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관천휘라고 불러다오. (2)
한순간 침묵이 장내를 휩쓸었다.
때마침 들려오는 사령신의 발악이 아니었다면 침묵은 더 길어졌을 터였다. 누군가 화들짝 놀라며 무릎을 꿇으려다 옆의 동료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그야말로 혼돈과 무질서가 제갈세가를 뒤덮었다.
‘맹주령도 별 것 아니네.’
무림맹주가 들었다면 뒷목을 잡고 비틀거릴 만큼 불경한 생각이다.
남천휘는 입맛을 다시며 맹주령을 내렸다.
어쨌든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무릎을 꿇으라니! 그것이 오대세가의 한 축인 제갈세가의 경내에서 할 소리더냐?”
제갈표가 꼬투리라도 잡은 사람처럼 일갈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보던 제갈학은 미간을 좁힌 채 침음을 흘렸다.
‘맹주가 정말 명령을 내렸는지부터 확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네 놈은 기본적인 사실 확인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혼란에 빠졌구나.’
제갈학은 그로 인해 제갈표에 대한 의심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제갈표를 궁지에 몰아넣은 이상 남천휘가 가짜라고 해도 일단은 믿어주려 했다. 가주 자리만 차지한다면 세간의 비난 쯤은 감수하려 했던 것이다. 한데 남천휘가 진짜인 듯하니 더 이상 꺼릴 낄 것이 없었다.
“문장대! 무장대!”
두 개의 타격대는 세가 내의 질서를 담당했다.
하나 세가 밖에서는 어떠한 무력시위에도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감찰 조직인 셈이다.
그렇기에 제갈표의 손이 닿지 않은 조직이기도 했다.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을 셈인가? 사령신으로 추정되는 자가 본가의 성지인 천주봉을 더럽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주라는 작자는 보신을 꿈꿀 뿐이야. 설마 그대들도 일원의 하수인이 된 것이더냐?”
문장대주와 무장대주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본래 누명이란 벗기는 것이 어려울 뿐 씌우는 건 손쉬웠다.
한평생 제갈세가의 중진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아왔던 그들이 아닌가. 이제 와서 일원의 하수인이라는 굴레가 씌워진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닐 터였다.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혐의를 부정할 수는 없지.]
한 번의 전음으로 서로의 마음이 같음을 알 수 있었다.
대주들이 눈짓을 하자, 수하들이 움직였다.
제갈표는 대로하여 일갈을 내질렀다.
“이 놈들! 단체로 미친 게냐?”
문장대주가 고개를 조아렸다.
하나 눈동자를 위로 하여 제갈표를 주시했다.
“가주. 현월회주의 말에는 인과가 있으니 마냥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사령신이 지척에 이르렀습니다.”
무장대주가 말을 받았다.
“신무대진이 언제까지 버틸 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본가가 한시라도 빨리 한마음으로 대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갈표가 인상을 쓰자, 외원주인 초계황이 끼어들었다.
“미쳤다. 미쳤어. 모조리 미쳤구나! 외인의 믿기 힘든 말로 가주를 겁박하려는 게냐?”
천문회주이자, 태상가주인 제갈학이 지팡이로 땅을 내리쳤다.
쾅!
“닥쳐라! 근본도 알 수 없는 낭인 주제에 감히 본가의 행사에 개입하려는 게냐?”
애당초 초계황은 제갈표가 세가를 장악하기 위해 외부에서 초빙한 무인이다. 그렇기에 제갈세가의 가솔들과 친분을 나눴을 리 만무했다.
“크흑!”
초계황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검배를 잡았다. 하나 그는 현실을 떠올리고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부릴 수 있는 외원팔대는 남천휘로 인해 전멸하지 않았던가.
‘저! 빌어먹을 개종자 때문에.’
제아무리 혈기방장한 초계황이라고 해도 남천휘가 만들어낸 분위기 속으로 몸을 던지기는 어려웠다. 촛불에 몸을 던지는 부나방이 아닌 이상 그 역시 목숨을 아까워하는 인간이 아니던가.
“네 놈의 죄가 있다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 죄가 없다면 문제될 것이 없을 터! 당장 물러서라.”
제갈학은 초계황에게 살 길을 열어줬다.
어차피 가주 자리만 차지하면 부외자는 추방하는 것으로 마무리해도 무방했다.
초계황은 슬쩍 발을 뺐다.
‘사령신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는 일이니······.’
문장대와 무장대가 제갈표를 포위하는 순간 오대세가의 머리라고 불렸던 제갈세가의 주인이 바뀌었다.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마무리가 된 것이다.
