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판을 깔다. (3)
남천휘는 재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눈에 불을 켠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이겠지?
◎ 소혜의 전투력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 오! 연하연의 전투력도 상승하고 있습니다.
중계하듯이 떠들지 마!
남천휘는 재이의 설명을 개 짖는 소리로 치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혜는 가족이었고, 연하연은 호위처럼 붙어 다녔다. 두 사람이 여인이라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었으리라.
애초에 영역이 다르지 않던가.
소혜는 남천휘의 수발을 책임졌고, 연하연은 비무를 통해 교류했다.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만 해도 벌써 이십 일이 넘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서로를 적대시할 이유가 없잖아?’
◎ 평상시를 기준으로 한 상태 변화입니다.
- 소혜 : 근심도 21% 적대감 32%
- 연하연 : 근심도 45% 적대감 13%
참으로 쓸모없는 기능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 와중에도 근심도와 적대감이 실시간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찰 노릇이다.
“하아, 뭐가 문제야?”
그러자 소혜가 먼저 나섰다.
“비무를 끝내셨으니 배가 고프실 거예요.”
그녀가 내민 그릇에서는 뚜껑을 열지 않아도 느껴질 만큼 진한 토끼 고기의 향이 가득했다.
아침에는 맑은 토끼탕, 오후에는 진한 토끼탕, 저녁에는 매콤한 토끼탕을 먹는 것이야 말로 하루 일과가 아니던가. 그리고 간간히 간식으로 먹는 것이 구이였다.
여기까지는 문제될 것이 없다.
남천휘는 연하연을 바라봤다.
그녀가 개입하며 시작된 분란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더더욱 의아했다.
연하연은 남천휘와 함께 곡부남가에 들어온 이후 존재감을 보이지 않았다. 비록 봉황곡에서 파문됐다고는 하나 한 때 한솥밥을 먹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처소에서만 머물다가 남천휘와 비무를 할 때만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쓰러워서 몇 번이나 외유를 권했지만, 그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약자였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며 하루의 대부분을 수련으로 채울 뿐이다.
그랬던 그녀가 소혜처럼 그릇을 내밀었다.
“속을 달래기에는 이것이 나을 겁니다.”
남천휘는 생소한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소혜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봤음에도 호기심을 이길 수 없었다.
‘이건 뭐지?’
연하연은 남천휘가 관심을 보이자, 옅게 웃으며 말했다.
“연와라고 해요. 몸을 보하는데 아주 효과가 좋은 귀한 음식이에요.”
남천휘는 잠시 눈을 끔뻑였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음식이다.
뭐냐고 묻고 싶지만, 연하연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쉽사리 입을 떼기 어려웠다. 은공이라면 자신의 노고를 알아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저 순진무구한 눈빛을 보라.
‘검색.’
결국 남위기였다
《연공(戀空)》
- 남해의 섬에서 시작된 경극으로 유이라는 여인이 겪는 연인의 정혼과 이별을······.
《연와(燕窩)》
- 바닷가에 사는 금사연의 집으로 만든 요리.
《연과(燕窠)》
- 화산파의 중시조라 불리는 검신의 속명으로 산발한 머리카락이 제비집과 같다고 하여 불림.
오랜만에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는 정보를 찾았다.
이야, 강남 제비가 제비집으로 요리를 만들다니.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만들어낼 결정체처럼 여겨졌다.
남천휘는 탄성을 흘리며 말했다.
“금시조의 집이라면 쉽게 구할 수 없었을 텐데······.”
“봉황곡의 추격을 받을 때 저를 구해주셨던 선배께서 주신 선물이랍니다. 말린 것을 녹여 죽을 쑤었으니 편하게 드시면 될 거예요.”
한데 손을 마저 뻗을 수 없었다.
소혜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금은 간식을 드실 시간이에요.”
그건 그렇지.
이제는 토끼가 영혼의 동반자처럼 생각된다.
“소군사를 방해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한 가지 음식만 드시는 건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연와를 준비했어요.”
그것도 그러네.
강호에 온갖 음식이 가득한데 토끼만 먹고 살 수는 없잖아.
간식과 건강의 대치를 해결할 방안이 존재했다.
“좋아. 난 둘 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어차피 남천휘를 위하는 마음에 마주하게 된 것이 아닌가. 남천휘는 포식을 했고, 두 여인은 빈 그릇을 돌려받았다.
‘어떠냐!’
◎ 강인한 정신력과 냉정한 결단력에 찬사를!
- 놀랍도록 훌륭한 선택이었습니다.
- 누구에게도 미움 받지 않고, 사태를 마무리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하지만 둘은 셋이 되고, 셋은 넷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제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될 날이 찾아올 겁니다.
그런 칭찬을 받으니까 오히려 찝찝하기만 했다.
‘아무리 봐도 비아냥거리는 것 같단 말이지.’
마무리로 저주 같은 예언까지.
하나 오히려 가슴을 활짝 폈다.
