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믿을 놈이 없구나.
119, 믿을 놈이 없구나.
남천휘는 황금종의 발동 시간 내에 팔황지존보의 숙련도를 30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환마소혼검법을 펼치고, 화살까지 쏘며 팔황지존보를 펼쳤다.
그 결과 아슬아슬하게 숙련도를 달성했다.
공교롭게도 비천무상도의 비천 단계도 숙련도 100을 찍었다. 백파도 남추가 VR로 남긴 비천무상도를 대성하는 순간이다.
하나 남천휘는 감흥을 느낄 여유도 없이 쏟아지는 알림을 확인해야 했다.
‘스킬! 스킬을 보자.’
◎ 비천무상도를 대성하셨습니다.
- 비천무상도는 공수를 아우르는 절학입니다.
- 비천무상도는 내외의 조화를 추구합니다.
- 그 결과 어떠한 충격이라도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건 설명만 들어도 떠오르는 것이 있다.
설마 반탄강기(反彈罡氣)?
만약 그렇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스킬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호의 고수들은 외공보다 내공을 중시했다. 내외의 조화를 추구하면서도 육신을 단련하기보다 내력을 쌓는데 집중하지 않던가.
외공을 익히지 않아도 육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호신강기(護身罡氣)였다.
내공이 극에 이르면 무형의 진기를 외부로 발출하여 장막처럼 몸에 두르는 것이 가능했다. 유형의 공세는 물론이고, 무형의 공세까지 튕겨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숭산소림의 금강불괴(金剛不壞)일 터였다. 뜻 그대로 ‘금강은 무너지지 않는다.’가 아니던가.
남천휘 역시 어느 정도 호신강기를 흉내 내는 것이 가능했다. 한 마디로 격이 맞지 않는 자의 공세는 막지 않아도 육신에 닿지 않을 정도였다.
‘반탄강기! 반탄강기를 다오!’
반탄강기는 호신강기의 윗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단순히 막는 수준을 넘어 반격하는 경지였다. 쉽게 말하자면 검으로 철판을 내리쳤을 때 자칫 잘못하면 튕겨나온 무위에 다치는 것과 같았다.
착하고, 어여쁜 재이야.
이번만은 심통을 부리지 말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결말을 보여 다오.
띠링-
◎ 새로운 스킬 ‘반탄강기’가 등록되었습니다.
- 일정 수준 이하의 모든 공세를 튕겨냅니다.
- 1회 발동 시 20년의 내력을 소모합니다.
떴다!
반탄강기의 소모 내력이 과하기는 하지만, 감수할 용의가 충분했다.
하나 기뻐하기에는 이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무가지보인 팔황지존보의 첫 스킬이 아니던가.
◎ 팔황지존보의 숙련도가 30에 이르렀습니다.
- 팔황지존보는 정과 반의 대립마저 포용합니다.
- 비교할 것이 없으니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 첫 스킬 ‘군림천하(君臨天下)’가 등록됩니다.
스킬 명칭만 들어도 천사강림이 떠올랐다.
군림천하 역시 절대적인 힘으로 타인을 압박하는 것이 가능했다. 천사강림이 지역으로 위력을 발휘한다면 군림천하는 오직 한 사람에게 위력을 보였다.
“군림천하!”
남천휘가 군림천하를 읊조리는 순간 전신에서 피어난 무형의 기파가 사령신의 전신을 옭아맸다.
“큽!”
사령신은 처음으로 난색을 표했다.
세 개로 갈라졌던 눈동자가 품(品)자 형태를 잃고 일그러졌다. 남위기로 군림천하를 살피면 마교주의 독문무공인 천마군림보나 소림의 항마공인 항마능가공이 가장 먼저 검색됐다.
하나 남천휘의 무공은 정마를 가리지 않았다.
정에게는 마의 위력을, 마에게는 정의 위력으로 발현됐다. 음양의 조화를 꾀하기 위하여 저절로 발휘되는 위력이었다.
한순간 사령신의 동선이 제약됐다.
남천휘는 그 순간 용린쌍도로 받아냈던 사령신의 권강을 그대로 돌려줬다. 핏빛 강기가 쌍도에 맺히는 순간 채찍처럼 전방을 찢어발겼다.
촤아아아아악!
사령신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앞가슴을 파고든 혈강기가 낯설지 않았다.
“크흑!”
진득한 핏물이 갈라진 상의를 비집고 번졌다.
혈맥을 파고드는 내력의 정체는 일견하기에도 혈강기가 확실했다.
지잉-
사령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통으로 인하여 인상을 쓴 것이 아니다.
고통으로 인하여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낯설지 않다.’
아주 오래 전 지금과 같이 자신의 혈강기를 고스란히 돌려받았던 기억이 존재했다.
