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누구를 위한 금제인가? (3)
*
제갈세가(諸葛世家).
촉의 승상이었던 제갈량을 시조로 칭했으나, 확인은 불가능했다. 하나 그들의 지혜를 부정하는 자들은 드물었다. 그리고 강호사에 수많은 방파가 부침을 겪었지만, 구파와 더불어 언제나 건재함을 자랑했다. 세가 중에서 제갈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곳은 남궁세가 정도였으리라.
그렇기에 제갈세가의 가솔들은 자부심이 상당했다.
장락선(帳落扇) 이위붕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혈족이 아님에도 대주의 자리에 올랐을 만큼 문무가 출중했다. 병법과 진법은 물론이고, 한 자루 철선(鐵扇)으로 수십 명의 도적떼를 처단한 것으로 명성을 날렸다. 하나 성공에 대한 욕망은 지식과 반비례했다.
그렇기에 백여 명의 수하를 엄정하게 다뤘다.
자신의 수족처럼 가르쳤다.
외원의 타격대 중 선운대가 으뜸이라고 자부했다.
한데 그랬던 수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이조의 조장은 검으로 적의 주먹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검이 엿가락처럼 구부러지며 주인의 몸을 후려쳤을 뿐이다. 이조장은 위가 우스울 만큼 허무하게 나뒹굴었다.
‘칠 년 전 본가를 공격했던 악적이 나타났다고 해서 온 것뿐인데······.’
이위붕은 조금 전만 해도 수하들과 순찰을 돌던 중이다. 적이 나타났다는 말에 공을 세우고자, 수하들을 소집했다. 한데 제갈세가의 공적은 뒤에서 구경 중이고, 생뚱맞게 어린놈이 날뛰고 있었다.
제갈세가의 정보망의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니 산동성의 현월회 또한 시야에 둔지 오래였다. 다만 일문의 주인인 남천휘가 천 리 밖 융중산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저 놈 누구지?”
중년의 검수가 다가왔다.
“이 대주도 모르시오?”
이위붕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 대주. 이렇게 된 이상 공을 논할 때가 아닌 것 같소.”
중년검수는 이위붕과 같이 외원의 대주를 맡은 상관삭이다. 평소에는 공을 다투는 상대였지만, 이대로라면 애꿎은 수하들만 죽어나자빠질 터였다.
“선운대! 사!”
이위붕의 외침과 동시에 난잡하던 대원들이 뱀처럼 일렬로 늘어선 채 골목을 장악했다.
“추검대! 익!”
선운대(扇雲隊)가 창처럼 찔렀고, 추검대(錐劍隊)는 날개처럼 벌어진 채 포위망을 펼쳤다.
하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서너 명씩 쓰러지던 것이 한 명씩 꼬꾸라지는 것으로 변했을 뿐이다.
퍼퍼퍼퍽!
골목의 담장이 태풍에 휘말린 것처럼 우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몸을 빼지 못한 십여 명의 무인들이 담장 아래 깔린 채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로 남천휘의 일갈이 울렸다.
“퀘스트도 뜨지 않는 것들은 빠져!”
이위붕은 인상을 썼다.
“저 놈도 정상은 아니군.”
“그나저나 좁은 골목으로 인해 검진의 위력이 줄었소. 우리도 갑시다!”
제갈세가가 무공에 힘쓴다고 해도 명문거파에 비해서는 한 수 쳐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여타의 문파와 달리 조직력에 심혈을 기울였다.
타격대는 각자의 검진을 익히고, 향후 대와 대의 대규모 검진을 수련한다. 이후에는 일대의 절반과 이대의 절반을 섞어 검진을 익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검진을 펼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합!”
두 대주의 일갈을 시작으로 검진이 변화했다.
뱀처럼 늘어졌던 선운대가 물러났고, 날개처럼 펼쳐졌던 추검대가 뭉쳐들었다. 그렇게 한덩어리가 된 무인들은 각자 이위붕과 상관삭이라는 두 개의 머리를 따라 움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두가 하품을 했다.
“지루하군.”
남천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전방의 무인이 아니라 등 뒤에서 투덜거리는 백두를 향해 주먹을 날릴까 잠시 고민했다.
“지금이다!”
무인들은 남천휘가 잠시 머뭇거리는 걸 지쳤다고 여겼나 보다.
이위붕과 상관삭이 좌우에서 쇄도했다.
