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운수좋은 날. (2)
남천휘는 용린쌍도를 꺼냈다.
진법이 만들어낸 환영임을 알지만, 오감이 변질되어 실체화됐음을 알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촤악!
호랑이 머리를 갈랐고, 독수리의 몸통을 베었다.
외나무다리 아래로 금수의 시신이 사라졌다.
어디까지 떨어지나 궁금할 법도 하다.
하나 보지 않았다.
진법의 묘용을 거스르지 않을 뿐 진법임을 잊지 않은 게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보게 되고,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호기심을 보였다. 진법은 그런 마음의 틈을 파고드는 것으로 진법이 시작된다.
‘확실히 이 정도의 진법은 단순히 오감을 건드리는 것 이상이군.’
분명 자욱한 운무에는 온갖 약재와 독이 섞여 있을 것이고, 기문둔갑이라 불리는 환술의 묘용까지 섞여 있으리라.
크허허허허헝!
이번에는 흑곰이 네 발로 달려들었고, 하늘에서는 뱀처럼 생긴 기물이 바람을 타고 흐느적거렸다.
남천휘는 전과 마찬가지로 베었다.
‘거스르지 말고, 흐름에 몸을 얹은 후······.’
생문을 찾는다.
이것이 남천휘가 도출해낸 신마대전의 파해법이다.
만약 처음에 호랑이와 독수리가 등장했을 때 환영임을 비웃었다면 큰 해를 입었을 터였다. 반대로 진법에 감정을 이입하는 순간 다시는 이곳을 떠나지 못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외나무 다리는 하나의 상징이다.
절벽과 절벽 사이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다리.
이것은 현실과 환영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라는 의미였다.
‘아직 때가 아닌가?’
잠시 금수의 습격이 멈췄다.
마치 유혹을 하듯 사방이 고요했다.
수양이 깊은 자라고 해도 이 순간을 참지 못하고 다리를 건넜으리라.
하나 남천휘는 기다렸다
그러자 사방에서 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광풍을 논할 때 칼바람이라는 말을 쓴다. 한데 눈앞에서 부는 바람은 뜻 그대로의 칼바람이다.
쇄애애애애애애액!
수백 자루의 검 좌우에서 들이쳤다.
오직 남천휘가 서 있는 자리만 비켜갈 뿐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이라면 기다려야 마땅했다.
일부러 칼날에 몸을 던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나 남천휘는 걸음을 내딛었다.
쉭쉭쉭쉭쉭쉭!
피부가 찢기고, 피가 흩날렸다.
환영이지만, 고통이 느껴진다.
그러나 남천휘의 정신과 마음은 여전히 굳건했다.
‘마비산이라도 섞은 건가?’
온 몸으로 쏟아지는 칼을 받아내며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그가 다리를 지나 맞은편 절벽에 발을 내딛는 순간 칼바람이 사라졌다.
외나무다리도 사라졌고, 맹수의 습격도 끝이 났다.
신무대진의 첫 관문을 통과했다.
남천휘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주변은 처음의 오솔길로 돌아왔다.
다만 좌우에 싸리나무가 가득했고, 가지의 끝에는 날카로운 철편이 가득했다. 조금 전 칼바람으로 인한 고통은 저것이었으리라.
‘쯧.’
옷이 갈가리 찢겼고, 곳곳에 생채기가 가득했다.
금강불괴지신이 아니라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나 초절정은 내외의 조화를 이룬 상태가 아닌가.
조만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후훗, 내가 이 정도라고.’
남천휘는 자부심을 보였다.
그럴 만 했다.
그는 S급 통찰과 S급 불굴을 지녔다.
게다가 S급 의술마저 추가됐다.
또한 시스템의 힘으로 세 종류의 물약을 쉼 없이 흡입할 수 있었다. 그 말인즉슨 언제나 심신의 최고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신무대진의 독이나 환영은 악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거기에 기연까지 얻었으니!’
어찌됐든 남천휘는 최고 수준의 천문나진법을 누구보다 빠르게 통과한 존재였다. 그것도 본래 십오 단계였던 것을 오십 단계까지 확장한 것을 돌파했다.
제갈세가의 빈객으로 있는 문사들은 대부분 강호방파에 뜻을 뒀다. 언제고 군사나 총관이 되어 칼을 이기는 붓이 되려 했다.
그러니 병법과 진법을 연구하는 자들이 많았다.
남천휘는 그들 모두를 논파하고 이 자리에 오른 존재가 아니던가.
‘진법? 이렇게 깨면 참 쉽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운이 좋다.
재이가 투덜거리듯 알림을 울렸다.
◎ 5분이 지났습니다.
- 입춘대길 특별행사의 잔여 시간은 25분입니다.
