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머리가 좋아졌다. (2)
*
남천휘는 연회장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쏟아지는 관심을 만끽하듯 미소를 지었다
셋, 둘, 하나.
곡부와 제남 인근의 후기지수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용린협을 뵙습니다.”
아! 좋구나.
사마의에게 넌지시 운을 띄워 놓은 보람이 있다.
오늘의 계획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위장을 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남천휘는 평소와 달리 거만한 표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한데 그와 사마의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상황이 펼쳐졌다. 황보장천이 달려와 꼬리를 흔들며 아양을 떨 때마다 헛기침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 자식은 황보세가라는 자부심은 당과랑 바꿔 먹은 거냐?’
이제는 완전히 자신의 수족을 자처하는 모습에 기가 찰 노릇이다. 물론 조금도 안쓰럽거나, 기특하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저 놈도 눈치가 있는 게지.
아니면 살기 위한 본능이 발동했던가.
‘그러고 보면 이 놈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거지?’
잠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가주인 황보관이 쓰러진 후였다.
그 후부터 황보장천은 이런저런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말 잘 듣는 속가처럼 행동했다. 그 결과 남천휘는 황보세가를 찍어내지도 못하고,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보장하지 않았던가. 소가주였을 때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처세술이 이제 와서 빛을 발하는 듯했다.
‘뭐 이쯤 되면······.’
수하로 받아줘도 되지 않을까 싶다.
어찌됐든 황보장천은 남천휘가 힘을 가진 동안은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리라.
“이리 와.”
황보장천은 자연스럽게 그를 상석으로 이끌었다.
지금도 보라.
그는 남천휘에게 굴종한 대가로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를 차지했다. 곡부와 제남의 후기지수들은 남천휘와 편하게 말을 섞는 황보장천을 부러워할 뿐이다.
‘나를 불러 놓고.’
부러워하는 자가 있으면 질투하는 자도 있다.
석자경을 비롯한 신기오룡은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남천휘는 상석으로 향하던 중 전음을 흘렸다.
[조금만 더 붙어봐.]
왼쪽에 있던 천수련이 슬쩍 다가섰고, 오른쪽에 있던 연하연은 성큼 다가왔다. 그러자 천수련은 미간을 좁히더니 조금 더 붙었다.
‘응?’
남천휘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두 여인이 번갈아가며 거리를 좁혔다. 그러니 연회장의 절반을 지날 즈음에는 두 여인이 바짝 붙어 섰다. 팔과 팔이 부딪칠 정도였다.
남천휘는 미소를 지었다.
이번만은 계획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흘러나온 미소였다. 연하연은 남천휘가 제비라고 칭할 만큼 늘씬한 몸매를 자랑했다. 천수련보다 키가 컸고, 호위를 자처했기에 몸매가 슬쩍 드러나는 무복을 걸쳤다.
그녀의 행보는 한여름에 불어보는 바닷바람처럼 상쾌했다.
‘제비야 처음부터 완성형이었으니.’
반면 천수련은 아담한 체형과 작은 눈으로 인해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게다가 대대로 검후의 일가는 자루처럼 펑퍼짐한 마의를 걸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보보마다 옷자락이 펄럭였다.
그러나 천수련의 미색은 본래부터 연하연보다 윗줄이다.
‘쳇! 나도.’
그녀는 가슴을 활짝 폈다.
그런다고 갑자기 키가 클 리는 없지만, 연하연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남천휘의 전음이 들려왔다.
[지금!]
천수련은 신기오룡이 앉은 곳을 슬쩍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애초부터 짜증이 솟구치던 상황이었기에 속내가 그대로 드러났다.
‘뭘 봐? 이 씹다만 당과처럼 생긴 녀석아.’
석자경은 입꼬리를 올렸다가 천수련의 경멸 어린 시선이 표정을 굳혔다.
‘크흑!’
하북의 패주나 다름없는 석가장의 소가주로서 처음 느껴보는 굴욕감이다.
◎ 노골적인 적대감이 표출됩니다.
안 봐도 알겠다.
그러지 않아도 뒤통수가 뚫릴 것 같거든.
남천휘는 실실 웃으며 석자경 앞에 섰다.
뒷짐을 진 채 내려보며 한 마디를 건넸다.
“이쪽은 처음 보는 소협인데.”
석자경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 그가 인사를 하려는 순간 남천휘가 휙 돌아서더니 상석으로 향했다.
“인사는 나중에 합시다. 이쪽의 아름다운 여협들을 심심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자 황보장천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음식 식겠다.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도 일단 다 준비해봤어.”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점점 황보장천이 기특해보였다.
연회는 흥겨웠다.
남천휘의, 남천휘에 의한, 남천휘를 위한 연회였다.
황보장천은 오늘 하루 접대의 달인이 되기로 작정한 듯 쉴 새 없이 연회장을 정리했다. 그가 손짓을 할 때마다 십여 명의 기녀가 다가와 빈 그릇을 정리했고, 다시 손짓을 하면 술과 음식이 채워졌다.
