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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만렙지존-230화 (230/305)

102, 내가 두 번째라고?

102, 내가 두 번째라고?

남천휘는 늦은 밤 일청대사와 마주했다.

“조금 더 쉬시는 편이.”

노인을 괴롭혔다는 자책감에서 나온 한 마디였다.

그만큼 일청대사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미룰 수 없는 일이라네.”

“낮의 이야기를 이어가시렵니까?”

일청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중요한 건 지금부터니까.”

남천휘는 맥차를 호호 불어가며 마시는 일청대사를 바라봤다. 소림의 일대제자이면서 요직만 거쳤던 그라면 호의호식은 꿈이 아닐 터였다. 마음만 먹으면 고승의 대우를 받으며 천하를 유람할 수도 있었으리라.

한데 앙상한 몸을 빛바랜 가사로 감싼 채 맥차를 마시는 모습은 안쓰럽기만 했다. 자신도 모르게 품안의 소환단을 한 개 더 꺼내주고 싶을 만큼 말이다.

‘그래! 원래 내 것도 아니었잖아.’

무엇보다 아직 열 개나 더 남아 있지 않은가.

남천휘가 결단을 내리려는 순간 일청대사의 입이 열렸다.

“나는 몰라도 신마대전은 알고 있겠지?”

소림의 고승이라고 해서 모두가 대인대덕한 것은 아니로구나. 득도한 고승처럼 선하게 웃으면서 은근히 뒤끝 있는 영감이 아닌가.

남천휘는 품안에 손을 넣으려다가 슬쩍 뺐다.

“알고 있지요.”

다행히 일청대사는 맥차에 시선을 빼앗긴 채 말을 이었다.

“괴겁천마와 사령신은 대강남북에서 각자 혈겁을 자행했네. 각자 남과 북에서 군림하니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했지. 당시 정파의 세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쇠락했으니 심심하기도 했을 테고.”

남천휘는 옛날이야기를 읊조리는 듯한 일청대사의 느긋한 말에 침음을 흘렸다. 당시 강호는 신마대전으로 인해 풍비박산이 났다.

백도의 문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숙인 채 환란이 지나가기를 기원했다.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폭우는 맞지 않고,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겼다.

하나 구파는 그럴 수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저항했고, 선두에 섰던 소림과 무당의 폐해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청대사는 느긋했다.

‘도대체 무슨 경천동지한 말을 꺼내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일청대사는 장탄식을 하며 시선을 끌었다. 저러고 있으니 득도한 고승이 아니라 잘 나가는 매담자가 연상될 정도였다.

“그 둘은 호승심을 가졌으나, 만나지 않았네. 먼저 찾아가는 쪽이 지는 것이라 여겼지. 그렇게 혈겁은 잠시 소강상태를 이뤘고, 심산유곡에 은거했던 기인들이 등장했다. 자네도 알겠지? 정천칠공.”

아! 진짜 뒤끝 있는 노인네.

잘못 엮이면 삼대가 피곤할 것만 같은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세간에는 정천칠공이 신마대전을 종식시켰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네. 정천칠공이 어느 정도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괴겁천마와 사령신의 시신조차 보지 못했거든.”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천칠공의 후예인 제룡장주도 알지 못했던 것을 일청대사가 거론했다.

“그래서요?”

일청대사는 남천휘에게 되물었다.

“괴겁천마와 사령신이 정말 죽었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관심 자체가 없었던 화제가 아니던가.

일청대사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도 모르겠네.”

아니, 그러면 왜 물어봐?

남천휘가 투덜거리려는 순간 일청대사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하나 한 가지는 확실해.”

진짜 부업으로 매담자를 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이목을 끄는 건 최소한 전문 매담자보다 나았다.

“뭔가요?”

일청대사는 기다렸다는 듯 한 숨을 흘렸다.

그가 진짜 매담자였다면 이 순간 바람잡이가 취객들에게 철전을 수거했으리라.

“그들의 후예가 암약하고 있어. 괴겁천마일 수도 있고, 사령신일 수도 있지.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고. 자네가 겪었던 만병보고는 사령신의 비처였네. 하나 그것을 꾸민 것 또한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어.”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만병보고는 일원이라는 조직이 펼쳐놓은 함정이 아니던가. 그가 일원이라는 두 글자를 읊조리는 순간 일청대사는 놀란 기색도 없이 말을 받았다.

