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260화 (260/305)

114, 관천휘라고 불러다오.

114, 관천휘라고 불러다오.

묘한 장소였다.

동굴의 바닥은 넓었고, 중앙의 연못은 넓었다.

동굴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였고, 천장에는 한 사람이 겨우 몸을 뺄 수 있을 만큼 작은 구멍이 존재했다.

그곳을 통해 달빛이 스며들었다.

희미하게 스며든 달빛을 따라 연못 위에 펼쳐져 있는 안개가 춤을 추듯 출렁거렸다. 어쩌면 신화를 그려낸 것처럼 고혹적일수도 있는 광경이다.

하나 그렇지 않았기에 묘했다.

연못은 먹을 풀어놓은 것처럼 까맣고, 안개 또한 불을 질러 만들어낸 연기처럼 새카맣다. 그런 상황에서 달빛이 비쳐드니 안개는 검은 비단처럼 번들거렸다.

고오오오오오오-

간혹 누군가의 호흡처럼 음산한 기음이 울리니 심약한 자는 일각도 버티지 못하고 졸도할 것이다.

동굴의 통로는 비좁았다.

덩치 좋은 자가 들어서면 꽉 찰 정도였다.

그곳을 통해 대나무처럼 삐쩍 마른 자가 들어섰다.

그는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에 발을 들인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연못의 좌측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머리에 쓰고 있던 방갓을 벗는 모습에도 경외가 가득했다.

괴인의 얼굴도 몸 상태와 다르지 않았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구멍이 뚫린 것처럼 퀭했고, 간간히 안광만 번뜩였다. 그리고 좁은 하관으로 인해 광대는 찌를 것처럼 좌우로 튀어나왔다.

그는 오체투지를 한 후 알아듣지 못할 경구를 읊조렸다. 한참동안 읊조린 후에야 허리를 폈으나, 편하게 앉지는 않았다.

쿵! 쿵!

쇠를 두들기는 듯한 소음이 들렸다.

잠시 후 좁은 입구를 열어젖힐 듯한 기세로 장대한 체구의 무인이 들어섰다. 그는 괴인을 보지 않았고, 괴인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기세 좋게 등장한 것과 달리 괴인처럼 극도의 예를 표한 후 우측에 자리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자는 일전에 백결공을 찾아갔던 창운선생이다. 강호에는 천문과 점술에 능통한 명사로 알려졌지만, 진짜 정체는 따로 있었다.

그는 앞서 등장한 괴인이나 무인과 달리 어깨를 활짝 펴고 연못으로 향했다.

우두둑!

평소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자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몇 번이나 척추가 맞부딪치는 소음이 들려왔다. 그렇게 창운선생이 연못 앞에 섰을 때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무극중사가 하늘께 문안드립니다.”

그가 가운데 자리를 잡고, 예를 표했다.

그리고 좌우의 두 사람도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일원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세 명이 모두 모인 셈이다.

“일원좌사가 하늘께 문안드립니다.”

“일원우사가 하늘께 문안드립니다.”

그 순간 안개가 사람의 얼굴처럼 뭉쳐들었다.

눈과 입이 있어야 할 자리만 뻥 뚫려 있으니 악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사령신이······.』

안개를 흔드는 바람이 벽에 부딪쳐 공명하는 듯한 소리다. 어쩌면 귀로 전해지는 소리가 아니라 영혼에 꽂혀드는 듯한 읊조림이다.

『돌아왔다.』

세 명은 오체투지를 하며 한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하늘께서 말씀하신 때가 도래했나이다. 감축드립니다.”

안개가 한 차례 더 일렁인다.

마치 목소리를 가다듬는 것처럼 기음이 연이었다.

그리고 이내 무미건조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본래 그는 머리 쓰는 것에 약하다. 나쁜 머리로 인해 몸이 고생을 했지. 한데 고생만 하던 몸을 남기고 혼백을 날렸으니 변수가 될 수 없느니라.”

그 말은 곧 안개의 괴인은 몸을 날리고 혼백을 남겼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무극중사(無極仲使)가 말을 건넸다.

“길을 알려주소서.”

잠시 안개의 움직임이 멈췄다.

바람이 사라졌고, 연못의 수면조차 고요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모든 것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검은 안개는 사령신을 감지하듯 한참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냥 두어라. 사령신은 아직 해줘야 할 일이 많다.”

“따르겠나이다.”

안개가 좌사 쪽으로 뭉쳐들었다.

“네 세력은 대부분 사라졌다. 원망하지 않느냐?”

