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214화 (214/305)

95, 대협, 간웅, 그리고 또? (2)

백결공은 어색하게 웃으며 부채를 흔들었다.

“하하, 허약한 서생의 몸이다 보니 겨울만 되면 이리 힘듭니다.”

광목진인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그래? 그럼 내가 약왕전에 전해서 보약이라도 한 첩 지으라고 명하겠네.”

한데 묘한 광경이 일어났다.

광목진인은 백결공의 대답이나 감사를 듣고 싶지 않은 듯 몸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무상.”

하후태경이 공손이 읍을 했다.

“예. 하명하시지요.”

“남천휘에 대한 정보가 사실이라면 대협의 자질을 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요. 그렇다면 싹수가 보일 때부터 맹에서 관리를 하는 게 좋지 않겠소?”

“군사의 혜안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벽촌의 후기지수이니 맹에서 사람을 보내 위무한다면 자연스럽게 품에 안가지 않을까 싶군요. 생각해놓으신 조합이 있는지요?”

광목진인은 백결공을 곁눈질로 살폈으나, 담담한 어조를 유지했다.

“구파에서 장로급 명사를 보내도록 하게.”

중진 중 한 명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장로를요?”

“큰 사람은 작은 인연을 크게 돌려주고, 큰 인연은 목숨으로 갚는다네. 장로원에는 시간이 남아도는 명사들로 가득하니 그 중 한 명을 보내도록 하게.”

무상은 중진들의 웅성거림을 끊고 대꾸했다.

“장로와 후기지수 두엇을 함께 보내겠습니다.”

“그리 하시게. 문상의 생각은 어떠한가?”

백결공은 잠시 다른 생각을 한 듯 황급히 부채를 흔들어 표정을 감췄다.

“좋습니다.”

하나 부채 뒤에서 눈동자는 북풍의 한설처럼 서늘하게 번뜩였다.

‘남천휘라. 심하게 거슬리는군.’

*

전서구는 북쪽뿐 아니라 남쪽으로도 향했다.

정보단체와 중소방파를 몇 곳이나 거친 전서구가 높다랗게 솟은 깃발 위에 내려앉았다.

창천(蒼天)

천하에서 오직 한 곳만이 푸른 수실로 창천이라는 두 글자를 상징으로 사용했다.

남궁세가(南宮世家).

검으로는 속세에서 으뜸이며, 선계를 논해도 무당과 화산만이 비견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기에 남궁세가의 가솔들은 언제나 당당했다.

안휘성 전체를 세력으로 삼았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으리라. 권문세족의 상징답게 뛰지 않았고, 놀라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니 누구나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데 점잖기로 유명한 남궁세가의 내원에서 찌를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가주, 이번 일은 묵과할 수 없습니다. 만병보고의 일로 인해 말이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남궁세가가 천하오대보검 중 하나인 천영검을 빼앗겼고, 만병보고의 음모에 당했다며 비웃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남궁세가의 이검이 무너진 동굴이나 뒤지고 다닌다며 손가락질을 합니다. 게다가 무림맹 정천단의 종자처럼 뒤따랐다지요? 그런 이검을 이대로 두실 겁니까?”

“가주!”

“가주! 용단을 내려주십시오. 제아무리 이검이 가주의 동생이라고 해도 공과를 가려야 합니다!”

노인들은 한 목소리로 이검을 규탄했다.

가주인 남궁재위(南宮載威)는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봤다. 평소 위엄이 넘치던 표정은 지쳐 있었고, 인자하던 눈매에는 짜증이 맺혀 있었다.

‘외란을 막아왔더니 내홍만 깊어지는 꼴이군.’

남궁세가는 오랜 세월 안휘성의 터줏대감을 자처했다. 그로 인해 안휘성에서 무가를 이루려면 가장 먼저 혈연을 맺으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 피로 인연을 맺다보니 안휘성에서 떵떵거리는 무가는 모두 남궁의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더 이상 외부 세력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공고한 성역을 쌓은 셈이다.

그렇게 외란(外亂)을 막았다.

한데 그러고 나니 내홍(內訌)이 터져버렸다.

