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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만렙지존-256화 (256/305)

112, 사부 각성(覺醒). (2)

파진악은 미간을 좁혔다.

그는 팔을 잘린 이후 화를 참지 못하고, 한 가지에 집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성미가 지랄 맞게 변했어도 명색이 좌사의 대제자였다.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은 여전했다.

“주군!”

그는 뒤늦게 모여든 망자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다섯 명의 망자를 비롯해 이백여 명이 넘는 수하들이 침묵했다.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선택은 명확하지.’

파진악은 자신의 허전한 팔을 쓰다듬었다.

차라리 잘됐다.

현월회주인 남천휘는 만만찮은 상대가 아니다.

어찌됐든 콧대 높은 백결공이 꼬리를 만 개처럼 도망치게 만든 존재가 아닌가.

한데 놈이 스스로 도망쳤다.

귀찮음을 덜게 된 셈이다.

“우리는 사부를 친다.”

파진악의 계산은 빨랐다.

어차피 그의 원한은 사부에게 집중된 상태였다.

그는 수하들을 둘러봤다.

십이망자 중 다섯을 대동한 상태였다.

하나 그는 사부를 상대할 때 망자를 활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지금껏 사부는 망자에 대하여 유독 강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야말로 일격에 죽이는 것이 가능할 정도였다.

망자의 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한데 모든 적에게 절대적이었냐고 묻는다면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파진악은 지금껏 사부에게 당했던 일원의 하부조직을 모조리 살폈다. 그 결과 사부는 망자니 일원의 핵심 인력이 아니라면 절대적이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적을 살려뒀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망자는 일격에 죽였으면서 그보다 떨어지는 무인을 서너 번에 걸쳐 죽였다는 차이였다.

“계획대로 진행하라.”

이백여 명의 무인들이 손을 모았다.

그들은 일원에 속했으나, 일원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다만 강호에서 실전된 무공을 가르쳐 향후 우사와의 싸움에서 대비하려 했떤 수하들이다.

‘저들이라면 사부도 제멋대로 날뛰지 못할 게야.’

무려 우사를 상대하기 위해 조직된 녀석들이 아닌가.

파진악은 살기가 가득한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 혈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저 멀리 사부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팔을 잘랐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겉옷처럼 붉은 기운을 온 몸에 휘감았을 뿐이다. 그는 파진악을 비롯한 수많은 무인들을 봤음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독경(讀經)이라도 하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걸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애초부터 사부는 미친놈이 아니던가.

“사부! 죽을 준비는 됐는가?”

파진악이 호기롭게 외쳤다.

사부는 그제야 파진악과 무인들을 발견한 듯했다.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사부였지. 나는 사부였어. 백두 이전에 사부였구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것 같아.”

만변만해휘발액을 봤을 때부터 조각났던 기억의 편린이 뭉쳐드는 듯했다. 그렇게 맞춰진 기억의 조각은 단지 사부의 때만이 아니었다. 그 이전의 기억까지 조금씩 희미하지만 머릿속에서 구체화됐다.

그리고 남천휘의 현월강기와 부딪칠 때마다 기억의 조합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자신이 익힌 무공 중에 천사강림이 있음을 깨달은 것도 그 즈음이다. 그 결과 주변 십 장을 폐허로 만드는 천사강림을 시전 할 수 있었다.

기억의 조합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마치 비탈길을 구르는 수레와 같았다.

사부는 웃었다.

“크하하하하하!”

조금 전만 해도 답답함과 울분의 광소였다면 지금은 속이 후련했다.

“흑천괴뢰의 제자로구나.”

“크흑! 잊지 않았구나. 일단 네 놈의 양 팔부터 잘라주마!”

“흑천괴뢰도 아니고 제자 주제에? 건방지구나.”

파진악은 외쳤다.

“흥! 네 놈의 약점은 이미 간파했다. 쳐라!”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백여 명의 무인이 일차로 달려들었다.

저들은 천뇌포로리대진(天牢捕擄籬大陣)을 익혔다.

‘하늘의 뇌옥처럼 포박하고, 사로잡고, 울타리를 치는 대진이니 놈이라고 해도······.’

파진악의 상념은 이어지지 않았다.

백여 명은 사부를 앞에 두고 거리를 벌렸다.

포위망을 구성하기 위함이다.

