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대협, 간웅, 그리고 또?
95, 대협, 간웅, 그리고 또?
남천휘는 한 숨을 내쉬었다.
“후우.”
체력의 소모와 별개로 정신적으로 지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안개가 서서히 흩어지는 가운데 드러나는 전장의 광경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이런 내게 지금 주는 게 기껏 똥이더냐?’
남천휘는 강기의 조건을 보며 헛웃음을 금치 못했다. 두 번째 조건이 초절정 고수를 이기는 것이라면 세 번째 조건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강기를 상대하려면 강기를 써야 해. 그런데 아직도 조건이 하나 남았다고? 시스템의 덕을 봐서 이긴 거잖아. 아닌 말로 꼼수라고. 이게 말이 되냐?’
◎ 당년의 정세로 비추어봤을 때 ‘특급 강호인 승급체계’의 존재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얼씨구, 비정상이라서 좋겠구나.
남천휘는 혀를 찼다.
어차피 재이에게서 좋은 말을 듣기란 요원했다.
결국 명성이 중원 전체에 퍼진 것으로 만족해야 할 터였다.
남천휘는 곡부남가를 향해 돌아섰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소중한 신교대의 대원 중 미혼약에 중독된 자들이 있지 않던가. 수하를 아끼는 주군으로서 기꺼이 치료를 해줄 요량이었다.
띠링-
◎ 히든 퀘스트가 발동했습니다.
정말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도망 노비라고 해도 이렇게 부려 먹지는 않으리라.
‘뭔데?’
《강호칠대금문》
- 봉황곡의 멸문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 향후 강호칠대금문의 인정을 받을 때마다 특별 보상이 지급됩니다.
※ 인정의 방식은 우호, 항복, 멸문, 몰살입니다.
힘으로 짓밟으라는 말을 참 어렵게도 하는구나.
한데 그것이 쉬울까?
남천휘는 잠시 강호칠대금문을 떠올렸다.
봉황곡의 여인들의 방파로 미혼약을 쓰는 것처럼 칠대금문은 저마다의 고유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홀로 칠대금문에 대적한다는 괴겁천마나 사령신이 돌아와야 가능할 만큼 난해했다.
‘그래서 안 할란다.’
어차피 히든 퀘스트는 단독으로 이뤄졌다.
그러니 무시한다고 해서 손해볼 것은 없으리라.
남천휘는 새로운 퀘스트가 등록되는 것을 확인한 후 기억 한 구석으로 미뤄두었다.
지금은 더 시급한 일이 있지 않은가.
곡부남가의 가솔들이 분주했다.
‘무슨 일이지?’
*
승리에 대한 함성은 오래 가지 않았다.
봉황곡은 멸문했고, 수많은 시신과 부상자를 남겼다.
- 비록 초대받지 않은 객이라고 해도······.
남천홍의 의지는 확고했다.
“힘들겠지만, 정리합시다.”
곡부남가의 가솔들도 다쳤고, 지쳤다.
하나 봉황곡을 홀로 감당한 남천휘만큼은 아닐 것이다. 또한 그것을 지켜보며 중심을 잡아야 했던 남천홍만큼도 아닐 터였다.
반쯤 넋이 나갔던 막 총관이 헛기침을 했다.
제아무리 강단 있는 그라고 해도 수백 명의 혈전은 생전 처음을 터였다. 하나 노회함을 증명하듯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 인력을 배분했다.
“시신은 의관을 정제한 후 관에 넣어라!”
“부상자는 혈도를 점한 후 의당으로 보내. 돈은 얼마를 줘도 좋으니 곡부 인근의 의원들을 불러 모아.”
“거기! 삼 조장은 혜소와 안면이 있으니 신공부로 가게. 의원과 자재에 관한 지원을 요청하도록 해.”
“북악대는 건물의 잔해를 정리한다. 일단 내일부터 먹고 살아야 하니 중앙대로부터 정비하시게!”
“북풍대는 대전 주변을 경호하고, 이 조장은 곡부남가 외곽을 살펴주시게. 그쪽의 덩치 형제는 조원을 나눠 인근 방파와 무관에 저간의 사정을 알려주는 것이 좋겠어.”
“서산노옹, 자네는 관부와 연이 있으니 현청에 가서 술 한 잔 하고 오시게. 어, 어! 백주검, 자네는 빼고. 자네까지 가면 그냥 술자리가 되잖아.”
막 총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솔들은 개미떼처럼 흩어졌다.
“역시 사람 부리는 건 어르신이 천하제일입니다.”
남천홍의 말에 막 총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자네 동생이야 말로 천하제일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 가서 제 동생이라고 소개해도 될까 모르겠네요.”
막 총관은 남천홍의 얼굴에 그늘이 있는 것을 보고 어깨를 두드렸다.