남궁재위는 고개를 돌려 친제인 남궁재야를 규탄하는 노인들을 바라봤다.

십여 명 남짓한 자들의 눈빛이 담긴 건 탐욕이요, 흘러나오는 건 원망이라.

하나 저들 모두 남궁이었다.

단지 남궁재위는 직계였고, 저들은 방계였다.

그리고 그 차이는 매우 컸다.

“이검은 세가의 상징과 같소. 그런 그를 징치해야 한다는 것이 진정 그대들의 의지인가?”

방계의 수장 중 가장 연차가 높은 노인이 공수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가 아니겠습니까. 제아무리 이검이라고 해도 과가 있다면 죄를 묻는다. 이것은 곧 남궁세가의 정명함을 널리 알리는 초석이 될 겁니다.”

개소리였지만, 반박할 말이 없다.

남궁재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재야는 그 아이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마치 초연에 빠진 청년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개입할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동생을 위해 한 마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데 그 순간 기적처럼 한 줄기 전음이 귓가에 스며들었다.

[사실이냐?]

[예, 가주. 다섯 곳을 통해 전해진 정보는 동일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활로(活路)가 열렸다.

쾅!

남궁재위는 탁자를 내리 친 후 말을 이었다.

“들라.”

기다렸다는 듯 수하가 두툼한 종이 뭉치를 가지고 등장했다. 방계의 수장들은 지급으로 전해진 정보를 확인한 후 침음을 흘렸다.

“아.”

남궁재위는 조금 전과 달리 위엄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호의 골칫거리였던 칠대금문 중 한 곳이 몰락했소. 이검과 두터운 교분을 나눴던 남천휘가 홀로! 봉황곡을 무너트렸다는군. 참으로 대단하지 않소?”

지금껏 이검을 남천휘와 엮어서 규탄했던 이들에게는 뼈아픈 질문이었다. 남천휘가 대단할수록 그런 존재를 미리 알아본 이검 남궁재야의 혜검이 돋보이는 셈이다.

“크흠, 하나 세가의 신물인 천영검을······.”

“그만!”

남궁재위의 위엄에 내력이 더해졌다.

“천영검이 제아무리 보검이라고 해도 신외지물에 불과하오. 정파의 영웅이라는 자들이 보검에 얽매여서야 쓰겠소이까? 남궁세가의 신물은 창천이라는 깃말만으로 족하다. 그대들은 본가의 위세가 보검에 의지해야 한다고 믿는 건가?”

이제는 충성 여부까지 밝혀야 할 만큼 대화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방계의 수장들은 침묵했다.

남궁재위는 그들을 다독이듯 말을 덧붙였다.

“남천휘의 또래 중 그만한 명성을 쌓은 자가 몇이나 되겠소? 구파의 대제자, 오가의 소가주 정도나 가문의 위세를 빌려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게요.”

“······.”

“그들 중 우리의 뜻대로 다룰 수 있는 자가 있소?”

남궁세가가 자긍심을 지니듯 구파오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남는 건 뒷배가 없고, 홀로 성장한 남천휘 뿐이었다.

“크흠, 하나 어린 나이에 홀로 성공을 이뤘다면 오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를 다루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남궁재위는 입꼬리를 올렸다.

“방법이 있소. 내게 맡기시오.”

그렇게 오늘도 방계의 위협을 넘길 수 있었다.

남궁재위는 회의를 끝내자마자, 별채로 향했다.

동생인 남궁재야가 자숙의 의미로 칩거하는 초옥에 들어서는 순간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가주께 죄인이 인사 올립니다.”

가주는 이검 남궁재야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되었다. 더 이상 방계에서 너를 건드리지 못할 게다. 결국 네가 해냈구나.”

남궁재야는 가주의 설명을 듣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군요. 남 소협은 대협의 새싹은 보였지만, 이렇게 빨리 싹을 틔울 줄이야. 그야말로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은 밀어내는군요.”

그러자 가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뒷 물결에 밀려나는 것이야 자연의 섭리겠지. 하나 뒷 물결을 위해 한두 가지 정도는 남겨놓을 수 있지 않겠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소아가 남천휘와 작은 인연이 있었다는군.”