남추였다.
지난 날 자신을 산혼자 만들 때 꾀어내기 위한 비책이 서서히 떠올랐다. 일부러 천사강림 내에서 고통스러운 척 연기를 했고, 남천휘와 마찬가지로 피까지 토하지 않았던가. 그 때에도 사령신은 기고만장하여 남추를 몰아붙였다. 그 후의 기억은 여전히 가물가물하여 안개 속에 있는 것 같다. 하나 짧은 기억만으로도 모래를 씹은 것처럼 입안이 텁텁했다.
“아! 거지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사령신은 가슴팍의 핏물을 손으로 훔치며 이를 갈았다. 그는 손에 묻은 자신의 혀를 할짝이며 미간을 좁혔다. 혈강기를 운용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빼내는 것이 익숙했다. 하나 타의로 피를 보는 경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아! 진짜 믿을 놈이 없구나.”
사령신은 주먹을 쥐었다.
그 순간 손바닥에 묻어 있던 핏물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것은 거대한 도끼가 되었고, 이내 남천휘의 정수리를 쪼개기 위해 내리꽂혔다.
쩡!
이번만은 전력이나 다름없는 일격이다.
아니나다를까 남천휘는 옅은 신음과 함께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래, 남은 한쪽도 꿇어라!”
사령신은 재차 주먹을 날리려 했다.
하나 용린쌍도 너머로 얼핏 드러난 남천휘의 표정에는 득의의 빛이 가득하지 않은가.
‘설마 또?’
남천휘는 빠르게 주먹을 쥐락펴락 했다.
그 순간 용린쌍도가 역수로 잡혔다.
“군림천하.”
나직한 읊조림과 함께 알림이 들려왔다.
◎ 군림천하의 효과로 인해 찰나간 경직(硬直)이 발동합니다.
사령신으로서는 한순간 마혈을 잡힌 것처럼 멈칫해야 했다. 찰나간 지나친 경직이었지만, 고수에게 있어서는 영겁과도 같이 충분한 시간이었다.
파팟!
남천휘는 꿇었던 무릎을 펴며 몸을일으켰다.
마치 추진력을 얻기 위해 무릎을 꿇었던 것처럼 사선으로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그가 역으로 쥔 백룡도를 끌어올리는 순간 도신이 사령신의 턱밑에서 쇄도했다.
“흡!”
촤악!
사령신의 턱밑에서 시작된 혈선이 윗입술까지 이어졌다.
“쯧, 옅군.”
남천휘의 말처럼 고작해야 피륙의 상처일 뿐이다.
하나 사령신은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이제야 남추에 대한 기억이 완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놈도 그랬다!’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지치지 않은 체력과 내력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던가.
결국은 먼지 지쳐버린 사령신이 등을 보였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느냐는 심경이었다.
‘······.’
남천휘의 외형에 남추가 덧씌워지는 듯했다.
“군림천하!”
사령신은 미간을 좁힌 채 빠르고 뒷걸음질 쳤다.
일단 거리를 벌리고 생각을 정리하려는 게다.
하나 경직의 효과로 인해 다시 한 번 간격을 허락해야 했다.
촤아아악!
이번에는 아슬아슬하게 흑린도가 스쳐갔다.
하지만 이런 식의 회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무공을 모두 되찾았다면 금강불괴가 부럽지 않지만······.’
사령신은 자신의 몸 상태를 냉정하게 점검했다.
전성기의 이 할을 겨우 넘기는 성취였다.
반면 남천휘는 어떠한가.
벌써 서너 사람의 피를 쏟아냈으면서도 여전히 건재했다.
촤악! 촤악! 촤악!
사령신은 옷자락을 베이고, 옆구리를 한 차례 더 베인 후 결정을 내렸다.
“두고 보자!”
천신이 강림한 듯 제갈세가를 짓밟던 자가 꼬리만 개처럼 물러났다.
하나 사령신은 인세의 법도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저 본인이 하고 싶으면 행할 뿐이다.
남천휘는 삼류 악당과 같은 대사를 내뱉는 사령신을 쫓았다. 등을 보인 채 멀어지는 놈의 등짝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터터터터텅!
하나 사령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파를 튕겨냈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강맹한 위세를 뽐낸 후 등을 보였다.
“사, 사령신이 도망쳤다!”
제갈세가를 비롯한 무인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지금껏 멀뚱히 지켜보고 있던 제갈학이 황급히 다가왔다.
“회주! 저대로 보내는 아니 되오. 당장 사령신을 쫓아가 죽여야 하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지금껏 뒷방 늙은이처럼 숨을 죽이고 있더니 갑작스레 기가 살아나서 날뛰는 모습이 꼴사나웠다.
“누가 가서 죽이는데요?”
