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진격의 사령신. (2)
*
뭐든지 처음은 매순간이 새롭다.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 역시 매순간 사람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하나 시스템의 존재 유무를 제외한다면 인세의 율법을 따랐다.
남천휘는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성장을 했다. 하나 강호의 절대자라 할 수 있는 절대지경의 고수들을 보라.
예를 들자면 괴겁천마나 사령신처럼 말이다.
그들은 승급 체계가 없을 뿐 인간의 범주를 벗어날 만큼 거대한 혜택을 얻었다. 타인보다 수련의 속도가 빨랐고, 온갖 기연이 그들에게 쏟아졌으리라. 그렇기에 남천휘 또한 시스템의 위력을 기연이라 여겼다.
방식의 차이일 뿐 결과는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하나 비책(秘策)은 달랐다.
강호의 기인이사라고 해도 타인을 아우르는 이적은 엄두도 내지 못할 터였다. 하물며 백여 명에 이르는 자들을 이끌고 내력의 소모 없이 이동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한데 그 어려운 걸 재이가 해냈다.
심지어 비책은 그 자체만으로도 수많은 선택지를 보였다.
◎ 상의를 탈의하면 냉기가 육신에 직접적으로 스며들며 이동 속도가 5% 상승합니다.
이 날씨에?
남천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무당의 제자들은 놀란 기색을 보일 뿐 하나같이 인상을 쓰고 있었다. 명가의 제자로서 발을 맞추어 뛰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터였다. 하물며 팔두 마차에 말을 매어놓은 것처럼 줄을 쥔 채로 뛰고 있었다.
‘미치지 않은 이상 하겠냐?’
◎ 특정 노래를 함께 부른다면 호흡이 일치하여 이동 속도가 10% 상승합니다.
이 상황에?
제갈세가의 명운이 코앞에 달렸다.
한데 노래를 부르자고 하면 미친놈 소리밖에 더 듣겠는가.
‘속도를 올릴 다른 방법은 없어?’
◎ 내력을 소모하는 만큼 속도가 빨라집니다.
- 내력은 입영열차에 속한 참가자의 속도와 비례하여 자동으로 소모됩니다.
아하! 내력을 사용하지 않을 때보다 사용하는 순간 더 빨라질 터였다.
‘속도를 올려.’
남천휘는 명령을 내린 후 슬쩍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사안이 급박하니 속도를 더 올립시다!”
후미에 있던 청송 진인이 호응하듯 외쳤다.
“속도를 올리겠소!”
그리고 입영열차는 더욱 빠르게 눈 위를 달려 남쪽으로 향했다.
“왼 발! 왼 발!”
구령도 붙이다보니 재미가 있었던 걸까.
무당의 제자들은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하나 융중산이 나타나는 순간 구령에 섞여 있던 흥이 사그라졌다.
“맙소사.”
“설마 늦은 건가?”
언제나 짙은 안개에 휘감겨 있던 천주봉의 전경이 훤히 드러났다. 그 말인즉슨 신무대진이 파괴됐고, 사령신이 하산했음을 의미했다.
남천휘는 재빨리 외쳤다.
“갑시다.”
*
사령신의 무학은 혈강기(血罡氣)에서 비롯된다.
본인의 피를 매개체로 하여 발현되는 강기의 응집력은 동수의 위력을 상회했다. 자르지 못하는 것이 없고, 자를 수 없다면 녹여버렸다.
사령신의 양 손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양 손을 떨치는 순간 핏빛 기운이 반월형으로 튕겨 나왔다. 좌우로 뻗어나간 혈강기는 건물을 부쉈고, 육신을 뭉갰다.
사령신의 독문무공 중 하나인 월아혈천수(月牙血穿手)다. 명칭처럼 핏빛 초승달이 용의 어금니라도 된 듯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크아악!”
제갈세가의 전열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야말로 목숨으로 시간을 끌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제갈학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상식이 파괴되고, 비현실이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강기를 발산하는 수준을 넘어 공간 자체를 장악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게 진짜였다니.’
어린 시절 조부가 해줬던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었다. 사령신을 막기 위해 제갈세가는 모든 기관을 꺼냈고, 무당은 정예를 모아 검진을 펼쳤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림승이 항마신공을 발휘하여 진군을 막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승패를 떠나 시간을 끄는 것이 전부였다.
‘기관이나 진법으로 막을 수 없는 존재다.’
어느덧 지팡이를 쥐고 있는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조금만 정신을 잃으면 미끄러져서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무당파가 나타난 건 그 때였다.
“제갈세가의 동도들은 물러나시오!”
청송진인이 굴레처럼 쥐고 있던 밧줄을 놓고 날아올랐다.
파팟!
허공에서 세 번이나 발을 놀리는 제운종이 펼쳐지는 순간 이 장에 가까운 거리가 단박에 좁혀졌다.
그를 시작으로 백여 명에 이르는 무당 제자들이 일제히 장내로 뛰어들었다.
“태청구궁대진을 펼친다!”
