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262화 (262/305)

115, 재이나(J.A.I.N.A).

115, 재이나(J.A.I.N.A).

하늘은 해가 뜨기 전의 묘한 분위기를 한껏 자아냈다. 달과 해가 교차하면서 만들어낸 어스름한 밤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했다.

멀리서 보면 구름의 형태가 확연히 시야에 들어왔다. 하나 운해가 가까워질수록 안개가 낀 것처럼 주변이 물들었다.

하나 남천휘는 안개가 자욱해질수록 초조하기만 했다. 지금까지 그가 확인했던 영상은 시간 조절이 가능했고, 사방팔방으로 자리를 바꿔서 시청하는 것이 가능했다. 한데 이번에는 모든 기능이 정지됐고, 그저 영상에 비치는 광경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평소와 다른 이유는 뻔했다.

‘얼마나 중요한 것이기에······.’

뭐가됐든 사령신과 관련이 있는 영상이다.

그렇기에 안개가 자욱해져서 주변 풍광을 살필 수가 없음에도 기다렸다.

마침내 운해를 벗어나 지상이 나타났다.

깎아지를 듯한 봉우리의 정상에 펼쳐진 전경이 더없이 익숙했다.

‘천주봉.’

하나 천주봉의 정상에는 초옥이 보이지 않았다.

세 명의 사내가 품자 형태로 모여 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사람은 산적이다.

‘아니, 할아버지.’

영상을 찍을 때에는 무슨 생각인지 봉두난발에 수염은 꼬챙이처럼 길렀다. 그리고 상체에 호피를 둘렀는데 누렇고, 검은 부분이 선명했다. 그리고 팔목과 발목에도 호피를 둘렀다. 아마 호랑이의 팔다리에서 벗겨낸 가죽이겠지. 가죽에 흠집 하나 없는 것으로 보아 옷차림에 상당히 신경을 쓴 듯했다.

좌측에 선 사내 또한 익숙한 존재가 아닌가.

‘백두네.’

타칭 백두, 자칭 사부라 칭했던 놈은 저 때도 대머리였다. 대머리 주제에 얼굴 전체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얼굴에 맺힌 붉은 기운이 불덩이처럼 넘실거릴 때마다 사이한 기운이 폭주했다.

‘머리카락이 없어서 저러고 다니는 걸까?’

◎ 이번 영상은 1회 재생 후 삭제됩니다.

- 집중해주세요.

오냐!

사령신이 있으니 등을 보이고 있는 건 괴겁천마일 터였다. 처음으로 마주한 괴겁천마의 행색은 묘했다. 묵빛 무복을 걸쳤는데 희한하게 그림자처럼 여겨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사령신이 붉게 번들거린다면 괴겁천마는 검게 물들었다.

마치 시작점이 다른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보기 좋게 구별되어서 좋구만.’

확실히 남천휘는 달라졌다.

만병보고에서 마봉파에 담긴 영상을 확인했을 때에는 사령신이 등장하는 순간 넋이 나가는 듯했다.

그만큼 사령신의 존재감은 엄청났다.

정천칠공 중 한 명인 청염진군의 얼굴은 기억에 남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반면 괴겁천마는 그저 어둠과 같았다. 마치 밤하늘에 동화된 것처럼 조금의 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나저나 뭐하는 거지?’

남천휘가 호기심을 보이는 순간 백파도 남추가 폭소를 터트렸다. 지금껏 남천휘가 보았던 웃음 중에서 가장 호탕했다.

그리고 강렬하기까지 했다.

쿠쿠쿠쿠쿵-

한순간 안개가 흩어졌고, 천주봉을 제집 삼아 휘돌던 바람마저 밀려났다. 소림의 사자후라고 해도 저 정도의 위력은 아닐 터였다.

그야말로 초목산천이 겁을 먹고, 떠는 듯했다.

그러자 사령신이 대뜸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하!”

천주봉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천휘는 침음을 흘렸다.

‘내가 장담하는데 저거 그냥 지기 싫어서 웃는 게 분명해.’

그나저나 거리를 빨리 좁혔으면 좋겠다.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한데 몇 마디를 나누던 중 괴겁천마가 암수를 펼쳤다. 대뜸 손을 들어 남추를 향해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손 끝을 타고 검은 비단이 너울거리듯 전방을 찢어발겼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검은 비단이 남추를 그냥 통과하는 것이 아닌가.

괴겁천마에 이어 사령신까지 혈기를 흩뿌렸다.

하나 남추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이형환위도 저렇게는 안 될 텐데······.’

잠시 후 괴겁천마와 사령신의 공세가 끝을 맺었다.

효과가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응?’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허공에서 갑자기 통나무가 내리꽂혔다.

만변만해휘발액이 담겨 있던 통나무다.

그리고 남추는 어디선가 두 자루의 막대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통나무에 꽂았다. 그것을 다시 빼냈을 때 남은 건 손잡이 뿐이었다.

