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238화 (238/305)

105, 분홍신.

“이상으로 현월회가 산동강호의 필두가 되어 억조창생의 편안함에 한 축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나이다.”

소림의 고승처럼 법복을 차려입은 일청대사가 축언을 끝냈다. 그리고 남천휘가 현월회의 회주로서 산동의 안녕을 책임지겠다는 다짐이 이어졌다. 뒤이어 현월회에 가입한 중소방파들의 수장이 죽간에 서명을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됐다.

그와 동시에 재이가 공식적인 현월회의 탄생을 알렸다.

띠링-

◎ A급 상설 조직 ‘현월회’를 만들었습니다.

- 현월회의 영역만큼 특기 ‘유지’가 발동합니다.

- 성소는 차후 현월회의 행동반경과 업적을 고려하여 최적화된 지역에 자동으로 설치됩니다.

- 보상으로······.

남천휘는 한숨을 내쉬었다.

창립행사가 이어지는 내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이미 산동강호를 제 것처럼 여기고 지냈던 상황이다. 이제 와서 눈물을 흘리거나, 가슴이 벅찰 만큼 감동을 느끼기란 불가능했다.

‘빨리 끝내고, 문상을 때려잡아야지!’

이러고 있었다.

한데 재이의 알림은 달랐다.

현월회는 산동 전체를 포함했다.

그러니 현월회의 영역만큼 특기 ‘유지’가 발동한다는 건 산동성 내에서는 언제든 문파를 관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유지(有志).

이것은 산동의 주인이 되었다는 상징이다.

비로소 강호의 한 축에서 지존(至尊)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 이제 한 성을 마무리했을 뿐입니다.

재이가 찬물을 끼얹었다.

남천휘는 그것을 시원하게 받아들였다.

‘어리석은 것. 뭐든 처음이 중요한 거야. 앞으로 내가 하나를 하면 셋으로 소문이 날 것이고, 천하에 퍼진 후에는 백이 되겠지.’

재이는 침묵했다.

만약 녀석이 실체화되었다면 분명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으리라.

‘바보냐? 언제 중원십삼성을 돌아다니면서 정벌을 해. 내가 무슨 건국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한 건 질색이야. 복건이나 광동 같은 곳에 갔다가는 쪄죽을지도 모른다고.’

오랜만에 재이를 꾸짖었더니 속이 다 시원했다.

‘까불지 말고 상황판이나 띄워봐.’

《현월회(弦月會)》

- 회주 : 용린협 남천휘.

- 군사 : 문향후 사마의.

- 장로 : 5 명.

- 무력 : 창월대, 칠야대

- 소속 : 139개 문파.

이렇게 눈으로 보니 감회가 새롭다.

현월회의 장로는 다섯 명으로 각기 황보세가와 신공부, 그리고 청도문의 역할을 대신할 동해팔문의 대표가 맡았다. 또한 무림맹에서 파견한 명숙과 더불어 곡부남가의 빈객이었던 서산노옹까지 장로로 임명했다.

‘서산노옹의 성정이라면 도덕적으로 좋은 기준이 될 거야. 그런데 사마의는 뭐냐?’

그는 명숙들을 접대하느라 여념이 없는 사마의를 흘겨봤다. 남위기로 검색하지 않아도 알아차릴 만큼 노골적인 별호가 아닌가.

문향후(文鄕侯)라니.

‘제갈량이 무향후니까 저는 문향후라는 건가?’

어디로 봐도 사마세가보다 자신이 윗줄임을 드러내기 위한 별호였다. 또한 사마의의 멋드러진 별호가 이렇게 빨리 만들어졌을 리 없으니 돈의 힘을 빌렸으리라.

먹물이 가득 든 녀석이기 때문일까.

자신의 공들여 지은 용린협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주군, 칠야대주인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양대안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소혜를 힐끔거리는 모양새가 얄미웠지만, 명색이 현월회의 무력을 책임지는 녀석이 아니던가.

어쩔 수 없이 받아주었다.

그리고 말석으로 쫓아냈다.

‘아직도 소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니! 그거 뭐였지?’

◎ 철컹철컹.

그래, 그거!

‘소혜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이유는 모르겠다만, 저 놈이야 말로 철컹철컹인가에 당해도 싸지!’

양대안에 이어 낯익은 사내가 다가왔다.

북풍대의 대주였던 조상이다.

혜소와 더불어서 가장 신기한 존재였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공력이 늘고, 칼질 한 번에 깨달음을 얻는 천재란 저들이 아닐까 싶다.

‘반 년 사이에 아주 환골탈태를 했네.’

조상의 눈동자에는 정광(正光)이 가득했다.

“조 대주는 그 사이 또 깨달음을 얻었나 보오.”

남천휘의 농에 조상은 멋쩍은 표정을 보였다.