검진의 시작은 청일진인의 외침이다.
그는 사전 정보가 없음에도 제갈학의 곁으로 달려왔다. 제갈세가의 문장대와 무장대의 위치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세가의 질서를 수호하는 이들답게 가주의 곁을 지키는 것이 당연했다.
“혈우연노와 소천뇌는 몇 개를 운용할 수 있습니까?”
제갈학은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다.
구파의 수뇌부라면 응당 신마대전 당시 정파의 합공을 기억해야 했다. 그는 재빨리 남은 가솔들의 상황을 살폈다.
“혈우연노 여덟 개가 운용 가능하고, 소천뇌는 오십 구 정도 쓸 수 있네.”
“생각보다 적군요. 차라리 내원을 포기하고, 외원에 방어선을 폈다면 좋았을 텐데.”
청일진인은 아쉬운 듯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솔직한 속내를 밝힌 것이지만, 제갈학으로서는 세가를 한심하게 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린 놈이.’
청일진인은 제갈학의 표정은 개의치 않은 채 장내를 확인했다.
“천애지각으로 가겠습니다.”
신마대전 당시 사령신을 상대하기 위한 합공은 열두 종류였다. 그 중 무당파와 제갈세가의 연수합격을 천애지각이라 했다.
“알았네.”
제갈학은 평소와 달리 순순히 청일진인의 뜻을 따랐다. 제갈세가의 명운이 달린 일이기에 기꺼이 자존심을 굽혔다. 그가 가솔들에게 새로운 진형을 알리는 사이 태청구궁대진(太淸九宮大陣)이 완성됐다.
무당의 삼대검진 중 태청구궁대진의 별칭이 팔괘무극검진이다. 그 말처럼 태청구궁대진은 팔괘의 묘리를 검진에 담았고, 중앙의 한 사람을 위해 위력을 집중하는 것으로 위력을 드러냈다.
스릉-
청송진인이 자세를 한껏 낮춘 채 검을 뽑았다.
검지와 중지로 검신을 쓸어내리는 순간 대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지와 중지로 검신을 짚는 수결은 무한하다. 그것은 청송진인과 청일진인만의 소리 없는 대화였다.
“건팔, 감십사, 손이, 곤십일······.”
청일진인이 청송진인의 수결을 확인하고 독경을 하듯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구십구 명을 움직였다.
마치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를 움직이듯 대진 전체가 유기적으로 사령신을 감쌌다.
‘맙소사.’
제갈학은 청일진인의 읊조림을 귀로 듣고, 무당 제자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팔괘를 각기 여덟로 쪼개고, 그것을 다시 여덟로 쪼갠 후 움직임을 조율하다니······.’
99명으로 만들어내는 512개의 투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태청구궁대진의 묘리는 제갈학이 쉬이 눈치 챌 만큼 어렵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이 그 모든 변수를 꿰고 있다는 사실과 직접 움직이는 무당 제자들의 노련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들은 태청구궁대진에 삶을 바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태육! 진팔!”
청일진인의 외침에 제갈학은 화들짝 놀랐다.
저것이야 말로 혈우연노와 소천뇌의 발동을 알리는 신호였다.
“발사하라!”
제갈학의 외침을 시작으로 수백 발의 철시가 꽂혀들었다. 그 사이 무당의 제자들은 혈우연노와 소천뇌의 위치를 확인한 후 길을 열어놓은 상태였다.
저들의 능숙한 움직임에 다시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쉭쉭쉭쉭쉭쉭!
“쓸데 없는 짓!”
사령신은 개미떼처럼 주변을 빙빙 도는 무당제자들로 인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그는 양 손을 활짝 편 후 전방에 모았다.
그리고 내력을 발산하는 순간 다시 한 번 시뻘건 강기가 전방으로 흩뿌려졌다.
마관광살기(魔貫狂薩氣)다.
콰콰콰콰콰콰쾅!
소천뇌의 화살은 산산조각을 냈고, 손가락 두세 개 굵기의 혈우연노는 아예 튕겨냈다. 개중에는 엿가락처럼 휜 것도 있었으니 마관광살기의 힘을 엿볼 수 있었다.
“맙소사! 통하지 않는 건가.”
제갈세가의 가솔들은 탄식을 흘렸다.
하나 무당의 제자들은 요지부동이다.
이 순간이야 말로 사령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임을 알기 때문이다.
“건일!”
청일진인이 장내를 한눈에 담고 있다가 외쳤다.
그가 찾아낸 사령신의 사각을 청송진인이 달려들었다.
파팟!
무당의 상징인 송문고검(松紋古劍)에 강기가 드리워졌다.
백도(白道)의 순후함을 증명하듯 백색으로 빛나는 강기가 한순간 청송진인을 휘감았다.
신검합일(身劍合一).
검과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 태을보법을 펼쳤다.
명칭처럼 희뿌연 인영이 갈지자를 그리며 쇄도했다.
사령신은 청송진인의 절초가 코앞까지 들이닥쳤음에도 콧방귀를 뀌었다.