가주는 남궁소를 남겨 남천휘와 혼인을 맺게 하려는 게다. 의도는 좋았지만, 사람의 일이 어디 마음처럼 되던가.

남궁재야는 침음을 흘렸다.

“가주,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소아가 또래에 비해 미모가 돋보이나, 남 소협은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더군요.”

하나 가주는 개의치 않았다.

“자네는 그 아이를 보고 영웅이나 대협이 될 것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이것을 보게.”

남궁재야는 가주가 내민 두툼한 책자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것은 하오문과 개방, 그리고 산동성에 연이 있는 방파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네. 이 안에는 남천휘가 처음 등장했던 중평산장부터 봉황곡의 멸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적혀 있지. 그리고 본가의 군사들은 결론을 내렸네.”

“그게 무슨······.”

“남천휘는 영웅이 아니야. 간웅이지!”

가주는 남궁재야가 혼란을 수습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빠르게 말을 이었다.

“겉으로 보면 좋은 일만 하는 것 같지. 하나 세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네. 남천휘는 단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어. 게다가 그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마치 천신의 가호를 받는 것처럼 운이 좋았네. 만병보고의 독을 우연히 찾아내고, 동굴이 무너질 때 활로를 찾았으며, 봉황곡이 기습했을 때에는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다지? 게다가 봉황곡과 전면전을 치를 때에는 안개까지 꼈다는군. 그것이 안개인지, 연기인지는 구분할 수 없지만 말이야.”

“형님, 설마······.”

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남천휘를 높게 본다. 그는 계산 없이 움직이지 않아. 분명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놓은 후 적을 유인하는 방식을 쓴 듯하다. 그런데 그가 소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제가 본 바로는 그랬습니다.”

“크하하! 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뒷배라네. 더 이상 산동에서 머물 수 없으니 중원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힘을 빌리는 것이 우선이야. 남궁세가라면 구파를 제외하면 으뜸이니 남천휘가 반기지 않을 까닭이 없지. 소아를 마땅치 않아 보였던 건 연기일 게야. 소아처럼 어여쁜 아이를 마다할 수 있는 사내가 몇이나 될까? 분명 본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겠지. 그러니 우리가 적당히 신호만 보내면 두 아이의 내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남궁재야는 가주의 호언장담에 대꾸를 하지 못했다.

간웅(奸雄)이라니.

‘차라리 천신의 가호를 받는 쪽이 맞을 것 같은데······.’

*

곡부남가의 외곽에는 백여 개의 천막이 구름처럼 드리워졌다. 봉황곡의 멸문 이후 몰려드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대부분의 객은 소가주보다 남천휘를 찾았다.

결국 남천휘는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이른 아침부터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방파의 주인과 담소를 나눠야 했다.

“내 딸이 얼마나 예쁘냐면······.”

스물세 번 째 떡밥이네.

그렇게 예쁘면 데리고 오란 말입니다.

“본가의 잠재력은······.”

그렇게 뛰어나면 성공하고 찾아오시고요.

“고기가 부족해!”

남천휘는 점심 무렵 찾아온 소가주를 보며 이마를 짚었다.

“우리가 무슨 푸줏간이야? 고기 좀 그만 찾아.”

“이 녀석아. 본가를 찾아온 손님이라면 응당 배를 채워서 돌려보내야지.”

소가주의 고기타령을 한참동안 듣고 나니 정신이 혼미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예상치 못한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비 오냐?”

남천휘의 말에 소혜는 커다란 눈망울을 데굴데굴 굴리며 의아해했다.

“오늘 날씨 맑은데요.”

“그래? 그럼 좋은 소식이겠구나. 뭐야?”

하나 소혜는 한 숨을 내쉬었다.

“일이 생겼어요.”

남천휘가 무슨 일이냐고 반문하려는 순간 밖에서 하인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비 온다.”

“후우, 그럼 그렇지. 무슨 일인데?”

하나 소혜는 섣불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이 거무죽죽해질 때까지 침묵이 이어졌다.

“저를 잘라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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