“그래. 일원은 괴겁천마나 사령신의 후예라네. 내 스승께서 놈들의 꼬리를 잡으려 할 때에는 광명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지. 당시에도 가장 윗선은 잡지 못했고, 놈들은 수면 아래로 사라졌네. 한데 몇 년 전부터 다시 나타났어.”

남천휘는 일청대사 몰래 남위기로 광명회를 검색했다. 그러나 벽지의 사찰이나 왈패 무리의 행적만 나타날 뿐이다.

‘나한테 허용되지 않은 정보인가?’

일청대사는 남천휘의 표정을 보고 옅은 웃음을 지었다.

“몰랐군. 모르는 것이 당연해. 당금 강호에서 광명회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건 수십 명에 불과해. 그마저도 이제는 살아 있는 이가 몇 없지.”

“우리라고 칭하던 분들이겠군요.”

“신마대전이 끝난 후 정천칠공을 비롯한 구파의 수뇌부는 신마의 흔적을 뒤좇았지. 하나 발견할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이 후인들에게 비경회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신마를 경계하도록 했지.”

남천휘는 진심으로 탄성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비경회(非警會)를 검색해 봐도 나오는 것이 없다. 결국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삶을 수십 년 동안 살아온 자들이 있는 게다. 그렇게 잘못된 것을 경계해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수많은 악인들이 양지로 나서지 못했으리라.

“대단하시군요.”

“소속한 자들의 면면은 더더욱 대단하지.”

일청대사의 말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소속됐기에 그러시는 겁니까?”

남천휘의 물음에 일청대사는 목소리를 낮췄다.

“알면 까무러칠 것이야. 자네,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막을 떠돌던 자에게 물을 건네며 속삭이는 듯한 한 마디였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누구도 사막 한복판에서 건넨 물을 거절할 수 없으리라.

“아니요. 감당 못하겠네요.”

목이 마르면 인벤토리에서 꺼내 마시면 될 일.

남천휘의 단호한 한 마디에 일청대사는 말문이 막힌 듯 눈만 끔뻑였다.

‘이 영감이 누구를 진짜 멧돼지로 아는 건가?’

소환단을 받기 전에는 시험이었다.

그러니 소환단은 허락 없이 시험을 한 대가였다.

하나 그 후의 상황은 달랐다.

일청대사는 달마시안을 통과한 남천휘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달마십삼수를 펼쳤으며, 묻지도 않은 강호의 비사를 털어놓았다. 협의지심이 충만한 후기지수였다면 이미 무릎을 꿇고 가입을 청했으리라.

게다가 수십 년 동안 알려지지 않은 비경회의 소속원을 거론하는 순간 강제로 한 배를 탄 동지가 되는 셈이다.

생각만으로도 현기증이 났다.

“제가 감당할 수는 없지만,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러니 현월회의 이름으로 자금을 지원하여······.”

남천휘가 슬쩍 거절을 하는 순간 일청대사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렇다면 남은 수는······.’

일청대사는 절초를 펼치듯 빠르게 말을 잘랐다.

“칠절신군, 광목진인, 화검, 쌍선, 칠석로······.”

강호의 비밀이라 할 수 있는 비경회의 명단이 국숫발 뽑듯 나열됐다.

비밀을 공유하여 동료로 만들 셈이다.

이것은 일청대사가 살아온 수십 년의 올곧은 삶을 부정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하나 그는 남천휘와 달마십삼수를 겨루면서 결심한 상태였다.

‘반드시 영입해야 해!’

비경회는 혹시 모를 신마의 위협을 대비하기 위해 탄생했다. 그러니 협기만 있다고 해서, 무공만 지녔다고 해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회종을 마지막으로 비경회는 신입을 받지 못했다. 달포 전 검후의 후예를 신입으로 받은 다행이라면 다행일 터였다.

아닌 말로 일청대사 정도의 고수라면 따뜻한 방에서 언젠가 있을 환란을 대비해도 충분할 나이였다. 한데 후학이 부족하니 여전히 몸으로 뛰어야 했다.

그나마 그는 나은 편이다.

다행히 제자인 회종을 비경회에 가입시키지 않았던가. 동 배분의 누군가는 아직도 의혹이 있는 자들을 찾아다니며 직접 손을 섞는 상황이었다.

“미안하네. 본회의 수뇌부를 알게 되었으니 자네도 함께······.”

일청대사는 말끝을 흐렸다.