“흥! 무당의 말코로구나!”
솨아아아아-
엄지와 검지를 맞댄 채 손목을 휘돌리는 순간 붉은 기운이 실처럼 늘어졌다.
터터터터터텅!
붉은 실은 삽시간에 뒤엉키며 그물이 되었다.
아예 백색 강기를 찍어 누를 것처럼 너울거렸다.
청송진인은 어느새 속도를 잃었다.
오히려 붉은 실을 피해 뒷걸음질 쳐야 했다.
사령신은 가볍게 청송진인을 밀어낸 후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삼청선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놈이 감히 혜검을 흉내 내?”
삼청선도(三淸仙導)는 정천칠공의 한 명이자, 무당의 전전대 장문인이다. 상청과 태청, 그리고 옥청까지 아우른 삼청선도는 괴공 이후 무당제일인이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하나 청송진은 삼청 중 태청을 이어받았을 뿐이다.
그는 사령신의 비아냥거림에 미간을 좁혔다.
‘태극혜검의 성취가 조금만 더 높았다면······.’
그랬다면 사령신은 무당의 제자들을 압박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의 사령신은 자신을 상대하면서도 손쉽게 무당의 문도를 공격했다.
쾅! 쾅!
사령신이 가볍게 내저은 일격에 무당의 문도들은 서너 명씩 피를 토하며 튕겨나갔다. 그나마 태청구궁대진의 힘을 빌렸기에 가볍게 내상을 입는 정도에 그쳤다.
“버텨라! 우리는 언제나 마지막이다.”
청송진인은 검을 고쳐 잡은 후 다시 달려들었다.
그를 따라 무당의 제자들이 진열을 정비했고, 사령신을 앞에 두고도 망설임없이 몸을 날렸다.
그 모습만으로도 결연한 의지가 전달됐다.
그도 그럴 것이 강호인은 백인백색이라 법도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하나 몇몇 부류는 어리석어 보일 만큼 사명감에 집착했다.
구파 내에서도 소림과 무당은 유별났다.
사문의 존폐마저 도외시한 채 협의에 스스로를 옭아맸다. 그리고 그 의지가 소림과 무당을 경외하게 만드는 뿌리였다.
터터터텅!
청송진인은 이번에도 사령신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다. 그리고 무당의 제자들은 또다시 몇몇이 피를 흘렸다.
“날파리 같은 것들이!”
반면 사령신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괴겁천마와 달리 사령신은 본능에 충실했다.
화가 나면 부수고, 기분이 나쁘면 죽였다.
그렇기에 기꺼이 산혼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생각하는 건 귀찮으니까.
“죽어라!”
사령신은 양 손에서 붉은 실을 쏟아냈다.
“크흑!”
청송진인은 미간을 좁혔고, 입가에는 핏물이 흘렀다.
하나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했다.
사령신의 호신강기는 여전히 철옹성과 같다.
그래도 좋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사령신과 승패를 겨룰 생각이 전무했다.
‘더 화를 내라. 더! 더!’
그는 융중산으로 오를 때 남천휘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예전과 똑같습니다.
- 다만 정천칠공이 했던 것을 제가 할 뿐입니다.
사령신은 지난 날 정파의 합공에 이성을 잃었다.
날파리처럼 주변을 오가는 구파의 무인들로 인해 내력을 일시에 쏟아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대량 살상을 불러일으키는 천사강림(千邪降臨)이다. 그리고 천사강림이 극에 달하면 사령신조차 무장 해제되는 절대영도(絶對嶺島)가 펼쳐질 터였다.
“크아아! 개 같은 새끼들! 한 번에 쓸어버려주마.”
마침내 대지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일정 공간을 사령신의 의지 하에 두는 천사강림이 펼쳐졌다.
“크흑!”
무당 제자 내에서도 성취가 부족한 제자들부터 영향을 받았다. 하늘이 온 몸을 찍어 누르는 듯한 압박감에 피가 모공으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 때 청일진인이 맑은 목소리가 제자들의 귓가에 울렸다.
“수치를 은혜로운 것처럼 반기고, 고난을 내 몸처럼 귀하게 여기라.”
도덕경 십삼 장에 나오는 총욕약경 귀대환약신(寵辱若驚 貴大患若身)의 구절이다. 그리고 무당의 제자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담아 놓은 경구였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사령신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피를 매개체로 절대신공을 운용하기에 그만큼 천사강림이 강해졌다는 의미였다.
“어디 이것도 버텨보려무나!”
쿠쿠쿠쿠쿵!
마치 해안이 깎아지를 듯한 산줄기로 휘감긴 섬에 갇힌 듯했다. 죽음이 아니라면 결코 살아 나갈 수 없는 절애고도였다.
청송진인은 핏발 선 눈으로 일갈을 내질렀다.
“회주! 지금이외다. 그걸 하자!”
그 순간 절대영도 밖에서 심령을 뒤흔드는 듯한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띠리링-
종소리에 이어 경쾌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죽어라! 이 대머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