“집백등의 힘을 모으기 위해 필요했던 자들입니다. 저들끼리 하늘의 뜻을 흉내 내어 일원이라 부르던 자들입니다. 제게 있어서 그들은 자주 쓰는 빗자루나 깨지면 버리는 그릇과 같사옵니다.”

안개가 만족한 듯 우사 쪽으로 흘러갔다.

“너는 본래 패도의 상징이었고, 마도의 조종이었다. 네 밑에 수천의 칼이 존재하니 휘두르고 싶어지지 않더냐?”

고목 같은 괴인이 담담하게 대답했던 것과 달리 무인은 어금니가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하늘께서 현신하시는 날 그 뒤를 따른다면 원없이 피를 마시고, 고기를 뜯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들 역시 하늘의 보존을 위한 일개미에 불과합니다. 한날한시에 모조리 사라진다고 해도 다시 구하는 것이 귀찮을 뿐 아쉬울 이유가 없습니다.”

일원에 속한 자들이 듣는다면 기함을 토할 대꾸가 연이어 들려왔다. 하나 이곳에 있는 자들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일원이란 하늘이 현신하여 만들어낼 세상의 또 다른 명칭일 뿐이다. 세력을 일군 수하들 또한 그 날이 온다면 정리되어야 할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충성이 있었기에 자신들의 무공을 아낌없이 전했을 뿐이다.

고오오오오-

검은 안개가 다시 연못 위로 이동했다.

“사령신은 백 년의 세월이 지난다면 현신할 것이라는 말을 믿었다. 놈의 능력을 본다면 혹하는 것이 당연했지. 하나 나는 다르다. 나는 그 순간에도 놈을 소멸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원의 수뇌부가 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늘을 따르게 되어 삼생의 영광이옵니다.”

“사령신을 찾아내 각성하게 만들었다. 이제 놈이 폭주하여 날뛸 것이다. 천하를 어지럽혀 악귀를 풀어놓았으니 이제 두 번째 대업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존명!”

솨아아아아-

그 순간 한 줄기 광풍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검은 안개는 산산이 흩어져 자취를 감췄다.

그저 머릿속에 울리는 기음만 남았을 뿐이다.

『불사! 불멸! 그것이 너희들에게 주어질 보상이다. 내가 너희들을 이롭게 하리라.』

잠시 후 다시 뭉쳐든 안개는 평소와 다름없이 묘한 느낌만 남긴 채 수면 위를 떠 다녔다.

우사와 좌사는 그제야 서로를 바라봤다.

잠시 서로를 응시하더니 거리를 좁혔고, 동시에 팔을 뻗었다. 서로의 팔이 부딪치지 않고 교차하여 서로의 어깨를 다독였다.

“형제여.”

“그 날이 멀지 않았소.”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까딱인 후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무극중사를 향해 예를 표한 후 동굴을 떠났다.

“남천휘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어디선가 검은 안개의 목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울렸다.

“놈이 도화선이 되어 사령신을 이끌고 있다. 그냥 두어라.”

“하나 놈은 그 자의 후손이 분명합니다.”

연못 위에 머물던 검은 안개가 이리저리 흐느적거리며 이동한다. 만약 형체가 존재했다면 박장대소를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백 년 전보다 더욱 완벽해졌다. 놈이 나타나도 문제될 것이 없다. 하물며 놈의 후손이라면 더더욱 개의치 않을 것이다. 놈이 내게 했듯 마지막 희망까지 갈가리 찢어발길 것이야. 가장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기분을 공유할 수 있으니 소중한 존재가 아닌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물이라도 뿌려주고 싶은 심경이다.”

검은 안개와 무극중사에는 감정이 섞였다.

좌사나 우사를 대할 때와 달랐다.

무극중사는 전달자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그가 고개를 조아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길을 알려주소서.”

“남위를 찾아라. 놈이 대업의 마지막 조각이다.”

무극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신의의 후예가 혈검신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놈들을 추궁하면 천마신의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네게 맡기겠다.”

무극중사는 몸을 일으키며 재차 다짐을 하듯 말을 건넸다.

“천마신의와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그가 동혈을 떠나기 직전 검은 안개가 시험을 하듯 물었다.

“결심은 굳건한가?”

무극중사는 등을 보인 채 담담한 어조로 읊조렸다.

“흰 눈이 내리지 않고, 붉은 꽃은 밭을 이뤘으니 털옷을 벗고 앉아보네. 숨 쉴 때 입김마저 없으니 제 집 또한 낯설기 그지없구나. 찬바람이 사라지고, 땅이 녹아 싹이 자라네. 천 년 만에 거둬들인 곡식과 풀로 밥을 하였거늘 함께 먹을 이가 하나도 남지 않았구나.”