지금까지의 움직임으로 비춰봤을 때 두 사람을 막는 순간 수하들이 부채처럼 펼쳐지며 들이닥칠 것이다.
‘둘 중 부채를 든 놈이 조금 더 빨라 보여.’
남천휘는 이위붕을 먼저 상대할 요량이었다.
그 때 백두의 시큰둥한 한 마디가 귓가에 들렸다.
“회주,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이러다가 해 떨어지겠네.”
울화가 치밀었다.
북조산에서 삼박사일을 싸웠을 때 두 사람은 동수를 이뤘다. 백두는 기억을 찾기 위해, 남천휘는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상대의 비아냥거림에 불현 듯 자괴감이 휘몰아쳤다.
‘’내가 뭐하려고 여기에 있나······.‘
활이 부러졌으니 보상을 받는다.
목적을 단순화하는 순간 저들과의 싸움은 의미를 잃었다.
남천휘는 뒷걸음질 치며 두 사람을 끌어들였다.
콰쾅!
쌍장은 전방이 아닌 좌우로 향했다.
좌우의 벽이 무너지며 찰나간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흙먼지가 잠시 저들의 시야를 가리는 사이 2초가 흘렀다.
촤라랑!
“받을 수 있으면 받아봐라.”
나직한 읊조림에 이어 백룡과 흑린이 불을 토했다.
시뻘건 강기가 현월의 형태로 전방을 찢어발겼다.
콰콰콰콰쾅!
*
백 년 간의 평화.
강호의 안정은 곧 정체를 뜻했고, 고인 물은 썩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제갈세가 또한 이치를 비켜나가지 못했다.
“무당이 구파의 자존심을 논하며 안주할 때 우리가 호북을 먹어야 합니다.”
매파의 논리였다.
그들은 제갈세가가 구파의 명분을 따라갈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세속적인 방파답게 실리를 추구해야 마땅하다고 외쳤다.
“신마대전의 폐해로 구파오가는 물론이고, 중견 방파의 존립마저 위태롭다. 무후의 후손을 자처하는 우리가 승냥이처럼 이권을 노리는 건 불합리하다.”
비둘기파의 논리는 간단했다.
그저 강호의 상징인 구파가 하는 대로 따라가자는 것이 전부였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전란을 경험한 이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공명심에 목마른 이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결국 급진적인 성향의 제갈표가 가주 자리에 앉았다.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세가의 재편이었고, 외부 인사들이 대거 등용됐다.
핏줄보다 능력을 우선시했다는 뜻이다.
이위붕이나 상관삭과 같은 자도 이런 기회를 틈 타 대주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기에 제갈세가의 대회의가 열리는 대전에 모인 자 중 외인의 숫자는 절반을 넘길 정도였다.
“사부가 왔다고?”
“그렇습니다. 제자로 보이는 애송이와 함께 나타났습니다. 현재 선운대와 추검대가 맞서고 있습니다.”
제갈표는 침음을 내뱉었다.
“흐음, 그간의 행적으로 보았을 때 사부는 종잡을 수 없는 존재다. 강점은 많고, 약점은 없지. 그런 자를 처리할 때에는 한 번에 뿌리를 뽑아야 해.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한다.”
외원주인 초계황은 흰 수염이 바닥에 닳을 만큼 고개를 숙였다.
“외원 팔대 중 가용 인원을 모두 파견했습니다.”
“용무대도?”
용무대(龍武隊)는 외원 팔대 중 으뜸이다.
그들은 사천성과 인접한 주강의 수적들을 토벌하고 며칠 전 복귀한 상태였다.
“네. 삼 일을 쉬었으니 평소와 다르지 않습니다.”
“외원주의 조심성은 나도 배울 때가 많소. 검을 때릴수록 강해진다고 했으니 용무대가 나설 일이 있다면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외다.”
내원주인 제갈길이 말을 보탰다.
“외원의 삼십육검성결자도 내보낼까 합니다.”
좌중이 웅성거렸다.
삼십육검성결자(三十六劍星結者)는 제갈세가에서 키워낸 주력으로 대천강방진(對天剛防陣)을 익힌 기재들이다.
“그들까지 내보낼 필요는······.”
“섣불리 전력을 드러냈다가 실기할까 두렵군요.”
그도 그럴 것이 삼십육검성결자는 본래 구파의 고인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한 사람의 고수를 상대하기에 최적화된 방진으로 소림의 나한진을 흉내낸 것이다.