‘까불지 마라! 모든 상황은 내가 통제하고 있어. 저 녀석들은 물론이고, 현월회와 일원까지 아우르는 판을 깔아놨단 말이다. 그러니까 너는 내가 신명나게 날뛰는 걸 구경하면서 포인트나 내놔.’
남천휘가 투덜거리는 사이 연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공, 수련하실 시간입니다.”
그녀의 말투는 연와를 건넬 때와는 달리 어딘가 모르게 당당했다. 음식은 소혜의 영역이지만, 수련은 그녀의 영역이 아니던가.
“저는 일거리가 있어서 돌아가 볼게요.”
반대로 소혜는 별 기색 없이 돌아섰다.
그녀가 연무장의 문을 닫고 나서는 순간 담장 너머에서는 쇳소리가 울렸다. 평생 그녀가 낼 수 없는 소리였고,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이었다.
‘칫.’
접시를 쥔 손에 힘이 더해지는 순간 헛기침이 들려왔다.
“크흠! 소군사, 여기 있었는가?”
사마의가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를 반겼다.
“군사께서 연무장에는 무슨 일로?”
“아! 그냥 생각할거리가 있어서. 빈 그릇인 걸 보니 오늘도 주군께서 맛있게 드셨나보군.”
“네.”
“크흠! 요즘 낮밤이 바뀌어서 그런가. 왜 이렇게 몸이 찌뿌듯한지. 소군사, 혹시 토끼 고기 좀 남으면 내게······.”
소혜는 사마의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채 멀어졌다.
사마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한 숨을 내쉬었다.
'흠, 여기서 토끼가 왜 나오는 거야? 이 멍청한 놈.‘
하여간 그 놈의 토끼가 문제였다.
*
현월회의 창립을 알리는 연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 며칠 사이에 강호는 쥐죽은 듯 조용했고, 주변의 모든 것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남천휘는 그 어느 때보다 바빴다.
오죽 했으면 기간 대비 성장 예정치가 훌쩍 증가해서 100%가 보일 정도였다.
곡부남가의 증축이 완료 되었고, 십여 개가 넘는 진법 중 절반의 설치를 끝냈다. 곡부남가의 부지는 예전에 비해서 세 배 이상 넓어졌다.
이제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면 외원을 넘기도 어려울 것이다. 또한 지금은 멸문한 봉황곡이 떼로 몰려와도 예전과 다를 터였다.
그 외에도 몸이 몇 개나 되는 사람처럼 일을 처리해야 했다.
가장 큰 일은 누가 뭐라 해도 신교대 2기였다.
출신과 나이, 무공의 성취를 가리지 않으니 지원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총교두인 양방언은 근심을 숨기지 못했다.
남천휘가 유명해질수록 간자나 살수가 숨어들 것이라 여겼다. 하나 지원자의 능력은 물론이고, 야망과 충성심까지 파악할 수 있지 않던가.
그렇게 서른 명을 뽑았다.
양방언의 아들은 양대안과 교관들이 그들과 함께 대화동으로 자취를 감췄다. 남천휘가 장점과 단점은 물론이고, 보완책까지 마련해뒀으니 조만간 1기처럼 훌륭하게 성장한 후 돌아오리라.
“그런데 양대안은 왜 이렇게 곡부남가 밖으로 나가기를 싫어하는 겁니까?”
“글쎄요.”
글쎄는 무슨.
‘감히 소혜에게 눈독을 들여!’
남천휘는 교육을 빙자한 유배를 통해 양대안을 제거했다. 당분간 소혜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양 총교두는 1기를 이끌고 행사에 참석하세요.”
“주군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남천휘는 주군이라는 호칭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사마의에게서 시작된 호칭은 남천홍과 막 총관의 놀림을 통해 널리 퍼져버렸다. 그렇기에 현월회에 속했거나, 남천휘를 통해 곡부남가로 오게 된 이들은 자연스럽게 주군이라는 호칭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포인트 안 주냐?’
예전에는 인지도가 상승했다며 이것저것 퍼주지 않았던가. 하나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후에는 퀘스트가 아니면 공짜로 얻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짜투리 시간을 쪼개서 곡부남가와 인근의 퀘스트를 모조리 수행했다.
이제는 VIP 5단계 승급을 위한 포인트가 제법 모였을 터였다.
‘내 예상이 확실하다면 5단계에서 비급 하나 준다!’
재이가 잠잠했다.
예상은 확신이 되었다.
‘기연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
남천휘는 기연에게 가는 대신 황보세가로 향했다.
이제 공식 행사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황보세가의 정문을 향해 거침없이 걸음을 내딛었고, 뒤따르던 무인들은 상경한 촌부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대세가의 한 곳인 황보세가를 이렇게 쉽게 들어갈 수 있다니······.’
수하들의 생각과 달리 쉽게 들어가지 못했다.
중소방파의 문주들은 안면을 익히거나, 청탁을 하기 위해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군사!”
사마의를 먹잇감으로 던져준 후 세가에 발을 들였다. 그 순간 내원과 외원의 경계 지역에 마련된 거대한 무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
제아무리 남천휘라고 해도 놀람을 숨길 수 없었다.
