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대협, 간웅, 그리고 또? (3)
남천휘는 지체 없이 칼을 뽑았다.
“어디를 잘라 줄까?”
하나 소혜는 웃지 않았고, 오히려 힘이 빠진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저 지금 진지해요.”
그래, 빗방울이 굵어지는 걸 보니 알겠다.
남천휘가 탁자 아래로 손가락을 튕기자, 두툼한 주머니가 나타났다. 그는 은자가 가득 든 주머니를 묘한 미소와 함께 건넸다.
“으이구, 우리 소혜. 돈 필요 했냐?”
그 돈이 제발 혼인 비용은 아니기를 바란다.
하나 소혜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 미운 다섯 살짜리 딸과 대화하는 기분이 이런 것인가 싶다.
“요새 맡은 일이 많지?”
슬쩍 운을 뗐다.
한데 소혜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군. 너도 사람이었구나.
슬슬 월봉 재협상의 시기가 다가온 듯했다.
남천휘는 모든 걸 깨우친 사람처럼 소혜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런 일은 막 총관께 가야지. 내가 잘 난건 사실이지만, 보이는 것과 달리 실권은 없거든.”
월봉 협상의 달인인 막대통에게 떠넘겼다.
‘응?’
한데 소혜는 눈썹을 역팔자로 만든 채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이건 청소 하지 않았을 때와 말없이 외출했을 때에나 보일 법한 표정이 아닌가.
“삼공자.”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소혜가 갑작스레 남천휘의 손을 잡아챘기 때문이다.
“저 이제 그만 할래요. 도저히 못하겠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한 피로감이 배여 있었다. 단순히 월봉을 올리거나, 투정을 부리는 것이 아닐 터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고왔던 손은 푸석푸석하게 메말라 있었다.
“앉아봐.”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자.
소혜는 그녀답지 않게 푸념을 했다.
“몸이 힘들고, 잠을 자지 못하고, 밥을 걸러야 하는 건 참을 수 있어요.”
곡부남가는 예로부터 홍익(弘益)과 화목(和睦)을 가문의 기틀로 삼았다. 그렇기에 사람을 쓸 때에는 예의와 법도에 따랐고, 넉넉히 대우하는 것이 가풍이다. 그러니 곡부남가에 있는 가솔들은 시비나 하인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돈을 받고 일하는 고용인에 불과했다.
소혜도 마찬가지였다.
남운군이 고아였던 그녀를 거뒀고, 안자영은 소혜를 딸처럼 여기며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런 그녀의 재주는 일개 시비의 역량을 뛰어넘었다.
“제가 재밌어서 시작한 일이지만······.”
문제는 강호(江湖)였다.
그녀는 곡부남가에 줄을 대기 위해 몰려든 상인과 표사들을 대접하면서 온갖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녀가 진위 여부를 파악한 후 쓸 만한 정보로 가공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곡부남가는 없다. 남천휘가 돌아오기 전 봉황곡에 의해 주춧돌마저 가루가 됐으리라.
하여 소가주는 그녀의 공을 높이 사 내원의 자리를 만들었다. 향후 곡부남가를 찾아오는 자들의 접대를 도맡게 된 것이다.
얼핏 보면 일거리만 늘어난 듯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상인과 표사들을 줄 세울 수 있는 권력이 주어진 셈이다.
“남가는 제게 고향이자, 본가나 마찬가지랍니다. 그래서 단순히 그들을 접대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정보를 더욱 광범위하게 모아보려 했어요.”
남천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끔뻑였다.
방년의 소녀가 정보단체를 만들려고 애쓸 때 자신은 무엇을 했나 싶다.
◎ 곡부남가의 다루를 물려받은 후 매일 같이 호의호식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싶어 하셨습니다.
아흑! 그만 좀 닥쳐.
남천휘는 마음속에 내리는 폭우를 진정시키며 소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소혜는 상단과 표국에 제안을 했다.
상생과 공존을 위해 상행이나 표행 도중 알게 된 정보를 공유하자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모두 난색을 표했다.
입이 가벼운 자의 말로는 비명횡사가 아니던가.
그러니 섣불리 입을 놀렸다가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했다.
“그렇구나. 눈치를 본다는 거지?”
남천휘는 당장 뛰쳐나가서 상단과 표국을 소집할 기세였다. 하나 소혜가 한 숨과 함께 남천휘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모두 동의했어요. 어차피 어느 산에 산적이 터를 잡았고, 있어야 할 호랑이가 없어졌다더라. 이런 식의 정보였기에 거부감이 덜했어요.”