초탈한 듯 들렸으나, 목소리에 담긴 원한의 무게는 한순간 검은 안개의 침습을 밀어낼 정도였다.

검은 안개의 목소리에도 의지가 깃들기 시작했다.

『원통한가?』

“그렇습니다.”

『살고 싶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대야 말로 일원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유일한 존재이리라.』

무극중사는 고개를 조아린 후 보랏빛으로 번들거리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저는 불사와 불멸 대신 파국을 원하나이다.”

그 순간 검은 안개가 한순간 휘몰아치더니 무극중사를 감쌌다. 음울한 목소리가 영혼에 꽂혀들 듯 무극중사에게 전해졌다.

『내가 너를 이롭게 하리라.』

*

정파에게 있어서 명분이란 족쇄이자, 방패였다.

명분이 없으면 사소한 일도 내키는 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다만 명분만 있으면 지탄을 받아야 할 행위도 어영부영 넘어갔다.

가장 흔한 명분이야 말로 제마멸사였다.

상대방이 사마외도라면 모든 것이 무마됐다.

심지어 사마외도가 어울리지 않게 협객을 자처하고, 정파가 위선자라고 해도 제마멸사라는 명분으로 강호동도의 지지를 얻지 않던가.

명분의 양면성을 가장 뼛속까지 받아들인 건 응당 구파오가였다. 많은 것을 지녔기에 명분을 방패로 삼아 기득권을 유지했다. 반면 명분을 빼앗겼을 때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렸다.

남천휘가 황보세가와 신공부를 손쉽게 무너트릴 수 있었던 원동력 또한 명분이었다.

‘싸워라! 싸워라!’

남천휘는 태상가주인 제갈학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소리 없는 응원을 시작했다.

제갈학을 수장으로 하는 천문회는 제갈표가 가주로 있던 내내 수모를 받아왔다. 가주 자리를 빼앗긴 이상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언젠가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와신상담했으리라.

한데 그 날이 도래했다.

제갈학은 노회한 노강호답게 남천휘가 만들어낸 명분을 절묘하게 낚아챘다.

“가주가 사령신과 관련 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겠소?”

일원과 관련이 있다는 명분만으로 신공부가 봉문을 했고, 먼저 팔을 자르려 했다는 명분만으로 황보세가가 무너졌다.

한데 이번에는 사령신이다.

강호에서 금기시 되는 두 악귀 중 하나가 제갈표와 연결됐다. 당금 강호에서 이처럼 먹음직스러운 명분이 또 어디 있으랴.

제갈표는 다른 의미로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남천휘가 그 어떤 말로 현혹을 해도 흔들리는 건 외부 세력이다. 하나 제갈학의 노련한 혓바닥이라면 가솔들이 흔들리는 건 시간 문제였다.

‘빌어먹을 노괴!’

반면 제갈학은 느긋했다.

천주봉에서 굉음이 연이어 울림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령신의 등장보다 가주 자리를 중시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럴 줄 알았지.’

남천휘가 제갈표를 몰아붙일 때 활용했던 보고서는 천문회의 것이다. 그 내용만 살펴도 천문회가 가주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같은 제갈 씨임에도 세가를 빼앗겼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태상가주는 그야말로 그간의 노고를 치하는 의미로 부여된 명예직이 아닌가. 외인이 세가를 욕보이는 상황에서 당신은 분열을 조장하고 있어!”

제갈표의 일갈에도 제갈학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본가가 환란에 빠졌거늘 자리싸움을 논하는가? 그리고 가주는 어째서 대답을 하지 않는 건가?”

“당신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야. 돌아가시오!”

제갈학이 포문을 열었다.

“사문회를 열어 진위를 파악해야 한다! 가솔들은 들어라. 제갈표에게 혐의가 있으니 태상가주인 내가 판단을 하려 한다. 이의가 있다면 당장 나서라!”

가솔들은 눈치를 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사령신의 등장 이후 생각이라는 걸 멈춘 듯했다.

제갈표도 밀리지 않고 외쳤다.

“감히 세가의 일에 개입을 하려해? 여봐라! 태상가주를 후원으로 돌려보내라.”

가솔들은 이번에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때 하늘에서 그들을 향해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줬다.

쿵!

남천휘가 청석을 산산조각 내며 시선을 끌었다.

그는 무림맹에서 받은 명패를 높이 치켜든 채 외쳤다.

“맹주의 명령을 전하겠다! 모두 꿇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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