“천휘는 토끼를 좋아하는 것 같아. 숙수에게 전해! 토끼를 먹어야한다고.”
“예, 소가주. 제남에서 맛 좋은 토끼는 모조리 사오겠습니다.”
황보장천은 수하의 믿음직한 한 마디에 웃었다.
“좋아!”
좋은 술과 값비싼 요리가 가득했다.
그러니 후기지수들은 경계를 풀고, 이 자리를 즐겼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후기지수들은 주루에서 술과 몇 가지 요리를 즐길 뿐이다. 그들이 이처럼 호사스런 연회를 어디에서 참석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말입니다.”
짧은 머리카락을 긁적이던 사내가 목소리를 낮췄다.
뭘 해도 즐거운 분위기가 아닌가.
그렇기에 주변의 후기지수들은 관심을 보였다.
“여러 형제들은 용립협의 신위를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가요?”
누군가 탄식했다.
“아! 용린협의 행적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더군요. 잠시 수련에 지쳤던 저 자신을 채찍질하는 좋은 계기였습니다. 다만 눈으로 보지 못했던 것이 서글플 따름입니다.”
그는 남천휘와 거리가 있음에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것으로 보아 원래부터 남천휘를 경외한 듯보였다. 사내는 먹잇감을 찾은 것처럼 청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저는 운 좋게 본 적이 있지요. 바로 부패한 신공부를 정화하던 용린협을 말입니다!”
“그게 진짜입니까? 소협이 그걸 어떻게 봤습니까?”
시선이 집중됐다.
사내는 짧게 자른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제가 신공부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후기지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모았다.
신공부의 성세는 예전과 같지 않았지만, 남천휘와 피로 연결된 문파가 아니던가. 그리고 신공부를 대표한다는 사내는 남천휘와 형제의 연을 맺은 것이나 다름없는 혜소였다.
혜소는 곡부남가와 신공부 사이의 일을 도맡았다.
정확하게는 신교대에 신공부의 자금을 대는 역할이었다.
남천휘는 그 때 혜소의 장점이자, 단점을 발견했다.
- 할 때는 화끈하게, 될 때까지 무조건!
그러니 어린 시절 헤어진 여동생을 찾겠다고 천하를 떠돌았다. 지금도 남천휘가 허락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모든 권력과 재화를 내려놓고 떠날 사람이다.
그래서 이 역할을 맡겼다.
혜소가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일단 시작했다면 후기지수들의 혼을 쏙 빼놓을 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살피자, 후기지수들의 목울대는 목이 마른 것처럼 꿀렁거린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싸움 도중······.”
잠시 후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신공부의 쌍도술이 곡부남가에서 비롯됐다니.”
혜소는 힘을 얻은 듯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긴 설득 끝에 신공부의 소부주였던 공태령, 공 소협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증언은 실로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한순간 연회장에서 소음이 잦아들을 만큼 후기지수들은 집중했다.
“용린협의 쌍도가 번쩍! 하는 순간 쉭쉭! 하더니 이렇게 돌아가면서!”
남천휘는 진심으로 탄성을 흘렸다.
‘혜소가 굶어죽지 않은 이유가 저것이었던가.’
같은 말을 해도 맛깔스럽고, 같은 동작을 해도 진짜 같았다. 저런 녀석이 매담자의 세계에 뛰어든다면 그야말로 독보적인 존재가 될 듯했다.
“그 때 이렇게! 번쩍 하는 순간 사악한 신공부주가 암기를 사용하더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잠시 후 혜소의 영웅담이 끝을 맺었다.
후지지수들이 저마다 남천휘를 향해 술잔을 들어올렸다. 조금 전과 달리 진심이 섞인 표현에 남천휘도 빙긋 웃으며 호응을 했다.
‘자! 슬슬 독이 올랐을 텐데.’
석자경의 일행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인상을 쓰고 있었다.
혜소의 역할은 한 가지였다.
연회장의 분위기를 한껏 띄우는 게다.
신공부주와 봉황곡주, 청도문, 그리고 만병보고에 이르기까지의 일화를 입맛에 맞게 각색하여 떠들어댈 터였다.
후기지수들은 열광할 것이고.
‘너는 참지 못하겠지.’
◎ 머리가 좋아졌다기보다 잔꾀만 느는 것이 아닙니까?
잔머리만 늘었다고?
뭐가 됐든 문상만 엿 먹이면 되는 게다.
그 순간 석자경이 탁자를 내리쳤다.
“크흠!”
남천휘는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그 잔꾀에 벌써 넘어갔네?’
자! 재이는 침묵하고, 혜소는 어리둥절해하고, 석자경이 발끈하는 상황이다.
모든 것은 사마의의 뜻대로.
남천휘는 모른 척했다.
석자경 또한 남천휘를 자극하는 대신 혜소를 향해 날 선 한 마디를 건넸다.