‘어!’

남추가 손을 튕기자 두 개의 손잡이마저 사라졌다.

‘아!

남천휘가 비명을 내질렀으나, 광풍에 휘말려 퍼지지 않았다. 바람이 없었어도 영상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야! 저거 인벤토리 아니냐?’

재이는 말이 없다.

남천휘가 초조함에 몇 번이나 재이를 불렀으나, 녀석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순간 남추가 일갈을 내질렀다.

“불멸과 불사를 원한다면!”

그는 괴겁천마와 사령신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오라.”

아! 빌어먹을, 제일 중요한 단어가 빠졌잖아.

괴겁천마는 그 즉시 한 발을 뒤로 뺐다.

그 순간 그의 신형이 어둠속에 동화되듯 흩어지며 자취를 감췄다.

사령신은 돌아섰다가 대뜸 암수를 날렸다.

하나 이번에도 혈기는 남추를 뚫고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다. 그리고 남추는 안개가 뭉쳐들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중에 다른 말 하지 마라!”

사령신은 겸연쩍은 듯 으름장을 놓고 경공을 펼쳤다. 쇠 신발을 신은 것처럼 보보마다 굉음이 들려왔다.

두 사람이 사라졌으니 남추의 차례였다.

‘어! 어디로 갔어?’

잠시 사령신의 뒤를 좇던 사이 남추를 보이지 않았다. 남천휘도 경험했지만, 산을 내려갈 수 있는 길은 두 곳이다.

하나 어디에도 남추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귀신처럼 그냥 사라진 것이다.

‘하아, 신출귀몰이구만.’

그리고 그 즈음 남천휘는 천주봉 정상에 도착했다.

주변을 살펴봐도 눈여겨 볼 만한 것이 없다.

한데 오직 통나무와 만변만해휘발액만 남아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이게 끝이냐?’

남추가 괴겁천마와 사령신을 불러들였고, 그들과 무슨 약속을 했다는 것이 영상의 전부였다. 그리고 남추가 인벤토리를 사용했다는 점이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리라.

하나 그것만으로는 영상의 의미가 퇴색됐다.

지금껏 남천휘에게 남겨진 영상은 대부분 메인퀘스트에 큰 획을 긋거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가.

‘어차피 예상했던 범주였어.’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가 시작된 이후 많은 생각을 해왔다. 재이를 하늘이 내려줬다면 왜 보내줬는지에 대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하나 백면서생에 한량이었던 남천휘에게 자격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산적으로 보였던 남추에게서 비롯됐을 터였다.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해?’

남천휘가 허공을 향해 묻는 순간 눈앞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지이이이이잉-

허공에 누군가 붓으로 뚫을 곤(丨)을 쓴 것처럼 황금빛 선이 그어졌다. 그것은 부풀어 오르듯 좌우로 늘어났고, 이내 원을 그리며 통로와 같은 것이 완성됐다.

‘아.’

오늘 참 넋을 놓는 횟수가 잦구나.

하나 이것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황금빛 통로에서 누군가의 발이 나타났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자는 선계에서나 보일 법한 이적과 어울리지 않게 호피를 걸친 남추였다.

그가 천주봉에 두 발을 딛자, 황금빛 원은 문을 닫는 것처럼 곤(丨)자 형태로 돌아왔다. 그리고 누군가 글씨를 지우듯 아래에서부터 흩어졌다.

“이쯤이었던가?”

남추는 자신이 서 있었던 자리로 향했다.

그가 손을 뻗자, 땅이 움푹 파였다.

그 안에는 사람의 머리통만한 쇳덩이가 묻혀 있었다. 아무래도 쇳덩이로 인해 조금 전의 신위가 가능했던 듯싶다.

“고금제일이라고 해도 이건 눈치 채지 못하네.”

그는 히죽 웃으며 쇳덩이를 인벤토리로 회수했다.

그리고 통나무 앞에 서서 읊조렸다.

“칠야.”

통나무 위에 얹어 놓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만변만해휘발액 속에 잠겨 있었던 것처럼 칠야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창월도 또한 그렇게 뽑아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칠야도와 창월도가 자취를 감췄다.

인벤토리로 들어갔겠지.

하나 남천휘는 남추의 비현실적인 등장이 만들어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으아! 이거 뭐냐?’

그러던 중 비책이 생각났다.

‘설마 이게 축지지책?’

축지지책(縮地之策)은 성소 간의 이동속도를 2배나 빠르게 만드는 능력이다. 하나 그 후에 재이가 했던 설명은 조금 달랐다.

비책의 레벨을 끝까지 올린다면 출발지와 도착지에 왜곡 점을 만든 후 한 번에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전설 상의 축지법이다.

‘그게 이런 식으로 발현되는 거였냐?’

남추는 통나무에서 적당히 떨어졌다.

그리고 손가락 한 마디만한 쇳덩이를 땅에 묻었다. 통나무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쇳덩이를 묻은 후 읊조렸다.