제갈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사부라면 일인으로 초절정을 넘어선 고수가 아닌가. 그런 자를 상대로 실험을 한다면 보완점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게야.”
가주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갈길은 손에 쥐고 있던 팻말을 내밀었다. 곁을 지키던 무인이 팻말을 받아들고, 경공을 펼치며 대전 밖으로 사라졌다.
“자! 그럼 하던 일을 마저 마무리 합시다.”
내원의 군사 중 한 명인 제갈숙이 손을 모았다.
“맹의 문상인 백결공이 사마외도의 간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놈이 본가의 천문나진법을 내세워 입맹을 했으니 대비책을 세워야 할 듯합니다.”
“숙, 자네가 맹에 서찰을 한 장 쓰게. 백결공의 오만방자함을 성토하고, 공적 추살에 기꺼이 힘을 보태겠다고 한다면 저들도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할 게야.”
“존명!”
“자! 다음이 현월회였던가?”
제갈표가 화두를 꺼내자, 장로 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가 내에서 정보를 관장하는 자로 산동성의 현월회에 대한 보고를 하려는 게다.
“현월회의 회주는 남천휘라는 자로······.”
그 때 대전 밖에서 무인이 뛰어들어왔다.
그는 가주인 제갈표에게 포권을 한 후 상관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했다.
“무슨 일인가?”
“선운대와 추검대가 무너졌습니다.”
“흐음, 사부의 제자라는 놈의 무위가 제법이군.”
“강기를 사용했답니다.”
좌중이 한 번 더 웅성거렸다.
절정의 무인도 꼼수를 사용한다면 강기를 펼칠 수 있으리라. 하나 선운대와 추검대가 무너질 정도의 강기라면 초절정의 고수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제갈세가를 적대하는 초절정의 무인이 두 명이나 된다는 뜻이다.
“흥미롭군.”
제갈표가 코웃음을 쳤다.
“이미 용무대를 포함한 외원의 사대가 공격을 시작했답니다. 제아무리 초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세월을 뛰어넘을 수는 없지요. 내공이 바닥나는 대로 곧장 제거할 수 있을 겁니다.”
“좋아. 다시 현월회로 넘어가지.”
보고가 계속됐다.
“최근 초승달 형태의 도강을 선보였답니다. 현월회라는 이름도 강기의 형태에서 따온 듯합니다. 현재 황보세가를 비롯한 삼정은 현월회에 완전히 종속된 듯 보이며······.”
“가주! 가주!”
제갈표는 미간을 찡그렸다.
가전 회의 중 장로라는 자가 저처럼 경박하게 나타나는 것이 마뜩찮을 리 만무했다. 하나 장로는 제갈표의 표정을 살필 여력도 없이 말을 이었다.
“비검대와 팔기대, 적창대가 전멸했습니다.”
선운대와 추검대가 무너진 것이 불과 조금 전이다.
한데 외원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타격대가 모조리 전멸했다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제갈표의 여유롭던 표정이 무너졌다.
“······.”
그리고 속내를 다스릴 사이도 없이 뛰어들어온 전령의 말에 노기를 드러냈다.
“용무대가 전멸했습니다!”
“똑바로 얘기해라!”
전령은 황급히 부복한 후 말을 이었다.
“적이 두 자루의 칼을 쓰며 강기를 쏟아내는 탓에 용무대는 삼 합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쓰러졌습니다. 현재 삼십육검성결자와 대치하고 있으며······.”
쾅!
제갈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멈춰라! 멈춰야 해!”
제갈숙이 자부심을 보였다.
“가주, 성결자는 패배하지 않습니다.”
제갈표는 제갈숙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멍청한 놈! 이미 세가의 삼분지 일이 무너졌다. 행여나 성결자마저 패배한다면 강호의 평가를 어찌 받을 생각이냐? 이겨도 망신이고, 패배한다면 존립의 문제다!”
제갈숙은 내원주이면서도 넙죽 업드렸다.
“당장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통첩을 보내라! 무가 아니라 문으로 상대하겠다.”
*
촤라라락!
남천휘는 용린쌍도를 거둔 후 사절이 보낸 서찰을 받아들었다.
- 지자의 가문에 들어오려는 자.
- 검이 아닌 붓으로 말하라.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재이야.’
◎ 예, 주인님.
남위기 켜라.
‘누가 더 많이 아는지 한 번 겨뤄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