그 때 사부는 팔을 옆으로 뻗었다.

그러자 온 몸에 존재하던 붉은 기운이 팔에 휘감겼다. 그리고 이내 손 끝에서 흘러나온 붉은 기운이 검의 형태로 뭉쳐든다.

사부는 붉은 기검(氣劍)을 가볍게 휘둘렀다.

기검은 버드나무처럼 휘었고, 궤적이 눈에 훤히 보일만큼 느렸다.

한데 그 순간 수십 명의 무인들이 산산조각 났다.

사부의 무공은 망자에게만 통하는 것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 때의 사부와 지금의 사부가 달라졌음을 의미했다.

어느 쪽이든 파진악에게 좋을 것이 없다.

“어어.”

파진악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놀라운 광경은 지금부터다.

산산조각 난 무인들의 육편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붉은 기운을 타고 뭉쳐들었다. 그러더니 원래부터 사부의 것이었던 것처럼 온 몸을 휘감고 맴도는 것이 아닌가.

“흐으으으으아.”

사부는 극도의 쾌감을 느끼는 듯 심호흡을 했다.

반면 무인들은 주춤거렸다.

파진악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달랐다.

사람인 이상 본능적인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사부가 반대편으로 손을 뻗었다.

온 몸을 휘감았던 기운이 반대편으로 흘러나갔다.

그리고 기검이 되었고, 그것은 다시 한 번 수십 명의 육신을 찢어발겼다.

솨아아아아아!

분수처럼 솟구치던 핏물이 허공에서 뭉쳐들더니 다시 사부에게 흡수됐다.

사부는 자신의 몸 주변을 맴도는 핏물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이거였구나.”

머리가 맑아질수록 익혔던 무공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무공을 펼칠수록 기억이 돌아왔다.

“어어!”

후미의 무인들이 참다 못해 등을 보였다.

망자와 달리 섭혼술에 걸린 적이 없으니 도주에 망설임이 없다.

“멈춰라!”

파진악이 외쳤으나, 이미 의욕을 잃은 자들이 멈춰설 리 만무했다. 하나 도주하려던 자들은 서너 걸음을 내딛은 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솨아아아!

안개가 자욱하던 숲에서 붉은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형태로 뭉쳐들더니 사부가 되었다. 정상 쪽에 있던 자가 어느새 퇴로를 막아버린 것이다.

“내가 기억을 잃었어.”

그는 하소연을 하듯 연거푸 한 숨을 내쉬었다.

“한데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지 뭔가.”

“축하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보내주십시오. 우리는 저 자의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무인들이 애걸하듯 말했지만, 사부는 귓등으로 흘린 채 말을 건넸다.

“그러지 말고 어떤 방법인지 물어봐줘.”

누군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사부가 헤죽 웃으며 대꾸했다.

“괴겁의 찌꺼기를 짓밟을 때마다 옛 기억이 새록새록 하더라고.”

무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는 순간 좌우에서 핏빛 채찍이 휘몰아쳤다.

혈사우(血絲雨)라는 무공이다.

“으아아악!”

“살려줘!”

파진악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사부인 일원좌사도 저런 신위를 보일 수는 없으리라.

잠시 후 사부가 그의 앞에 섰다.

그는 처음 나타났을 때보다 족히 두 배는 짙어진 듯한 붉은 안개를 휘감고 있었다.

타탓!

파진악은 사부의 신형으로 넷으로 나뉜 채 흩어지는 걸 물끄러미 지켜봤다. 그리고 손을 쓸 사이도 없이 망자의 머리가 으스러졌다.

“여의혈조수도 여전하고.”

파진악은 사부가 재차 자신의 앞에 나타나는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대가 이야기하는 무공은 모두 사령신의 것이 아닌가. 여의혈조수(如意血爪手)는 전해지는 말처럼 손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음에도 신위를 드러냈다.

그리고 사부의 붉은 기운은 더욱 강해졌다.

이제는 아예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사람의 윤곽선만 어렴풋이 비칠 뿐이다.

이쯤 되니 뇌리를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사부가 손을 내젓자 얼굴을 드러났다.

그는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촤악!

마지막 남은 팔마저 잘려나갔다.

“그게 맞는 것 같아.”

파진악은 뒤늦게 반격을 염두에 뒀다.