“신공부는 배알도 좋군. 부주가 망신당한 걸 수하가 나서서 떠들다니.”
하나 혜소는 두려울 것이 없다.
게다가 그는 남천휘가 인정했다시피 괄목상대의 상징이 아니던가. 설삼을 먹고 내력을 키운 상태에서 적절한 무공까지 겸비했다.
이제 혜소는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만큼 정제된 기도를 보였다.
“정의가 승리한다. 이것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석자경은 석가장의 소장주라는 신분이 먹히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과장이 너무 심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외다.”
신기오룡 중 대장인 녀석이 나섰다.
기다렸다는 듯 장강대상단의 소단주가 말을 보탰다.
“아닌 말로 무슨 일이 있었을지 누가 알려나.”
천리표국의 소국주가 장난처럼 말했다.
“지나고 나면 다 미화도 되고 그러잖아?”
노골적으로 남천휘를 무시하는 대화였다.
스릉-
연하연이 참지 못하고 검을 슬쩍 뽑으려 했다.
하나 남천휘의 두툼한 손이 그녀의 가녀린 손등을 덮는 순간 적의는 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괜찮아. 이 무대의 주인공인 나야 나. 그러니까 즐겨 보도록 해.]
연하연은 눈을 내리깔았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천수련이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검을 뽑으려 했다.
한데 그 순간 석자경이 벌떡 일어나며 술잔을 들었다. 천수련은 나서야 할 기회를 놓치고, 입술을 삐죽였다.
‘아오! 저 씹다 만 당과 자식!’
석자경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용린협의 무위가 절정을 넘어섰다는 소문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신공부주를 징치하고, 봉황곡주와 청도문주를 척살했으며, 황보세가의 가주를 무릎 꿇렸을 만큼 대단한 무공을 견식 시켜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하아, 한 치도 예상과 어긋나지 않는 녀석들의 반응에 화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댔으면, 씹어 먹어주는 것이 도리렷다.
남천휘는 연회장을 둘러봤다.
후기지수들은 감히 청하지 못할 뿐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타인의 무공을 보여달라는 건 대단한 무례였다. 하나 저들로서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심경이었으리라.
그리고 이 분위기야 말로 남천휘가 바라던 장면이었다.
‘후훗, 저 새끼를 어떻게 귀여워해줘야 할까.’
남천휘는 석자경을 응시했다.
“하북은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할 만큼 삭막한 동네인가 보네.”
석자경은 도발이 먹혀든 듯하자, 입꼬리를 올렸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 않소.”
이제 남천휘가 뭘 하든 트집을 잡아서 깎아내리면 되는 게다. 그가 지금껏 지켜본 남천휘는 오만하기 짝이 없고, 졸부처럼 경박해보였다.
그리고 남천휘는 석자경의 생각처럼 반응했다.
“좋아.”
그는 흔쾌히 연회장의 중앙으로 나섰다.
이제 용린쌍도를 뽑아 놈의 주변을 갈가리 찢어놓을 요량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놈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웃어른에게 일러바치겠지. 그 웃어른이라는 석가장의 장로가 문상의 수족이니 모든 것은 계획대로다.
한데 재이라는 변수가 튀어나왔다.
◎ 천수련에게 찝쩍댄 대가치고는 너무 과하군요.
- 역시 영웅은 호색이고, 역린이 됨을······.
잠깐! 거기까지.
‘개똥이에게 찝쩍댔다고? 저 팔다 남은 당과처럼 생긴 새끼가?’
재이는 침묵했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놓고, 다시 강을 건넌 후 구경을 하고 있으리라.
요망한 자식.
계획 변경이다.
남천휘는 특기 목록을 펼쳤다.
‘무희를 끝까지 올려봐.’
◎ B급 특기 ‘무희(舞姬)’가 5레벨까지 상승했습니다.
- B급 특기를 흡수하여 등급 상승이 가능합니다.
남천휘는 쓸모없는 특기를 무희에 쏟아 부었다.
◎ B급 특기 ‘무희’가 A급 특기 ‘무제(舞帝)’로 승급했습니다.
- 등록된 검무를 통해 영향력을 증가시킵니다.
등록된 검무는 한 가지였다.
이 또한 레벨을 올릴수록 추가가 되는 듯했다.
남천휘가 검무를 활성화하는 순간 귓가에 악기 소리와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무무혁명을 활성화했을 때처럼 몽환적인 음악에 절로 입꼬리가 치솟았다.
‘혼을 쏙 빼주마.’
남천휘는 손을 털었다.
그러자 백룡도와 흑린도가 양 손에 잡혔다.
그리고 그가 발을 슬쩍 내뻗는 순간 주변의 대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천천히 도를 내지르는 움직임에 후기지수들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단 한 번의 움직임만으로도 범접할 수 없는 기세가 전해졌다.
남천휘는 검무를 추며 귓가에 울리는 음악을 따라 읊조리기 시작했다.
"도로마무, 도로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