“2등급 방어진으로 하자.”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하다.

‘설마 너는 아니겠지?’

재이는 답이 없었고, 땅에 묻어놓은 수십 개의 쇳덩이들이 일제히 금빛으로 번뜩였다. 동시에 반투명한 막이 반구형으로 솟구쳐 통나무로의 접근을 차단했다.

남추는 검지를 뻗었다.

그 순간 손가락의 끝에 한 방울의 피가 흘러나와 허공을 날았다. 그것이 경계에 닿는 순간 반구 전체가 출렁였다. 그리고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재이나.”

남추의 읊조림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금빛 문이 열렸다.

“그녀에게 돌아가자.”

*

남천휘는 눈을 깜빡였다.

영상은 끝났고, 현실로 돌아온 듯했다.

‘야! 너 할아버지랑 같이 다녔냐?’

◎ 저 또한 자격이 되지 않아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너도 모르는 게 있었냐?

◎ 나노 플레이트는 중원 곳곳에 퍼져 정보를 수집합니다. 하지만 제가 확인할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주인님의 성장도와 함께 정보가 공개되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

어쩐지 만능 치고는 허술한 점이 있다 했지.

남천휘는 짐을 내려놓듯 장탄식을 흘렸다.

지금까지 백파도 남추의 행적을 좇다보니 몇 가지 확인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정천칠공과 함께 움직였으리라고 예상한 것이 전부였다. 한데 괴겁천마나 사령신과 대면할 정도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남천휘가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띠링-

◎ 인접한 야산에 C급 보조 퀘스트가 존재합니다.

남천휘는 미몽에서 깨어난 듯 미간을 좁혔다.

오래 전부터 하급 퀘스트는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지 않았던가.

하나 재이를 탓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해야 할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넋 놓고 5분이나 있었네.’

남천휘는 허공을 힐끔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과거에 할아버지와 얽힌 일이 뭣이 중할까?

지금 녀석은 자신을 위해 힘쓰고 있지 않은가.

“일단 대머리부터 조지자!”

파팟!

남천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만큼이나 쾌속한 속도로 질주했다.

*

무당파는 북숭소림(北崇少林), 남존무당(南尊武當)이라는 여덟 글자로 대변된다.

그리고 무당산 아래에는 무당의 존재를 자랑하듯 해검지(解劍池)가 존재했다. 무당의 시조인 장삼봉을 존중하는 의미로 병장기를 풀어놓는 장소였다.

실제로는 무당산 초입의 작은 연못이다.

무당이 성세를 이뤘을 때에는 근처 노송에 병장기를 걸 자리가 없었을 정도였단다.

하나 신마대전이 끝난 후 구파는 재정비를 위해 강호 출입을 삼갔다. 그러다 보니 예전처럼 해검지를 중시 여기는 자가 드물었다.

무당 내에서도 이대제자를 내려 보내 해검지 주변을 지킬 뿐이다. 병장기를 거두기 위함이 아니라 해검지의 훼손을 방지하는 것이 임무였다.

일양자는 수 년 간 해검지를 담당했다.

그 동안 무탈하게 해검지를 지켜왔으니 긴장을 풀만도 하건만, 그는 언제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렇기에 저 멀리서 일진광풍이 일었을 때부터 검배에 손을 올렸다.

‘누가 저런 경공을?’

제자인 목평과 목주가 다가왔다.

“사부!”

“경계를 늦추지 마라.”

여섯 명의 제자가 평소 연습했던 대로 자리를 지켰다. 누군가는 검진을 펼칠 준비를 했고, 누군가는 호각을 쥐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명적과 화시를 활시위에 올렸다.

“외인은 속도를 늦추시오!”

일양자가 내력을 담아 일갈을 내질렀다.

하나 상대는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더욱 빠르게 내달렸다. 남천휘가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한량을 꿈꾸지도 않았으리라.

그는 오히려 반갑게 외쳤다.

“내가 제대로 왔구나!”

호기로운 외침에서 적의를 찾기란 요원했다.

하나 일양자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미 검진의 형태를 완성한 후 상대를 기다렸다.

“멈추라고 했소이다!”

남천휘는 지척에 이르자, 무당산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켜! 시간 없어.”

일양자가 예기치 못한 한 마디에 미간을 좁혔다.

그 순간 남천휘의 신형이 절반으로 쪼개지는 듯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먼지 구름이 이는 것이 아닌가.

남천휘가 뒤를 돌아보며 인상을 썼다.

“아저씨. 명적 안 쏴?”

목풍은 남천휘의 채근에 자신도 모르게 활시위에 걸고 있던 명적을 쏘아올렸다.

삐이이이이이이-

명적(鳴鏑)이 울리는 순간 무당산 곳곳에서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남천휘는 그것을 보고 히죽 웃더니 엄지를 추켜세웠다.

“정상에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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