남천휘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지난 백 년 간 썩어 문들어진 건 산동성 뿐이 아니었구나. 아니, 차라리 산동이 나았다.’
어쩌면 산동은 변방이었기에, 거대문파가 없었기에 순수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대세가를 비롯한 기득권 세력이야 말로 곯을 대로 곯은 상태가 아니던가.
“이번 일의 진실이 밝혀진다면 태상가주! 당신은 제명으로 끝나지 않을 게야.”
제갈표는 문장대와 무장대의 포위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찌됐든 다른 죄를 물으면 모를까, 사령신의 등장은 그도 모르는 일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이 굴욕적인 하루가 끝났을 때 웃고 있는 건 본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 가솔들과 비전투원을 세가 밖으로 내보내라. 이곳에 방어선을 치고, 내원의 모든 기관진식을 개방하라! 혈우연노를 모조리 꺼내오고, 칠대금용물품의 사용도 허락하겠다!”
제갈학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혈우연노와 칠대금용물품은 사령신을 곤란에 빠트렸던 비장의 무기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가솔들은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할 일을 찾아 흩어졌다.
제갈학은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제갈표를 향해 조소를 흘린 후 남천휘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눈을 찡긋 거리는 것이 아닌가.
‘저 노인네가 징그럽게 왜 저래?’
남천휘는 진저리를 쳤다.
천문회가 제갈표의 정보를 모았다면 제갈표 역시 적대세력의 정보를 수집했다. 같은 성을 쓰면서도 서로를 생사대적으로 여겼다. 그리고 제갈표가 수집한 정보는 당연하게도 남천휘의 눈앞에 떠 있었다.
‘쯧쯧.’
남천휘는 정보를 확인하며 미간을 좁혔다.
‘그야말로 똥이 먼저냐? 소변이 먼저냐? 수준이잖아. 저런 것들이 천하제일의 지자랍시고 거드름을 피웠더니 저열하기 짝이 없구나.’
◎ 주인님.
알아, 개똥같은 비유였다고 생각하는 거지?
남천휘가 반성하려는 찰나에 재이가 알림을 울렸다.
◎ 신무대진의 파괴가 진행 중입니다.
- 잔여 시간은 00:59:58입니다.
그 사이 반 시진 이하로 줄었구나.
이제는 정말 미룰 수 없었다.
남천휘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제갈학이 체통도 잊은 채 기다렸다는 다가왔다.
“명성이 자자하던 현월회주를 실제로 보게 되었구려. 반갑소. 제갈세가의 가주를 맡게 된 제갈학이라 하오.”
손자뻘 되는 사람에게 하오체라니.
권력과 힘이라면 죽은 시체도 껴안고 웃을 노인이 아닌가.
‘일원만 아니었지, 제갈표보다 더 하군.’
남천휘는 제갈세가에 대한 기대치를 바닥까지 내렸다. 한데 제갈학은 바닥 아래 바닥이 있음을 몸소 증명했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많겠구려. 이번 일을 통해 회주가 큰 결실을 맺게 되었으니 앞으로도 잘 지내봅시다.”
한 마디로 빚을 지우겠다는 의미였다.
남천휘는 제갈학과 말을 섞는 시간도 아까웠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시간이 아까웠다.
“나 때문에 가주가 되었으면서 왜 이렇게 뻣뻣하실까? 정치질을 하려면 허리가 유연해야 한다는 말도 못들어보셨소.”
하오체에 하오체로 응수했다.
강호의 경험이 많고, 능글맞은 제갈학의 표정이 한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제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예법과 도리를 통해 계산하던 자가 아닌가.
반면 남천휘는 무적자로서 천하에 꺼리낄 것이 없다. 심지어 무림맹조차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받아들였다.
다만 목표가 같기에 잠시 한 배를 탔을 뿐이다.
노회한 제갈학은 그런 남천휘의 성향을 단박에 눈치챘다.
“허허, 그렇구려. 내가 신세를 졌네. 언제고 기회가 되면 빚을 갚겠소이다. 그 때까지는 한 배를 타도 될 것 같은데?”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로다.
남천휘는 히죽 웃었다.
“내리는 데에는 순서가 없으니 함께 승선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을까.”
이제는 숫제 아랫사람 취급이다.
제갈학은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입꼬리를 올렸다. 남천휘가 지금껏 벌인 일이 모두 진실이라는 가정 하에 움직여야 했다. 그렇다면 맹주의 명령이라는 것은 사령신을 제어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함께 탔으니 맹주의 명령을 들려줄 수 있겠소?”
남천휘는 주춤거리지 않았다.
맹주가 명패를 줬다는 건 권한을 위임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아니면 말고.’
