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내가 두 번째라고? (2)
그 순간 오래 전 곡부남가의 창고에서 발견했던 하나의 족자가 뇌리를 스쳤다.
봉두난발에 얼굴에는 십자 흉터가 있었으며 호피를 두른 채 호탕하게 웃던 사내가 그려져 있었다.
백파도라는 별호의 그대.
그리고 산적십계명을 고이 간직했던 그대.
‘설마!’
그 순간 일청대사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쌍도를 사용했던 자였네. 호방한 웃음이 마치 사자후를 방불케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네. 그리고······.”
남천휘는 일청대사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달마시안으로 깨달음을 얻었고, 비경회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귓등으로 흘린 지 오래였다. 그 대신 VR을 통해 확인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철신과 무기를 주고받고, 그런 철신은 청염진군이나 제룡검야와 어우러졌다. 그러다 보니 산적인 줄 알았던 조상은 암중의 실력자처럼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한데 좋았던 기억이 서서히 흩어진다.
그 대신 쌍도의 쇳소리와 더불어 우락부락한 사내의 호탕한 웃음만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거친 수염과 떡 진 머리카락을 긁적이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산적이다.
‘잠깐! 그건 기억에 없었잖아. 이 자식아, 갑자기 끼어들어서 왜곡하지 마!’
유가의 후예라는 걸 자랑스러워한 적은 없다.
그래도 산적의 후예보다는 낫잖아!
한데 일청대사의 말 중 한 단락이 청천벽력처럼 들려왔다.
“그가 정천칠공에게 길을 열어줬지.”
이건 또 무슨 반전의 반전이란 말인가?
“산적이었다면서요?”
남천휘는 목소리에 담긴 기대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랬지. 처음의 그는 산적이었단다. 중원의 예법도 밝지 못해서 처음에는 외인인 줄 알았다는군. 한데 뭐였더라?”
이 영감이 또 수를 쓴다.
하나 이번만은 칼자루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요?”
“기억이 가물가물하군. 장경각의 비급을 관리할 때 우연히 찾은 일지가 있었거든. 그저 옛 기록으로 여겼기에 한 번 보고 기억에서 지웠네. 그래서 상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군.”
남천휘는 장경각의 일지에 VR 영상이 깃들었음을 확신했다.
‘할아버지의 초기 모습이야!’
지금껏 그가 보았던 백파도 남추는 성장했을 때와 은거 했을 때의 모습이 전부였다. 어쩌면 비천무상도의 시작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궁금했다.
하지만 위치가 문제였다.
‘아! 빌어먹을 장경각.’
소림사의 건물 중 가장 중요한 곳은 응당 조사동(祖師洞)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방장실(方丈室)이 아닌 장경각(藏經閣)일 터였다. 장경각이야 말로 소림의 비급은 물론이고, 마공서까지 모아놓은 절대 비처가 아니던가. 한 때 장경각이 열리면 천하에 환란이 일어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곳에 남천휘를 들여보내줄 리가 없다
설령 들여보내준다고 해도 조건이 붙을 것은 당연했다.
아니나다를까 일청대사가 남천휘를 유혹하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언제고 인연이 닿는다면 본사를 방문해주시게. 내 기꺼이 방장께 아뢰어 장경각을 출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네.”
남천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자칫 소림의 호의를 받아들였다가는 평생 발목을 잡힐 터였다.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전가의 보도라고 할 수 있는 남위기가 있지 않은가
남천휘는 일청대사가 거론했던 정보를 분류하여 검색했다. 하나 이번에도 잡다한 정보만 나열됐을 뿐 쓸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나도 알만큼 알았는데 할아버지에 대한 정보 좀 풀지?’
◎ 오랜만에 알려드리는군요.
- 주인님의 기간 대비 성장 도달률은 84%입니다.
- 주인님은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 향락과 퇴폐에 젖어 강호행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세요.
100%를 넘겼던 게 엊그제인데.
‘왜 이렇게 떨어졌어?’
그 사이 봉황곡주를 죽이고, 황보세가주를 이겼다.
게다가 청하오검을 굴복시켰고, 산동성 전체를 손에 넣었다. 또한 비경회의 일원인 일청대사를 통해 초절정의 고수가 된 상태였다.
‘이게 말이 돼?’
◎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이 있지요.
- 현재 주인님은 내외로 폭발적인 성장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퀘스트를 확인하라는 말에 지도를 활성화했다.
띵띵띵띵띵띵띵띵띵띵띵띵띵띵띵!