이 녀석이 요즘 들어 감정을 자주 내비친다.
성장기인가?
‘아서라. 이 놈아. 내가 너를 모를까? 너는 내가 진법 안에서 회회회판과 드잡이질을 했음 했겠지. 진법의 환영이 눈앞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시간 내에 회회회판을 돌리기 위해 끙끙 앓는 나를 보며 즐거워하려고 했을 게야. 그리고 마무리로 꽝을 연발하면서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리려 했겠지. 신무대진과 회회회판이 겹쳤지만, 내 운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 내가 증명하마.’
남천휘는 입춘대길 특별행사의 시간이 흘러감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15분 내에 진법을 통과하고 나머지 15분으로 회회회판을 돌린다!’
이것이 남천휘의 목표였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껏 회회회판의 당첨 과정을 세심하게 연구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같은 상황에서도 당첨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묘책을 마련한 상태였다.
‘너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게 취미지?’
15분 후 너는 신화급 아이템을 뽑는 것이 취미인 이 몸을 보게 될 것이다.
◎ 신무대진의 지금 상태는 어떠한가요?
녀석, 속내를 들킨 것처럼 말을 돌리기는.
‘어! 잠깐. 너는 이게 보이지 않는 거냐?’
◎ 시스템은 인간이 만들어낸 빛의 기울기나 약재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이 새끼야! 그럼 그냥 나한테 길을 알려주면 되는 거잖아.’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대두동은 그렇다손 치자.
하나 신공부의 진법이나 비밀의 숲은 도움이 절실했다. 한데 재이는 그 모든 것을 꿰뚫어봤음에도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배신감이 차올랐다.
◎ 현재 주인님은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를 진행 중입니다. 시스템은 재료를 준비할 뿐 건물을 올리는 건 주인님의 역할입니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비유였어.
그렇다고 해서 화가 누그러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지금 내 눈앞에는 사막이 펼쳐져 있어.’
그 말 그대로였다.
외나무다리에 이어 대막이 나타났다.
태양의 열기가 육신을 짓눌렀고, 금빛 모래가 시야 끝까지 퍼졌다. 열기와 습함으로 인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진 기분이다.
하나 문제될 것은 없다.
남천휘는 이미 진법에 구애받지 않은 상태였다.
경지와 상관없이 현혹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저게 문제네.’
남천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은 백두가 보였다. 만약 허리춤에 줄을 연결하지 않았다면 백두는 여전히 첫 관문의 다리에서 헤매고 있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신무대진에 갇혔다가 겨우 도망쳤다고 했지.’
당시에는 제갈세가의 진법이 그만큼 대단한 것이라 여긴 채로 넘어갔다. 하나 남천휘가 직접 체험한 신무대진은 신묘했지만, 극악의 난이도라고 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특기와 무공의 힘으로 버텨냈다.
그러니 백두 또한 그랬어야 했다.
그는 어찌됐든 아이템과 특기로 무장한 자신을 상대로 삼박사일 동안 쉬지 않고 대적한 존재가 아닌가. 제아무리 백두가 기억을 잃었어도 상승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평정심이 우선시되어야 했다.
한데 백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어?”
백두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한데 어울리지 않게 동그란 눈망울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툭 치면 눈물이 방울처럼 흘러내릴 기세였다.
“끄어어, 죽을 것 같아. 속이 뒤집혔어. 토악질을 할 것 같아.”
그러더니 정말로 아랫배를 부여잡은 채 헛구역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누런 위액을 한 바가지나 쏟아낸 후에야 널브러졌다.
“아! 짜증난다. 다 죽여 버리고 싶다. 씹고, 뜯고, 찢고, 모조리 부숴버리고 싶어.”
남천휘는 백두의 하소연을 듣다가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망자만 보면 살의가 치솟는다고 했지?”
“응.”
“그리고 망자는 네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쉽게 없앨 수 있었다고. 그렇다면 일원 자체가 네 기운과 상극이 아닐까?”
백두는 눈물을 훔치며 수긍했다.
“그런 것 같아.”
“그렇다면 신무대진은 망자보다 상위의 존재가 손을 댔을 수도 있겠네. 그러니까 적대감은 여전한데 예전처럼 쉽게 돌파할 수 없는 거야.”
남천휘의 말에 백두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리쳤다.
“아하! 그렇구나.”
백두는 또다시 토악질을 했다.
‘흐음, 대머리는 창백해질 때 정수리까지 하얗게 변하는구나.’
남천휘는 뜻밖의 발견을 뒤로 한 채 고개를 돌렸다.
백두의 말을 통해 일원의 정체를 확신하게 되었다.
‘백두가 사령신을 이은 것처럼 일원은 괴겁천마의 뒤를 이었겠군.’