남천휘는 어쩌라는 듯 눈을 끔뻑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던 상태였다.

“무림맹주, 무림맹 총군사, 화산장문인, 무당제일검, 개방법장, 천응검후, 교룡세가의 원로.”

저자의 아이도 알법한 명칭으로 바꿨다.

그 순간 아니나다를까 남천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엇!”

일청대사는 ‘그럼 그렇지!’라는 득의의 눈빛을 번뜩였다. 정파의 세상에서 맹주와 군사, 또는 화산과 무당만큼 후기지수의 피를 끓게 만드는 직위가 또 있으랴.

“개똥이도 비경회인가요?”

남천휘의 말에 일청대사는 눈을 끔뻑였다.

그가 거론한 자들은 하나 같이 당금 강호의 지주를 도맡아할만큼 유명했다. 개방의 말단 제자나 지닐 법한 별명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 그게 말이지요.”

일청대사는 호칭 정리를 끝낸 후 헛웃음을 흘렸다.

“얼마 전 천응검후도 비경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네. 지금은 세가 약하지만, 명색이 정천칠공의 후예가 아니던가. 절강 쪽에서 활약하느라 연이 닿지 않았을 뿐 애초부터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지.”

남천휘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개똥이도 검후의 제자니까 비경회에 속한 셈이로군요.”

일청대사는 눈을 빛냈다.

남천휘의 다소 들뜬 목소리만 들어도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호! 청춘이라 이건가. 그렇지. 연정만큼 사람을 설득하기 좋은 것도 없으리라.’

그는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자네는 개똥 소저와 각별한 사이인 듯하니 함께 하지 않겠는가?”

남천휘는 환하게 웃었다.

“저까지 폐를 끼칠 수야 있나요. 개똥이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개똥이를 통해서 연락을 주세요.”일청대사는 눈을 끔뻑였다.

도통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겠다는 게야?’

결국 완곡한 거절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만큼 비경회는 믿을 수 있는 강자를 필요로 했다.

결국 남천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청대사가 부끄러움을 자처하면서도 매달리고 있지 않은가. 어찌됐든 소림의 큰어른을 상대로 마냥 뻗대기도 불편했다.

“후, 신승의 뜻은 따를 수 없습니다.”

“왜인가?”

“정파? 협? 다 좋지요. 괴겁천마와 사령신의 후예를 막아야 한다는 것도 좋습니다. 하나 모두가 신승처럼 협에 목을 매지는 않습니다.”

“정파의 후예로 정도를 걷는 건 당연한 일일세.”

“그 정도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나 신승처럼 좌우로 눈 돌리지 않고 가야만 하는 것이 정도라면 따를 수 없습니다.”

무적자(無籍者).

남천휘의 첫 직군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화전민이 안쓰럽기에 시스템의 권고를 무시했을 뿐이다. 불과 반 년 전만 하더라도 치기 어렸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 무적자를 머리 위에 달고 혈란을 거쳐 올수록 한 가지가 뚜렷하게 남았다.

가족(家族).

부모형제는 정파의 의협보다 중요했다.

그렇기에 지금껏 산동성을 떠나지 못하고 곡부남가의 부흥에 목을 매지 않았던가.

“괴겁천마든, 사령신이든 제 앞길을 막아선다면 죽일 겁니다. 또한 제 주변에서 얼쩡거린다면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놈들을 찾아 신승처럼 천하를 떠돌 수는 없습니다.”

한데 일청대사는 웃었다.

“그렇군. 자네의 뜻도 옳다. 중원십삼성 중 산동성에 대한 우려만 버릴 수 있다면 오늘의 만남이 헛되지 않을 터! 알았네.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더 이상 설득하려하지 않겠어.”

이렇게 쉽게?

소환단까지 퍼주면서 매달린 사람치고는 포기가 너무 빠르지 않은가.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남천휘의 물음에 일청대사는 맥차를 들이켰다.

“자네의 무학은 참으로 신묘하더군. 천하공부출소림이거늘 나조차 종잡을 수가 없었어.”

“강자만 찾았다면 비경회가 인력난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비화를 밝히라는 뜻이다.

일청대사의 맑은 눈빛이 남천휘의 속내를 헤집었다.

“두 번째였네.”

“······.”

“소림의 제자가 아니면서 달마시안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은 자는 자네가 두 번째였네.”

남천휘는 한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첫 번째는 누구였습니까?”

“산적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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