“사람의 삶을 증명하는 건 무한하다네. 자네의 동생이 무로 증명했듯, 자네는 인으로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수많은 사람의 꿈을 짊어진 사람이 이렇게 의기소침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남천홍은 무(武)와 인(仁)을 입안에서 굴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어르신은 달콤한 말을 참 잘하십니다.”
“클클, 그러니까 매일 같이 술을 마시면서도 쫓겨나지 않는 거라네.”
막 총관은 남천홍의 표정이 나아진 것을 보며 자식을 대하듯 기뻐했다. 아닌 말로 남운군의 행실은 나쁘게 보면 한량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부터 남천홍을 가르친 것이 그였다. 그러니 자식을 대하듯 즐거워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예전에는 가문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에 많이 힘겨워 했었지. 그래서 식탐이 늘었고, 그런 몰골로 변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남천홍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기 위해 새로운 소가주를 만들어보려 했다. 하나 이제는 남천홍도 한 사람이 어엿한 수뇌로 정한 듯보였다.
‘요즘 살도 많이 빠지고, 아주 훤칠해졌어.’
막 총관의 애정이 만들어낸 삐뚤어진 훤칠함이었다.
“두 분은 무슨 얘기를 그리 즐겁게 하고 계십니까?”
남천홍은 남천휘와 양방언이 함께 다가오자 양 팔을 벌린 채 말했다.
“본가의 안팎을 책임지는 두 분이 오셨구려.”
양방언은 머쓱해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여기 남 대협에 비하면 아이들의 병정놀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천휘가 봉황곡을 물리쳤다지만, 그 전까지 본가를 지킨 건 양 총교두가 아닙니까. 다시 한 번 본가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천휘가 말을 보탰다.
“맞아요. 양 교두. 어떻게 된 겁니까? 그곳에 있어야 할 신교대가 본가에 와 있던 것도 놀랍고, 봉황곡의 기습을 눈치 채고 대비한 것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일말의 의구심도 지녔다.
남천휘는 시스템과 퀘스트로 인해 봉황곡의 침입을 예견할 수 있었다. 하나 양방언의 대처는 남천휘보다 빨랐다. 제아무리 금군의 교두라고 해도 믿기 힘든 대처였다.
‘내가 모르는 뭐가 있는 건가?’
그 때 양방언이 시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곡부남가의 대영웅이 저기 있군요.”
“대영웅?”
남천휘는 양방언의 손끝을 쫓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개구리? 아니, 소혜?”
“네, 소혜가 큰 공을 세웠습니다. 아니, 소혜가 곡부남가를 살렸다고 봐도 무방하지요.”
소혜는 이 와중에도 밥을 챙겨 먹여야 한다며 커다란 솥 안을 휘젓고 있었다.
쟤가?
그러던 중 소혜와 눈이 마주쳤다.
철없는 녀석은 아직도 혈향이 가득하거늘 뭐가 그리 즐거운지 손을 흔든다.
‘에잇!’
남천휘는 소혜를 등지며 물었다.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지요?”
남천홍과 막 총관도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저간의 사정이 흘러나오는 순간 듣는 이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소혜는 아주 재주가 많더군요. 그 중 하나가 한 번 들은 건 잊지 않으며······.”
소혜는 곡부남가의 가솔이다.
그녀는 남천휘를 보살폈다. 한데 남천휘가 밖으로 나돌다 보니 그녀의 일거리가 사라진 셈이다.
결국 곡부남가의 대소사를 도맡았다고 한다.
“신공부의 재편 이후 곡부남가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소. 저마다 상단과 표국을 이끄는 이들이니 쉴 때마다 담소가 끊이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답니다. 소혜는 소일거리 삼아 이야기를 정리했고, 아예 산동을 오가는 상인과 표사들에게 돈을 주고 정보를 샀다는 구려.”
양방언은 허언(虛言)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지금 개구리가 소일거리 삼아서 정보단체를 만들었다는 거야?’
막 총관이 의문을 풀어주었다.
“정보단체를 만들었다고?”
양방언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그럴 리가요. 그저 흉내를 낸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보다 상인과 표사들이 푼돈에 진실만을 전했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다만 이번에는 운이 좋았습니다. 며칠 전 수련을 하던 중 소혜가 전서구를 띄웠더군요. 봉황곡이 나타날 것 같다며. 또한 봉황곡과 남 대협은 원한이 있으니 곡부남가가 위험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더군요.”
잠깐! 이건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잖아.
그도 그럴 것이 재이는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수많은 정보 중에서 사실만 골라낸 후 봉황곡의 습격을 예견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저건 정보단체를 만든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이 아닌가?’
참으로 믿기 힘든 결과였다.
“아하, 그렇군요. 소혜라면 늘 맡긴 것 이상을 해내곤 했지요. 그래서 정말 특별한 고기 요리는 늘 소혜에게 맡기곤 한답니다.”
고기 따위와 비교하지 마!
“클클, 소혜처럼 착한 아이는 복을 받기 마련이지.”