“운 좋게 작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헉! 농담이었는데.

현월회 총교두인 양방언의 말에 의하면 조상은 이미 신교대의 조장 수준을 뛰어넘었단다.

“대단하네요.”

조상은 겸양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모든 것이 소가주와 삼공자, 아니 회주의 덕입니다. 강호를 통틀어도 저만큼 호사를 누리며 수련하는 무인은 없을 겁니다.”

빈 말처럼 들리지만, 빈 말은 아니다.

지금껏 조상에게 투자한 영약만 해도 은자 십만 냥은 족히 될 터였다. 하나 먹는 족족 몇 배의 성장을 이루니 아까울 리가 없다. 오죽 하면 돈에 민감한 막 총관마저 창고의 금은보화를 털어다 영약을 먹였겠는가.

“본 가를 위했던 조 대주의 마음에는 아직 한참 모자라지요.”

조상은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영원히 모자라게 될 겁니다. 곡부남가를 향한 제 마음은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 방금 진짜 협객 같았다.

남천휘는 언제고 써먹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창월대를 잘 부탁합니다.”

조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몸이 가루가 되어도 현월회만은 지켜내겠습니다.”

남천휘는 웃었다.

현월회의 창립은 황보세가에서 알렸으나, 근거지는 곡부남가가 아닌가. 그러니 조상의 다짐은 곧 곡부남가를 향했을 터였다.

‘칠야대와 창월대를 만들었으니 이제 백룡대와 흑린대도 만들어야 하나?’

창월은 동지를 뜻하니 그야말로 밤이 가장 긴 하루를 뜻했다. 그리고 칠야 또한 칠흑 같은 어둠을 의미하지 않던가. 그러니 창월대(暢月隊)와 칠야대(漆夜隊)의 존재의미는 단순했다.

남천휘의 뜻으로 움직인다.

그 과정에 있을 정마(正魔)와 살생(殺生)의 구분은 개의치 않으리라.

남천휘는 조상이 떠나간 후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지금껏 마주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눈을 뜨면 그 사람들이 대부분 함께 하고 있었다.

천재가 가니 또 다른 천재가 왔다.

“형님, 고생 많으셨어요.”

혜소였다.

녀석과의 인연은 생각보다 깊었고, 길게 계속됐다.

그리고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현월회의 사자를 맡기려 했다.

하나 녀석은 손사래를 쳤다.

산동이 안정됐고, 현월회마저 탄생했으니 동생을 찾으러 떠나겠다고 하더라.

“하오문이나 개방에서는 연락이 없고?”

이미 사적으로 은자 수천 냥 짜리 의뢰를 걸어놓은 상태였다.

혜소는 고개를 내저었다.

“평생 떠돌면서 찾았어도 만나지 못한 동생이잖아요. 돈을 써서 금방 찾으면 그것도 나름대로 서운하겠는 걸요.”

녀석은 너스레를 떨며 씁쓸함을 뒤로 했다.

좌절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끝끝내 운명을 극복하려는 녀석의 의지가 엿보였다.

‘혜소 같은 녀석은 잘 되어야 하잖아. 안 그래?’

이쯤 되면 하늘도 감복하여 여동생을 떡 하고 나타나게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한데 그 순간 연하연과 함께 음식을 가져오는 여인이 보였다.

소혜다.

‘어.’

남천휘는 고개를 슬쩍 돌렸다.

혜소다.

‘소혜, 혜소.’

중얼거림은 끝내 목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소혜! 혜소.”

왜 이걸 몰랐지?

‘재이야, 너도 몰랐냐?’

아니, 넌 관심이 없었겠지.

매일 같이 죽고, 죽이는 강호의 원귀가 되어 지존과 군림을 갈망하는 존재가 아니더냐.

◎ 그렇지 않습니다만······.

됐고!

“두 사람 다 이리 와봐.”

혜소와 소혜를 나란히 세웠다.

남천휘는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하나 대답은 단호했다.

“아닌데요.”

“아닙니다.”

남천휘는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왜?”

소혜는 한 숨을 쉬더니 자리를 떠버렸다.

저! 철컹철컹할 녀석 같으니라고.

“형님, 오해십니다.”

혜소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소군사와는 이미 몇 번이나 만났는걸요. 애초에 형님이 부재중일 때 곡부남가를 대신해 저와 접촉한 것이 소군사였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름이 비슷해서 혹시나 했지요. 한데 곡부남가의 가주께서 소군사를 거둘 때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소군사는 제남 출신이라고 하던데요.”

“그, 그래?”

“네, 아닙니다.”

남천휘는 수긍했다.

보면 볼수록 닮았지만, 당사자가 아니라니까.

“네 동생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나 혜소는 이번에도 자신보다 남을 먼저 걱정했다.

“저는 오히려 혈검살의를 생각했는데요.”