‘미친놈! 진짜 미친놈이다!’
황보장천은 내원과 외원의 경계에 있던 건물을 밀어버리고 무대를 세운 것이다. 황보세가의 수백 년 역사가 패륜아를 만나 진창으로 꼬꾸라지는 순간이었다.
“허어.”
신교대와 북명대의 무인들이 일제히 탄성을 흘렸다.
신교대는 1조를 제외한 2조와 3조가 함께 했다.
그리고 북명대(北冥隊)는 북풍대와 북악대에 이어 새롭게 낭인들을 모아서 조직한 타격대였다.
“어깨 펴. 여기는 황보세가가 아니다.”
남천휘는 저들이 호흡을 조절한 후에야 말을 이었다.
“오늘 하루 이곳은 현월회다.”
남천휘가 신교대의 후기지수를 뽑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충성심이고, 두 번째는 평정심이다.
그 효과가 드러났다.
수하들의 호흡은 안정됐고, 저절로 정제된 기세가 주변을 잠식했다. 그러자 다른 일을 하던 황보세가의 가솔들이 그들을 힐끔거렸다.
‘눈치만 볼 뿐 분노하는 자가 없네.’
어쩌면 황보세가는 이대로 기억에서 지워도 될 듯했다. 그만큼 세가의 명성을 땅에 떨어졌고, 가솔들의 자긍싱은 씻겨나간지 오래였다.
“왔어!”
저쪽에서 다가오는 놈이 원흉이다.
남천휘는 속내를 숨긴 채 황보장천을 향해 눈인사를 했다.
“이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황보장천은 가슴을 펴고 거드름을 피웠다.
“수백 년 간 쌓아온 세가의 저력이다. 친우에게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용봉쟁투의 동료가 친우로 격상됐다.
눈물이 날 만큼 고마운 우애로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이 조금도 생기지 않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신기했다.
“그래, 일전에 이야기했던 건 잊지 않을게.”
남천휘가 목소리를 낮추자, 황보장천도 덩달아 목소리를 깔았다.
“만서각은 준비를 해놨으니 아무 때나 들어가면 돼.”
두 사람은 짧은 대화를 끝으로 헤어졌다.
남천휘를 비롯한 곡부남가의 무인들은 황보장천이 마련해준 처소에 짐을 풀었다. 외원에서 가장 화려한 후원을 내어줬기에 백여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 오가도 번잡스럽지 않다.
“주군, 도착했습니다.”
남천휘는 사마의의 말에 눈을 빛냈다.
“전야제를 건너 뛰고 바로 시작하는 기분인 걸.”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후원에서도 으슥한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비경회의 일원인 일청대사와 제자인 회종이 자리했다.
“신승, 잠시 산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일청대사는 흔쾌히 자리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
“내일이면 음지에서 상황을 지켜봐야 하니 오늘 길이나 익힐 겸 함께 가세.”
“제가 모시겠습니다.”
남천휘가 앞장을 서자, 일청대사는 지팡이를 짚고 따라나섰다.
“자네에게만 짐을 지운 것 같아서 미안하군. 내가 행사에 얼굴을 비출 수 없는 까닭을 이해해주시게.”
현월회의 행사에 무림맹 문상과 더불어 소림의 고승이 배석한다면 소문은 날개를 달 터였다.
하나 남천휘는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빙긋 웃었다.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며 무대 쪽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일청대사가 표정을 굳혔다.
“자네.”
황보세가의 정문을 통해 일련의 무리가 등장한 것이다. 무림맹의 상징이 새겨진 깃발이 펄럭였고, 오가던 자들은 저마다 예를 표했다.
그 사이를 무림맹의 문상인 백결공이 보무도 당당하게 지나쳤다.
한데 그가 흠칫 놀라며 멈춰서는 것이 아닌가.
남천휘는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일청대사와 백결공이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아주 재밌는 판이로구나.’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비경회와 일원의 관계, 그리고 그 과정의 일은 일청대사의 입을 통해서만 전해졌다. 애초에 비경회의 존재 자체를 몰랐거늘 일청대사의 말에 혹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닌 말로 일청대사가 일원의 간자라면?
무적자인 남천휘는 협객이나 영웅처럼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그저 모조리 까발린 채 지켜보는 되는 것이다.
재이가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것처럼.
한데 그랬던 남천휘가 한순간 일청대사처럼 표정을 굳혔다.
“남 소협!”
행렬의 후미에 있던 천수련이 거칠게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고, 그 옆을 지나던 연하연은 토끼고기가 가득한 자루를 쥔 채 불안한 눈빛을 흘렸다.
그리고 소혜가 두 사람을 지켜보며 흥미로워하는 기괴한 광경이 펼쳐졌다.
◎ 아! 정말 흥미롭게 판을 짜셨군요.
- 포인트는 양껏 준비해놓겠습니다.
닥쳐! 문상이고, 뭐고 간에.
‘내가 문상객을 받게 생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