이건 착한 것과 관계가 없다고!
남천휘는 남천홍과 막 총관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저런 사람들이 수뇌부로 있는 곡부남가가 수만금을 벌어들이고 있는 현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양방언은 남천휘의 눈치를 살폈다.
상관을 앞에 두고 다른 사람을 칭찬한 것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크흠, 이번 일로 남 대협의 명성이 구주사해에 진동할 겁니다.”
남천휘는 시큰둥했다.
명성이 높아진다고 해서 포인트를 주거나, 특별한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강호칠대금문 중 말석이라고 하지만, 봉황곡 전체를 무너트렸습니다. 그것도 남 대협 혼자서요. 앞으로 유명세에 시달리시겠습니다.”
“에이, 뭐 그렇게까지 될까요?”
그도 그럴 것이 신공부를 재편하고, 청도문을 무너트렸음에도 일상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껏 이름이 퍼져봤자 산동 내에서나 회자되지 않을까 싶다.
탁-
그 때 남천휘의 앞에 그릇이 놓였다.
자연스럽게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음미했다.
“흐음, 역시 토끼탕은 진한 육수가 생명······. 엇! 너 언제 왔어?”
소혜는 탕을 나눠주며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양 총교두의 말이 맞아요. 숲 너머에서 전서구 날아가는 걸 본 사람들이 있어요. 한두 마리가 아니었데요. 아마 삼공자의 무위를 상부에 보고하려는 세작들이겠지요.”
와! 방금 진짜 정보단체의 수장 같았다.
남천휘가 놀란 표정을 짓자, 소혜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좋아하실 필요는 없어요. 숨어서 정보를 퍼트리는 것으로 보아 삼공자를 좋게 보는 쪽은 아닐 것 같네요.”
개구리가 던진 돌에 무심코 맞은 기분이다.
“흥! 그래봤자 이름도 없는 중소방파겠지.”
남천휘는 투덜거리며 빠르게 그릇을 비웠다.
맛은 있었다.
*
봉황곡이 패퇴한 후 전서구를 띄운 건 맞다.
다만 남천휘의 예상처럼 중소방파가 아니었을 뿐이다.
황급히 숲을 벗어난 전서구 중 한 마리가 도착한 곳은 높고, 험준한 산세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산세와 한 몸처럼 어우러진 수많은 전각들이 즐비했다.
무림맹이다.
외원에 도착한 전서구는 정보를 전한 후 숨이 다했다. 하나 무인은 전서구를 광주리에 던져넣은 후 황급히 상관을 찾았다. 종이의 상단에 검은 점 다섯 개가 찍혔기 때문이다.
“다섯 개짜리는 오랜만이로군.”
비경각의 상석에 앉은 광목진인은 침음을 흘렸다.
지난 번 거론되었던 만병보고 등장이나 백화교의 준동을 알리는 정보는 흑점 세 개에 불과했다.
문상 백결공과 무상 하후태경을 비롯해 군사부와 얽힌 십여 명의 중진 무인들이 모였다.
저마다 철석 같은 간담을 자랑하던 그들은 광목진인의 한 마디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봉황곡이 멸문했군.”
광목진인의 말이 아니었다면 여기저기서 의구심 섞인 질문이 쏟아졌으리라.
“요즘 자주 들리던 이름이지? 남천휘가 봉황곡을 깼어. 그것도 혼자. 대단하지 않은가? 최근 십 년 사이에 들은 소문 중 가장 놀랍군.”
“듣자 하니 고작 해야 스물을 넘겼다던데 믿을 수 없는 쾌거입니다. 강호칠대금문은 오랫동안 맹을 비롯한 정파의 골칫거리였지요. 그걸 해결했다니 참으로 대단한 후학입니다. 게다가 남천휘라면 신공부의 병폐를 바로잡고, 청도문의 악행을 멈췄으며, 만병보고의 음모를 파해하지 않았습니까. 이대로만 자라준다면 장차 정파의 큰 기둥이 되겠습니다.”
좋은 말과 함께 나쁜 말도 들려왔다.
“봉황곡은 계집들의 미혼공을 제외하면 골칫거리가 될 뿐 두려운 대상은 아니었지요.”
“그래도 봉황곡의 곡주에만 전해지는 빙정지는 제법 훌륭한 지법이 아닌가.”
“아마 합공을 했겠지요. 소문을 다 믿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추가 보고도 확인한 후에 판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남천휘가 봉황곡주를 홀로 상대한 사실을 믿는다면, 강소성에서 패악을 부리는 사부라는 자가 초절정 고수 두 명을 일 수에 즉사시켰다는 말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광목진인이 손을 들어 중진들의 대화를 끊었다.
그는 묘한 눈빛으로 문상 백결공을 응시했다.
“문상.”
“예, 군사.”
“어째 표정이 좋지 않군. 배라도 아픈 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