“아!, 그래. 그들도 함께 했어야 했는데.”

곡부남가에 있는 빈객 또한 대부분 초청됐다.

하나 막 총관은 가문을 지키기 위해 남았고, 그의 술친구인 백주검 또한 귀찮다며 자리를 지켰다.

친구를 빼앗긴 서산노옹의 표정이 사뭇 쓸쓸하다.

하나 일청대사와 함께 올곧음을 논의하다보니 어느새 주름진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했다.

그러다 보니 곡부남가에 남은 혈검살의가 떠올랐다.

그들은 스스로 불참했다.

출신이 문제였다.

당대에 이르러 훌륭한 의술로 많은 사람을 살렸다지만, 근본은 괴겁천마의 사성신위 중 한 명인 천마신의 진전을 잇지 않았던가.

무림맹에 책잡힐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곡부남가에 남은 것이다.

“형님, 그래도 좋은 음식과 술을 보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혜소가 다가와 위로했다.

“그런가? 괜히 괜찮은 척 하는 건 아닐까.”

“그럼요. 사람들은 혈검살의를 종잡을 수 없는 괴객이라며 꺼려하잖아요. 하지만 저는 그분들만큼 자유분방한 무인을 보지 못했어요.”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혜소야 말로 예법이나 법규를 개의치 않았다.

동생을 찾기 위해서라면 거짓으로 승려가 되기도 했고, 서슬이 시퍼런 거대문파를 들락거리며 제 뜻을 이루기도 했다.

실력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 같았다.

그래서 혜소의 말을 듣는 순간 위로가 됐다.

때마침 동풍이 불었다.

혈검살의의 대형인 마이의 별호가 뇌리를 스쳤다.

“마 형. 내 술을 동풍에 실어 보냅니다. 한 잔 합시다.”

생뚱맞은 행동에 혜소는 키득거리며 동참했다.

“제 잔도 받으세요.”

남천휘는 피식 웃었다.

“크큭, 전해졌겠지?”

*

동풍(東風)이 분다.

혈검살의의 수장인 마이는 귀밑머리가 흩날리는 순간 옅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마이동풍을 외쳤지만, 어느덧 동풍이야 말로 자신을 상징하는 듯했다.

때마침 제자인 오공이 손가락에 침을 바르더니 번쩍 들었다.

“엇! 동풍입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의제, 홍칠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주 제 사부는 끔찍하게 위하는구나.”

오공은 원숭이처럼 턱을 긁적이다가 슬쩍 잔을 들었다.

“갑작스레 동풍이 부는 것을 보아하니 용린협께서 한 잔 하자고 하시는 건 아닐까요?”

홍칠은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 꿈보다 해몽이 좋다더니. 너는 어째 점점 네 사부를 닮아 가냐?”

이미 탁자 위에는 빈 병만 십여 개가 넘었다.

하나 마의 또한 괘념치 않고 술을 채웠다.

“오공의 검술에는 살수였던 경험으로 인해 은밀함이 더해졌다. 나중에는 우리보다 대성할 거야.”

오공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살행은 사실 한 번도 안 해봤는데······.’

하나 흥겨운 자리였다.

“하하! 걱정 마세요. 제가 사부 곁에 접근하는 날파리들을 모조리 없애겠습니다!”

“이 놈아. 나는?”

홍칠의 타박에 오공은 말없이 턱을 긁적일 뿐이다.

폭소가 터져나왔고, 조촐한 술자리였지만 즐거웠다.

곡부남가에서 그들이 가장 꺼려하던 상대는 다름 아닌 서산노옹이다. 잔소리로 하루를 보내던 서산노옹은 황보세가로 떠났다. 그리고 밥값을 하라고 타박하던 막 총관도 지금쯤 백주검과 술을 물처럼 들이켜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요대를 풀고 밤새 술을 마실 요량이었다.

한데 그 순간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솨아아아아-

서풍이 이는 순간 마이가 내려놨던 술잔이 탁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쨍그랑.

마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뒤늦게 홍칠이 미간을 좁혔다.

“형님. 이거 사부님이 말했던 그거 맞지요?”

마이는 한쪽에 풀어놓은 요대를 다시 착용하며 말했다.

“그래, 적이다.”

*

지옥귀는 지금껏 백 회가 넘는 살업을 쌓았다.

그 중에는 강호의 고수도 있었고, 황실의 고관도 있었으며, 재야의 명망 높은 학자도 포함됐다.

그는 지금껏 실패하지 않았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중원삼대살수나, 강호오대살수를 손꼽을 때에도 그의 이름은 거론될 수가 없었다.

한평생 어둠을 벗 삼아 살아왔던 그였다.

“흐음.”

그랬던 그가 담 위에 올라섰다.

달빛이 그를 휘감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길을 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