“아, 그래.”
소혜는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그렇게 단편적인 정보가 제게 모두 집약되는 순간 뭔가 근사한 것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입가의 환한 미소로 보았을 때 일거리가 지겨워진 것은 아닌 듯했다.
“독점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야?”
소혜는 고개를 내저었다.
“제게 정보가 모이면 쓸 만한 것을 분류해놓은 후 소식지로 만들어 각 지소에 배포할 생각이랍니다. 지소의 건립은 소가주께서 허락해주셨기에 이미 진행 중이고요.”
“소식지?”
“네. 소식지의 명칭은 엇갈리고, 만나는 상인과 표사들이 화로 곁에 둘러앉아서 담소를 나눈다는 의미로 교차로라고 지었어요.”
교차로(交叉爐)라.
소혜의 진심이 느껴질 만큼 따뜻한 명칭이다.
한데 정보를 모으게 되었고, 지소까지 건립이 가능하다면 문제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저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무한상사의 일은 제게 있어서 네 번째랍니다. 한데 네 번째로 중요한 일 때문의 더 중요한 업무에 매진하지 못하고 있어요.”
무한상사(無限商社)는 소혜가 추진하고 있는 비영리 정보단체의 명칭이다. 상인들의 이권이 무한할 수 있도록 신에게 경배하자는 의미였다.
“그런데 너한테 무한상사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어?”
소혜의 얼굴이 까맣게 물들었다.
“이것 보세요.”
그녀는 남천휘의 소매를 탁자 위에 올렸다.
뭘 보라는 것인지 모르겠네.
한데 그녀는 소매의 끝이 헤진 것을 보고 눈시울을 붉히는 것이 아닌가.
“삼공자를 보필하는 것이 제게 가장 큰 업무인데. 옷이 헤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예전에는 작은 얼룩도 일각 이상 지나치지 않았어요. 한데 지금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잖아요.”
이게 그렇게 눈물을 흘릴 정도의 큰일인가?
아니, 애초에 무한상사 쪽이 훨씬 더 대단한 일이고, 우선시해야 할 중요 업무잖아.
“저 같이 게으른 아이는 혼이 나야 해요.”
남천휘는 소혜의 속내를 알 수 없기에 눈만 끔뻑였다. 소혜가 조금만 더 예뻤다면 미연시가 발동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모든 일은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데 답답한만큼 궁금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뭘까?
소혜는 훌쩍거리며 대꾸했다.
“토끼장 청소도 해야 하고, 총관께 술도 받아다드려야 해요.”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야, 너 왜 그래? 무서워.’
지나가는 코흘리개 아이를 붙잡고 물어봐도 경중을 알 만큼 명확한 사안이 아닌가.
하나 소혜의 눈빛은 삼공자, 토끼장, 술을 논할 때 가장 빛났다. 심지어 요즘 재미를 들였다는 무한상사를 거론할 때보다 더했다.
이걸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뭐가 문제인지는 알았어. 한데 형이나 막 총관이 아니라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야?”
소혜는 활로가 생겼다고 여겼는지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저야 재미로 시작했지만, 이것은 명백하게 강호의 일이잖아요. 그리고 삼공자는 모르겠지만, 곡부남가의 창고에는 금은보화가 쌓여있어요. 아! 삼공자는 모르겠지만, 산동성 밖에서도 곡부남가와 계약을 하려고 줄을 섰답니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삼공자는 모를 거예요. 신공부가 봉문 아닌 봉문을 했고, 청도문은 몰락했잖아요. 그러니 산동강호는 북의 황보세가, 남의 곡부남가를 대표로 해야 한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어요. 칫! 삼공자는 모를 걸요? 요즘 소가주께서 여기저기서 찾아오는 매파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으실 정도랍니다.”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천휘, 너는 아무 것도 몰라.‘라는 외침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어! 잠깐, 진짜 환청이 들리는 것 같은데?
◎ 저, 아닙니다.
의심스럽지만, 일단은 나중에 보자.
남천휘는 호흡을 가다듬은 후 말했다.
“알았어. 신교대에 말해놓을게.”
그가 후기지수를 뽑을 때 지적인 수준도 감안하지 않았던가. 신교대 내에서도 머리 좋은 녀석들을 골라내면 무한상사 정도는 감당할 수 있으리라.
“안 돼요. 신교대는 현재 각지에 파견 나가서 쉬는 날도 없이 일하고 있다고요.”
아, 그래서 며칠 사이 아무도 안 보였구나.