그 순간 귀가 따가울 정도로 알림이 연이었다.
동시에 곡부남가 주변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물음표가 생성됐다.
‘곡부남가의 퀘스트는 작년에 다 끝냈는데······.’
언제 또 이렇게 생겼단 말인가.
엇! 그 사이 퀘스트 두 개가 늘었다.
마치 잡초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듯했다.
◎ 주인님의 성장과 성향, 그리고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퀘스트가 재설정되었습니다.
남천휘는 침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재이가 던져주는 퀘스트가 워낙 굵직하다보니 자잘한 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수많은 퀘스트 중 한 가지를 살폈다. 현월회로의 가입을 망설이는 중견 문파의 수장을 설득하라는 퀘스트가 아닌가.
‘하하, 이것만 다 해도 올해는 그냥 넘기겠는데?’
남천휘의 혼잣말에 재이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조언을 남겼다.
녀석이 오늘 따라 친절하네.
참으로 드문 날이 아닌가.
일청대사는 솔직했고, 소환단도 공짜로 얻었고, 초절정의 고수도 됐다.
하루 종일 만세를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으리라.
하나 남천휘는 표정을 굳혔다.
‘네 녀석이 내 편의를 봐줄 리가 없지.’
마치 불씨를 던졌으니 활활 타오르는 걸 구경하려는 것처럼 관망하는 자세였다. 이 요망한 것의 속내를 확인하기 위해 일청대사에게 물었다.
“신승께 여쭙겠습니다.”
일청대사의 수양이 깊기는 한 듯했다.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뜸 질문을 하겠다는데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속인으로 계실 때의 성씨가 혹시 남씨였던가요?”
“허허, 아쉽게 아닐세.”
“마치 혈육을 대하듯 저를 배려해주시니 그런 인연이라도 있을까 했지요.”
일청대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배려라니. 그저 자네를 응원하고자 함이라네.”
“응원이라니요?”
“조만간 큰 혈겁을 마주할 테니 강호의 선배 된 입장에서 응원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천휘는 너스레를 떨며 대꾸했다.
“불안하게 왜 이러세요.”
“비경회는 오래 전부터 일원을 주시했네. 자네는 알지 못하겠지만, 대강남북을 통틀어 수많은 일원의 하부조직을 섬멸했지.”
묵객(墨客)들은 해가 바뀌면 전년을 상징하는 문구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서 교환하는 것이 풍습이다.
분명 내년 이맘때쯤 묵객들은 한결같은 문구와 그림을 그릴 것이다.
글을 쓰는 자는 ‘남천휘, 자네는 아무 것도 몰라.’겠지.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자라면 일청대사의 뒤끝 있는 고약한 모습을 남길 터였다.
“하나 홀로 일원을 곤란하게 만든 자는 둘 뿐이네. 하나는 장강의 북쪽, 하나는 남쪽이지.”
남천휘는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북쪽은 저일 테고요.”
“자네의 견식은 매우 짧으니 남쪽의 무인은 말해도 모를 걸세. 어찌됐든 자네는 청도문과 봉황곡, 만병보고의 음모를 막아냈네. 일원으로서는 자네를 그냥 둘 수 없는 노릇이지.”
“그래서 누굽니까?”
일청대사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순간 청명한 기운이 주변으로 흩어진다.
기막을 펼쳤다.
“백결군.”
무림맹의 문상이라는 구체적인 지위가 거론되어서야 일청대사가 원하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뭐라고요?”
남천휘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까 비경회에 맹주와 총군사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두 사람은 일원의 무리가 문상이 될 때까지 뭐했데요?”
일청대사는 헛기침을 했다.
“크흠, 다 이유가 있기는 했지.”
남천휘는 한 숨을 그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마의는 현월회의 창립 행사에 무림맹 문상이 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환호성을 질렀다. 무림맹의 문상이라면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수뇌부가 아니던가.
그러니 문상이 참석하는 순간 현월회는 맹의 인정을 받은 공식 단체가 된다. 최소한 산동성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자랑할 수 있게 되는 게다.
“하아, 그런데 그게 나 죽이러 오는 거였다니.”
남천휘는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그래서 비경회는 어찌하실 건가요?”
일청대사는 헛기침과 함께 맥차를 들이켰다.
“그것은 산동의 주인께서 결정해야지.”
그 순간 자신만만하게 내뱉었던 말이 뇌리를 스쳐갔다.