하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태산처럼 온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은 분명 ‘그’의 독문무공은 군림사령보(君臨邪靈步)이리라.

“나는······.”

사부의 손이 파진악의 말을 끊었다.

피가 솟구치는 가운데 한 차례 혈무가 일렁였다.

“흐음.”

잠시 후 사부가 긴 숨을 흘려냈다.

“하아, 기억났다.”

그의 두 눈에는 세 개의 눈동자가 회전을 하듯 묘하게 일렁였다.

“남추, 이 개종자! 나를 속였어.”

*

“도망친 건가?”

제갈표의 조롱 섞인 한 마디에도 백결공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살고자 함이지요.”

“흑천괴뢰가 알면 땅을 치고 서글퍼하겠군.”

“그 분은 딱히 제자들을 아끼지 않는지라······.”

딱! 딱! 딱! 딱!

제갈표의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팔걸이를 쳤다.

“내 밑에 들어오려고?”

“거둬주신다면야 그러지 않을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호오! 너를 거둬 좌사의 동향을 알게 하라는 의미인가? 네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 그래, 네가 내게 무엇을 알려 줄 수 있느냐?”

백결공은 더욱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천주봉 전체에 매설된 굉천뢰의 개수가 천팔십 개라는 정보 정도겠지요.”

제갈표는 미간을 좁혔다.

“파봤을 리는 없고, 어떻게 유추를 했느냐.”

“일전에 화륜마왕이라는 자의 저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무공은 절정에 불과했지만, 마교 내에서 적대시하는 자가 없을 만큼 폭탄에 정통했지요. 마천종께서 화륜마왕과 친분이 있었으니 분명 그의 비전을 사용하지 않았겠습니까?”

“호오, 과연 아는 것이 많구나.”

그 순간 백결공이 기다렸다는 듯 대리석에 이마를 내리쳤다.

쿵!

“아는 것이 많아 홀로 날뛰다가 곤욕을 치렀습니다. 이제야 제가 유능한 주인을 만났을 때에 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깨우쳤지요. 그러니 동위의 목좌께서 저를 거둬주십시오.”

제갈표는 피식 웃었다.

‘훗, 확실히 타인의 마음을 절묘하게 파고 들 줄 아는구나. 하나 제 조상이 그러했듯 낭고의 상이야.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배를 갈아탈 수 있는 존재이니 오래 지켜볼 이유가 없군.’

그는 규칙적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잠시 뗐다. 이제 힘을 주어 내리치면 팔걸이에 숨겨진 암기가 발출될 것이다.

그리고 백결공은 그것을 절대 피할 수 없으리라.

‘그냥 죽어라.’

제갈표는 망설임없이 손가락에 힘을 줬다.

한데 그 순간 전각 밖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가주! 큰일입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수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각의 창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동시에 굉음이 들려왔다.

쿠쿠쿠쿵-

제갈표는 백결공의 처우를 잠시 미뤄두고 창문을 열어젖혔다.

“저게 뭐야?”

천주봉 전체를 휘감고 있던 안개가 옅어지고 있었다. 아니, 옅어졌다기보다 무언 가에게서 도망을 치고 있는 듯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현월회주가 홀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혈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쾅!

제갈표는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그가 연무장에 들어섰을 때 이미 수백 명의 가솔들이 모여서 천주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쿠쿠쿠쿵!

벼락이 치는 듯, 지진이 일어난 듯.

천주봉 전체가 출렁이는 듯했다.

“이게 무슨 일이더냐?”

가솔들은 머뭇거리다가 비켜섰다.

연무장 가운데 앉아 있던 남천휘는 좌정한 채 다급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 오만방자한 놈이 저런 표정을?’

제갈표는 침음을 흘렸다.

지금은 놈의 생사보다 천주봉 정상의 기물과 신무대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더욱 중요했다.

“내가 제갈세가의 가주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더냐?”

남천휘는 제갈표를 힐끔 쳐다본 후 다시 반대편을 흘겨봤다.

“시간 없으니까 조용히 합시다.”

“뭐라?”

“급하다고! 더 이상 늦으면 큰일이 날 거야.”

남천휘는 제갈표를 무시한 채 읊조렸다.

‘야!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돌려라.’

잠시 후 남천휘의 귓가에 낭랑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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