제갈학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제아무리 낯짝이 두꺼운 자라고 해도 피투성이가 된 남천휘를 재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회주, 괜찮으시오?”
청송진인이 비틀거리며 다가섰다.
“그럭저럭요. 무당은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사령신이 도망쳤다고는 하나 언제 다시 돌아와 혈겁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당장 대비책을 세워야 해요.”
이쪽이 훨씬 더 대화할 가치가 엿보였다.
남천휘는 눈가에 말라붙은 핏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놈은 백 년 만에 기억을 되찾는 과정이기에 금세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청송진인은 그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되물었다.
“그렇다면 일단 무당으로 함께 가시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무림맹과의 연락소가 있으니 맹 차원에서 대응하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
남천휘는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쉬었다가 출발합시다.”
청송진인은 제자들에게 운기조식을 명했다.
그리고 지친 모습을 애써 숨긴 채 제자들의 호법을 자처하는 것이 아닌가.
남천휘는 그런 청송진인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멋있는 사람이다.’
그나저나 멋있지는 않아도 할 일이 있지 않은가.
바로 퀘스트 보상이다.
남천휘는 3-3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알림이 울리는 순간 보상을 확인했다.
‘사령신을 몰아냈으니 기대할만한 보상이 있어야 할 것이야!’
그가 재이에게 윽박을 지르는 사이 융중산 반대편에서 갑자기 폭음이 울렸다. 사령신이 도주한 방향이기에 중인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도망치다가 홧김에 바위라도 부수나 보지.’
남천휘는 사령신의 패악을 배경 음악 삼아 상자를 까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오호, 이런 것도 나오는구나?’
콰콰콰쾅!
시끄러운 자식, 적당히 좀 해라.
하나 좋은 보상이 등장할수록 사령신은 금세 기억에서 지울 수 있었다.
*
사령신은 헛웃음을 흘렸다.
남천휘를 피해 하산하던 중이다.
절대지경에 이른 기감을 활용하면 초행인 산길도 헷갈릴 이유가 없다. 한데 한참을 돌아서 하산하게 되었다.
융중산 중턱에 펼쳐져 있는 기관 탓이다.
처음에는 제갈세가에서 펼친 기관과 진법인 줄 알았다. 하나 몇 개의 기관을 부수고, 몇 개의 진법을 파해할수록 의구심이 깊어졌다.
기억의 조각이 조금씩 뭉쳐들었다.
그 결과 사령신의 입가에는 살소(殺笑)가 맺혔다.
“크흑! 이건 천명지괴의 진법이잖아.”
괴겁천마에게 사성신위가 있다면 사령신에게는 수족과 같은 광혈오주(狂血五主)가 존재했다.
오직 사령신의 명령만 따르던 혈귀들이다.
콰쾅!
혈강기가 기관과 주변 풍경을 동시에 휩쓸었다.
“천명지괴! 네 놈이 나를 배신해?”
그는 미간을 좁힌 채 기감을 넓게 퍼트렸다.
천명지괴의 기관진식은 제갈세가보다 윗줄에 놓아도 될 만큼 대단했다. 하나 한 가지 고칠 수 없는 약점이 있지 않던가. 바로 시전자가 반드시 주변에 있어야 하는 약점이다. 그렇기에 만병보고를 폭파한 백명괴군도 동굴에 숨어 있어야 하지 않았던가.
“찾았다!”
사령신은 어금니가 드러날 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는 남천휘에게 당했던 것을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다시 한 번 분노에 몸을 맡겼다.
“내가 없는 사이에 변절을 해? 갈가리 찢어주마!”
쾅!
사령신이 발을 구르는 순간 대지가 움푹 파였고, 그의 신형은 쏘아놓은 화살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자취를 감췄다.
잠시 후 묵빛 장포로 몸을 가린 두 사람이 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은 고목처럼 빼빼 말랐고, 한쪽은 바위처럼 장대한 체구였다.
일원의 좌사와 우사다.
빛이 들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야 할 그들이 정파의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 융중산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었다.
“우리를 눈치채지 못하는군.”
“놈은 확실히 약해졌소.”
“남천휘가 ‘하늘’의 계시처럼 제 역할을 했군.”
“이제 우리가 제 역할을 할 차례요.”
좌사는 우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잡을 수 있겠소?”
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천명지괴의 기관진식을 쫓을 것이고, 저절로 범의 아가리에 몸을 던질 것이외다.”
좌사는 더 이상 우려의 말을 남기지 않았다.
오늘을 위해 우사는 백여 년 간 준비했던 전력을 투입했다. 그렇기에 걱정하는 대신 경고의 한 마디를 남겼다.
“명심하시오. 반드시 사령신의 팔다리는 멀쩡하게 붙어있어야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