- 괴겁천마든, 사령신이든 제 앞길을 막아선다면 죽일 겁니다. 또한 제 주변에서 얼쩡거린다면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뱉은 말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일청대사에게는 받을 만큼 받은 상태가 아닌가. 한데 쩨쩨하게 보였던 일청대사가 고승의 면모를 보였다.
“클클, 자네도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군. 일원의 일로 자존심을 세울만큼 철부지는 아니라네. 미력하지만 나와 회종이 돕겠네. 하나 정식으로 얼굴을 보일 수는 없어. 어찌됐든 우리 사제는 암중에서 일원을 확인하는 역할이니까.”
현재 곡부남가에서 일청대사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무인은 청하오검 정도가 전부였다. 게다가 회종의 무위 또한 혈검살의와 비슷했다.
두 사람의 도움만으로도 큰 힘이 됐다.
“감사합니다.”
“맹의 서열 상 문상보다 윗줄인 일원은 있을 수 없네. 그렇기에 문상이 이곳으로 오는 사이 맹주와 군사는 맹 내의 일원을 일소할 것이야.”
“신승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는 아래에서 거슬러 올라갔다면 이번에야 말로 위에서 잘라낼 수 있는 기회가 되겠군요.”
“그렇지. 지난 날 일원의 전신인 광명회를 발본색원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네. 점조직의 특성 상 윗줄을 잡는 것이 불가능했거든. 하여 맹 내의 인력을 빼지 못했네. 대신 자네도 알고 있는 이에게 도움을 청했네.”
남천휘는 빙긋 웃었다.
“개똥이로군요.”
일청대사는 잠시 멈칫했다.
최근 비경회에 가입한 천응검후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사실이다. 한데 남천휘에게 있어서는 천응검후보다 천수련이 먼저인 듯했다.
‘허허, 좋을 때로다.’
남천휘는 잠시 생각을 하다 몸을 일으켰다.
“안 되겠습니다.”
“무엇을 하려는가?”
“제 군사를 불러야겠습니다.”
일청대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비경회와 일원에 대한 사안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네.”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믿을 수 있습니다.”
충성도가 9니까요.
게다가 지식과 신산의 수치가 8에 이르렀다.
그라면 실리를 위한 최적의 묘수를 찾아내리라.
*
사마의를 불러들였다.
남천휘는 일청대사에게 들었던 이야기의 대부분을 전했다. 비경회의 소속원과 달마시안의 비밀은 서로를 위해 밝히지 않았다.
그는 백결공의 정체를 듣는 순간부터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모든 심력을 다해 해결책을 찾고 있는 것이리라.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남천휘는 사마의를 믿었기에 자리를 지켰고, 일청대사는 아예 경문을 읊조렸다. 연배에 어울리지 않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처소를 가득 채웠다.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원기가 회복되고, 머리가 맑아지는 듯했다.
잠시 후 사마의가 눈을 떴다.
“일단 장소를 바꿔야겠습니다.”
남천휘는 웃었고, 일청대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곡부남가는 상징성을 제외하면 어느 것 하나 유리한 점이 없습니다. 아직 진법과 경계 체계가 완성되지 않았으니 외부의 침입에 취약하고, 주군의 가솔들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흐음, 갑자기 장소를 바꾸면 의아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사마의는 웃었다.
그 역시 며칠 전만 해도 일청대사와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하나 비정상처럼 보이는 남천홍과 남천휘의 관계를 생각하면 해법은 간단했다.
“가문의 위세가 올라갈수록 가족의 분열은 흔한 일이 됩니다. 형제가 싸운 후 곡부남가과 현월회를 분리했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남천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의 안위가 아니던가.
“그럼 어디가 좋을까?”
사마의는 남천휘를 보며 난색을 표했다.
“주군깨서는 언제까지 저를 시험하시려는지. 산동성 내에서 황보세가 만한 곳이 또 있겠습니까?”
일청대사는 탄성을 흘렸다.
“오대세가였던 황보세가라면 외형상 곡부남가보다 낫지. 한데 그들이 허락하겠는가? 어쩌면 자신들의 영역을 내어주는 셈인데. 명가의 자부심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하다네.”
사마의는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더 황보세가여야 해. 이번 일로 황보세가가 불바다로 변한다면 아예 병탄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으리라.’
그는 속내를 숨긴 채 남천휘를 바라봤다.
“그건 주군께서 해결하시겠지요.”
남천휘는 가슴을 활짝 펴고 거드름을 피웠다.
“황보장천과 제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