그렇기에 무슨 말을 해도 부끄럽지 않았다.
“맹주께서는 제갈세가의 위기가 지척에 이르렀음을 알고 계셨소. 그렇기에 사령신으로 추정되는 자의 준동을 우려하여 몇 가지 방책을 준비하셨소.”
“그게 뭔가?”
“무당이외다.”
제갈학은 눈을 끔뻑였다.
‘무당파가?’
호북성에는 구파오가에 속한 명문거파가 두 곳이나 존재했다.
무당파와 제갈세가였다.
무당파(武當派)는 호북성 북쪽 끝 무당산에 위치했고, 제갈세가는 그 아래인 융중산에 터를 잡았다.
한 마디로 같은 산맥의 지맥인 셈이다.
그렇기에 제갈세가는 언제나 무당파의 동향을 파악했다. 무당파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하나 지난 며칠 간 무당파는 평소와 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제갈학은 슬쩍 남천휘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하나 무당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무슨 의미인가?”
“무당파가 준비를 끝냈을 테니 내가 가서 이끌고 올 것이외다.”
“그대가 간다고?”
“그렇소.”
“천주봉이 당장이라도 뚫릴 것 같은 상황에서 이 사달을 시작한 자가 떠나겠다고?”
남천휘는 당당했다.
“늙어서 청력이 약해지셨나. 내가 가야 무당파가 믿고 함께 움직이지 않겠소.”
제갈학은 미간을 좁혔다.
“무당파도 설마······.”
남천휘는 히죽 웃었다.
“무당파는 소림과 더불어 협도의 상징이 아니던가. 당연히 비경회가 존재하오. 제갈세가와 다르지.”
제갈학은 수긍했다.
무림맹이나 무당파가 아니라 비경회의 준비라면 남천휘가 가는 것이 옳다.
‘하나 믿어도 되겠는가?’
가주가 된 이상 제갈세가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남천휘가 이대로 도주한다면 그것대로 문제였다.
그 때 포위망 안에 있던 제갈표가 남천휘를 비웃었다.
“크하하하! 도망치려는 게냐?”
남천휘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너인 줄 아느냐?”
스륵-
용린쌍도를 뽑았다.
“감별할 줄 아시오?”
제갈학은 이미 용린쌍도의 순백과 같은 도신이 등장했을 때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보도가 어디서······.”
백룡도와 흑린도는 제갈학을 비롯해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일견하기에도 신묘한 기운이 가득했고, 바라만 봐도 눈빛이 베일 것 같았다.
“이걸 맡겨놓고 가리다!”
무기를 쓰는 자들이 하나같이 탄성을 흘렸다.
무인에게 병장기란 또 다른 영혼이 아니던가.
“담대하구나!”
남천휘는 네 차례라는 듯 제갈학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쯤 되면 제갈학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위신 문제였다.
거절하는 순간 타인을 믿지 못하는 자로 낙인 찍힐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용린쌍도는 인질로 삼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녔다.
제갈학은 내력을 담아 말했다.
“좋소! 다녀오시오. 그대가 돌아올 때까지 제갈세가의 전력을 다해 저 괴물을 막고 있겠소이다.”
남천휘는 신무대진이 반 시진 후 무너진다는 정보를 밝히지 않았다. 어차피 비전투원은 모두 빠져나간 상태였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하나 같이 칼 위에서 생사를 겨루던 자들이 아닌가.
걱정은 사치였고, 깔보는 짓이다.
쉬익!
남천휘가 집어던진 용린쌍도가 멋들어지게 회전을 하더니 청석에 박혔다. 그는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외원으로 나아갔다.
“그 칼의 예기가 죽기 전에 돌아오리다!”
마치 유명한 경극의 한 장면이 떠오를 만큼 강렬한 의지가 전해졌다.
‘나 방금 멋있지 않았냐?’
◎ 멋있었습니다.
남천휘는 발걸음도 가볍게 나아갔다.
하나 재이의 대답 앞에 사라진 한 문단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파팟!
제갈세가의 외원에서부터 경공을 펼쳤다.
어차피 반 시진 이내에 무당산까지 다녀오는 건 불가능했다. 하나 돌아오는 길에 시간을 단축시킬 비책이 있지 않던가. 그렇기에 무당산으로 향하는 시간만 신경쓰면 될 터였다.
‘아! 할아버지 영상이 있었잖아.’
◎ 한 개의 동영상이 존재합니다.
- 이동 중에도 시청이 가능한 영상입니다.
좋아! 틀어줘.
남천휘는 영상이 재생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할아버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었어요?’
뭐가 됐든 산적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