했다. 아무래도 장문인의 명령으로 결과가 어찌됐든 무당파로 초빙을 하려고 했으리라.
사령신의 등장과 비경회의 대두.
백여 년 간 고요했던 강호라는 파도가 풍랑으로 인해 요동을 치는 시기였다.
그러니 깊은 대화를 하고 싶었으리라.
남천휘는 흔쾌히 수락했다.
“좋습니다.”
돈이나 무공을 달라는 것도 아니니 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지금 가시겠소?”
남천휘는 청송진인의 극진한 예를 받으며 손사래를 쳤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불편합니다.”
청송진인은 슬쩍 웃었다.
“익숙해지셔야 할 게요.”
내일의 남천휘는 오늘의 남천휘보다 훨씬 더 유명해 질 것이고,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일단 갑시다.”
무당의 제자들이 정비를 끝냈다.
죽은 자들을 수레에 실었고, 다친 자들은 저들끼리 부축하여 하산했다.
제갈학은 이동수단이 필요하다는 말에 흔쾌히 사두마차를 내주었다. 아무래도 남천휘가 없는 곳에서 세가를 재정비하고 싶을 터였다.
“피곤하실 테니 쉬시지요.”
두 진인은 한사코 마차에 오르지 않았다.
남천휘는 결국 홀로 마차에 탑승했다.
‘생각해보니 잘 됐는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남천휘는 상태창을 열고, 변화를 살폈다.
한데 지금껏 VIP 포인트의 부족으로 회백색이던 목록이 반짝이는 것이 아닌가.
◎ VIP 5단계로의 승급이 가능합니다.
- 승급하시겠습니까?(Y/N)
사령신과 한 번 싸우고, 얻은 것이 너무 많다.
남천휘는 희희낙락하며 승급을 수락했다.
한데 빛무리가 번쩍이는 가운데 시야의 테두리가 미연시처럼 떨어져나왔다.
마치 VR을 보듯 영상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안개가 뭉쳐들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안개가 사람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어! 이거 어디서 봤는데?’
어깨는 가냘프고, 허리는 잘록하다.
일견하기에도 여인의 체형이다.
‘아! 이거 예전에 그거잖아.’
처음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가 시작됐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재이는 안개의 형태로 뭉쳐들지 않았던가. 재이가 등장하려나 싶어서 멀뚱히 지켜보던 중이었다.
솨아아아아-
상체 쪽의 안개가 걷히며 아리따운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여인은 오랜 정인을 마주하듯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 주인님, 드디어 VIP 5단계에 이르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