절로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제갈세가는 백결공보다 일원에 더욱 근접한 세력이 된다.
‘이 안에서 무슨 짓을 벌여도 이상할 것이 없겠군.’
어쩌면 진법을 열어준 것 자체가 함정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일 수도 있었다.
◎ 이것이 기진의 힘일까요?
- 대국을 보는 판단력이 돋보이십니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재이의 칭찬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녀석은 지금껏 몇 번이나 무릎을 꿇어왔다. 하나 지나가 보면 그런 행위 자체로 추진력을 얻지 않았던가.
‘이 앞에 뭔가 있기는 있구나.’
남천휘는 백두를 억지로 일으켰다.
“여기 있을래?”
백두는 도리질을 치며 남천휘의 소매를 잡았다.
“싫어. 함께 갈 거야.”
기왕이면 천수련이나 연하연이 이런 대사를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남천휘는 입맛을 다시며 백두를 이끌었다.
허리춤의 줄을 고쳐 맸고, 자신의 행동만 따라 하기로 입을 맞췄다.
사막을 통과했다.
이미 진법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기에 큰 고비라고 할 만한 위기도 없었다. 다만 등 뒤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백두의 앓는 소리가 귀찮았을 뿐이다.
“으아아아! 이제야 좀 살 것 같아.”
백두는 다시금 오솔길에 들어선 후에야 숨을 헐떡거렸다.
“도대체 여기는 왜 들어오고 싶은 건데?”
“글쎄다.”
“여기 뭐 있어?”
남천휘의 물음에 백두는 천진난만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대꾸했다.
“기억이 나지 않아. 그저 비천무상도나 집백등처럼 강하게 남아 있어. 뭔지는 나도 모르지. 그런데 마치 꽃 향기처럼 은은하게 코끝을 맴돌아. 그리고 그 향기가 여기로 이어져 있을 뿐이야.”
보상으로 받게 될 신화급 물품이 원인이다.
‘백두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입춘대길 특별행사의 시간을 확인 하니 아직도 22분이나 남았다.
“일단 가자!”
남천휘는 쉬고 싶다는 백두를 억지로 끌고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신무대진의 마지막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얼음 벌판이 등장했다.
한참을 걸었더니 깎아지를 듯한 빙벽이 앞을 막아섰다. 이것은 신무대전(神霧大殿)이 위치한 천주봉의 등산로일 터였다.
미끄러지고, 파묻히기를 수십 번.
마침내 천주봉 정상에 올랐다.
자욱했던 안개가 사라지고, 황량한 정상(頂上)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대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초라한 집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시간!’
◎ 입춘대길 특별행사의 잔여 시간은 19분입니다.
그렇지!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했다.
‘자! 이제 누가 운이 없는 거지?’
재이를 실컷 놀려주려 했거늘 녀석은 삐치기라도 한 듯 말이 없다.
‘운 좋은 남천휘가 나가신다!’
남천휘는 보무도 당당하게 초옥으로 발길을 돌렸다.
천주봉의 정상에는 풀 한 포기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함정을 설치하거나, 숨어서 지켜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물건만 챙긴 후 회회회판을 돌리자.
인벤토리의 자수정을 모조리 소모하려면 한 시가 아까웠다.
그렇기에 거침없이 초옥의 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남천휘는 초옥의 내부를 확인하자마자 인상을 썼다.
허리 높이의 통나무가 세워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어떠한 물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 선물은······.’
발밑의 화살표는 통나무를 가리켰다.
남천휘는 통나무를 보고 재차 인상을 썼다.
통나무는 안을 긁어낸 듯 파여 있었고, 그 안에는 정체모를 용액이 가득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천장에는 사람의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설마 빗물받이인 건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남천휘는 불안한 마음에 통나무를 슬쩍 건드렸다.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 만변만해휘발액을 습득하셨습니다.
- 해당 아이템은 신화 등급으로······.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재이의 설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짐승의 울음 같은 앓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 저 놈은 여기까지 와서도 저러네.’
남천휘는 고개를 돌렸다.
백두를 향해 한바탕 욕이라도 퍼부어줄 요량이었다.
한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백두는 만서각에서 광기를 일으켰던 것처럼 시뻘개진 눈으로 남천휘를 노려보고 있었다.
“으으.”
“백두야, 왜 그래?”
“크으으으.”
“사부님, 진정하시지요.”
남천휘는 백두를 진정시키고자 했다.
회회회판을 돌리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란 말이다.
그 때 백두가 씹어뱉듯이 읊조렸다.
“만변, 만해, 휘발.”
동시에 엄청난 기의 폭풍이 휘몰아치며 초옥 전체를 산산조각 냈다.
콰콰콰콰쾅!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흩날리는 초옥의 파편이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