이래서야 진짜 아무 것도 모른 채 허송세월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다.
“이제 곡부남가도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창고에 쌓인 재화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각지의 사정에 능통하며, 향후 곡부남가의 발전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해요. 그런 사람을 가리켜 강호에서는 군사라고 한다지요?”
“어. 그런 것 같더라.”
“이 기회에 군사부를 창설하시고, 인재를 모으는 건 어떠세요?”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토끼장 청소에 매진하는 여아의 입에서 흘러나올 내용이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소혜에게 군사 자리를 맡기면 향후 수십 년이 편할 듯했다.
“그럼 차라리······.”
소혜가 단칼에 잘랐다.
“저를 잘라주세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로구나.
결국 남천휘가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곡부남가의 백만금도 토끼를 이기지 못하는구나.’
잠시 후 소혜는 비틀거리며 들어섰을 때와 달리 기분 좋게 자리를 떴다. 희희낙락하여 콧노래까지 부르더니 토끼 우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천직은 따로 있는 건가.’
남천휘는 진저리를 치다가 상태창을 띄웠다.
소혜의 말처럼 제대로 된 군사가 필요했다.
막 총관의 능력은 거래와 상행에 편중됐고, 서산노옹은 인망이 높을 뿐 머리를 쓰는 재주는 검증되지 않았다.
‘성시가 꽤 괜찮아 보이지만······.’
혈검살의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런 이에게 군사라는 중임을 맡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외부에서 초빙해야 하는데.’
남천휘가 문파관리에서 인사를 활성화했다.
인사로 인해 나타난 목록은 인명, 인재, 발탁이다.
재야인재를 활성화하는 순간 놀랄만한 광경이 벌어졌다. 예전보다 재야인사가 수십 명이나 늘어났고, 모든 이가 파랗게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이 사람들 모두 등용이 가능하다고?’
남천휘는 자신의 위세를 확인하듯 수십 개의 파란 빛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급 문사도 등용하기 힘들었던 예전을 떠올리니 그야 말로 격세지감이 몰려왔다.
“크하! 어쨌든 쉽게 해결되겠네.”
하오문이나 개방을 통해 저들의 정보를 확보한 후 쓸만한 자를 골라내면 되지 않겠는가.
한데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알림이 울렸다.
◎ 재야인사의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y/n)
예전에는 없던 기능이다.
재이에게 물어봤더니 VIP4등급이 되면서 새롭게 개방이 된 기능이라고 했다.
‘호오, 좋아. 가까운 자부터 한 번 보자.’
그러자 재야인사에 대한 정보가 발탁무인을 고를 때처럼 나타났다.
이름 : 포운석.
- 거리 : 6783m
- 성장이 완료됐습니다.(위엄 형)
- 지식 6, 야망, 6, 충성 3, 신산 1.
- 현재 2 곳의 초빙을 받은 상태입니다.
- 삼고초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식이 6인데 신산은 1이라······.’
응, 너 탈락.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재야인사의 경우 능력 수치가 특별했다.
평균치를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의 상태창을 띄웠다.
이름 : 상관지요
- 거리 :14559m
- 성장이 완료됐습니다.(모사 형)
- 지식 4, 야망 3, 충성 1, 신산 3
- 현재 쫓기는 중입니다.
- 영입할 시 xx 방파와 특수 관계가 형성됩니다.
남천휘는 마침내 기준점을 잡았다.
놀랍게도 소혜가 재야인사로 표시됐기 때문이다.
소속원이지만, 현재 시비로 등록이 됐다.
한데 군사로 쓰려면 새로 영입을 해야 하는 듯하다.
이름 : 소혜
- 거리 : 341m
- 성장이 진행 중입니다.(만능 형)
- 지식 8, 야망 0, 충성 10, 신산 1.
- 등용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소혜가 이 정도였다.
‘야망이 없고, 충성은 하늘을 찌르고.’
남천휘는 소혜가 앞에 있었다면 몇 번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으리라. 한데 소혜의 능력치를 보고 있자니 대부분의 인사들은 마음에 차지 않았다.
등용을 하더라도 군사로 삼을 정도는 아니었다.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이 이렇게 없나?’
남천휘는 지도를 확장했다.
곡부남가에 머물던 지형도가 신공부까지 퍼져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성에 차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적당한 대상을 찾았으나, 이미 신공부에 뼈를 묻은 상태였다.
“아! 진짜 뛰어난 군사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면 좋겠다.”
넋두리처럼 투덜거리던 중이었다.
띠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