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진짜 일기당천이다! (2)
무인이 무적을 논한다는 건 경솔한 언사일 터였다.
하나 지금 이 순간 봉황태후는 남천휘의 읊조림에 반박할 수 없었다.
아니, 반박하지 못했다.
남천휘는 그럴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쇄애액!
칼끝이 안개를 뚫고 꽂혀들었다.
사각에서 쇄도하는 것만으로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한데 심지어 시계가 온통 안개로 가려졌으니 손발을 묶고 싸우는 것처럼 답답했다.
“네 이 놈!”
봉황태후의 나삼은 곳곳이 찢어져 속살을 드러냈다.
하나 그녀는 수치심 대신 분노를 폭발시키며 으르렁거렸다.
이미 몇 번의 도격을 허용한 탓에 피가 낭자했다.
“네 놈이 사내라면 당장 내 앞에 나타나라!”
희미한 바람과 함께 안개가 일렁였다.
하나 안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치 진법처럼 공터 내를 휘돌았다.
“크아! 정정당당하게 붙어 보자! 이 개종자야!”
그 순간 진흙이 튀기며 백룡도가 안개를 휘저었다.
발목 높이로 휘둘러진 칼질에 봉황태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금만 늦게 반응했다면 발목이 잘렸을 터였다.
“기습이나 하는 주제에 정정당당이라는 말이 나오나? 옷을 벗고 다니니까 염치도 벗고 다니는 건가?”
봉황태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수치심 때문이 아니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남천휘가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지금껏 그녀는 단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았다. 신중하게 모든 것을 처리했기에 봉황곡마저 아무런 피해 없이 먹어치우지 않았던가.
한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지독한 무력감.
육신의 능력은 예전과 같거늘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분통이 치밀었다.
“으아아아아아아!”
남천휘는 안개 속에서 봉황태후의 발광을 지켜봤다.
적선단과 벽선단을 통해 생명력과 내공력은 최상의 상태를 유지했다.
하나 그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초절정이라는 건 정말 대단하네.’
남천휘는 가용 포인트를 대부분 소모하여 봉황태후의 이목(耳目)을 가렸다. 그런 이점을 활용하여 봉황태후를 궁지에 몰았다.
하나 거기까지였다.
백룡도와 흑린도가 봉황태후의 몸을 벤 횟수만 해도 벌써 여섯 번이다. 하나 피륙의 상처일 뿐 치명적이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초절정 고수의 기감에서 비롯됐다.
사실 남천휘는 지금껏 초절정에 대하여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철투를 통해 뭇 고수들을 쓰러트리지 않았던가. 게다가 초절정에 근접한 무림맹의 정무단주에게 승리를 따냈다.
하나 넘어선 자와 근접한 자는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를 보였다.
‘오감에 의지하지 않는 것 같은데.’
봉황태후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녀의 인성과 행적은 제외하면 진짜 고수의 솜씨였다. 그녀는 이목이 차단되는 순간 오직 기감만으로 남천휘의 공세를 회피했다. 마치 오감증폭제를 무한대로 사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봉황태후가 두려운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물약과 안개가 있었고, 그녀는 아직 절대지경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니 시간이 흐를수록 승자와 패자는 명확하게 갈라지리라.
하나 진짜 초절정의 고수를 상대한다고 해서 우쭐할 생각은 없다.
‘만약 성소가 없었다면 쉬운 싸움이 아니었을 거야.’
제아무리 물약을 사용한다고 해도 정신적으로 지치는 것까지 해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소의 도움이 있었기에 봉황곡의 무희들을 쉴 새 없이 베고, 봉화태후를 상대하면서도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게다.
그래서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초절정 고수의 진짜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낼 생각이다.
한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띠링-
◎ 적선단을 과다 복용한 상태입니다.
◎ 벽선단을 과다 복용한 상태입니다.
응?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는 것 아니었나.
남천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오죽했으면 봉황태후가 처음으로 남천휘의 기척을 잡아내고, 검기를 날렸을 정도였다.
따당-
검기를 튕겨낸 후 재차 안개로 몸을 휘감았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 과다 복용으로 인해 중독이 될 수 있습니다.
중독되면 간식 삼아서 물약을 마셔야 하는 건가?
그렇게 된다면 그것도 우스울 터였다.
어차피 입이 심심할 때마다 육포를 먹지 않았던가.
천품 육포에 물약을 적셔 먹는다는 기분으로 즐겨 보자.
‘는 사양하겠어.’
앞길이 창창한데 중독자가 되어서 레벨 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 보는 건 충분해.
남천휘는 눈을 빛냈다.
이제 본 것을 보여줄 차례였다.
더 이상 안개에 숨지 않았다.
백룡도와 흑린도를 역으로 휘두르는 순간 안개가 비단처럼 휘감겼다.
쇄애애애액!
“네 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봉황태후는 입이 귀에 걸릴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피로 물든 얼굴은 악귀의 형상과 같았고, 그녀의 검초는 악귀의 손짓처럼 음험했다.
운무와 혈무가 뒤엉키는 순간 공간이 일렁일 정도의 파열음이 쏟아졌다.
터터터터터텅!
도기와 검기가 쉴 새 없이 충돌했다.
남천휘의 웅혼한 내력과 봉황태후의 서늘한 기운이 서로를 짓눌렀다.
‘생각보다 할 만한데?’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았다니!’
봉황태후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현실이다.
남천휘는 불과 이틀 전만 해도 홍택호에 있지 않았던가. 쉬지도 않고 돌아온 후에는 봉황곡 전체를 상대해야 했다.
게다가 탄강까지 선보이지 않았던가.
‘······.’
남천휘가 초절정에 올랐다면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직접 검을 맞댄 결과 그렇지 않음을 확신했다.
종잡을 수가 없다.
봉황태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세상에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거늘.’
남천휘는 알지 못했다.
예전도, 지금도, 내일도 그를 상대하는 모든 존재는 이와 같은 위화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경지.
그리고 그것은 반석(盤石)같은 고수의 마음에도 틈을 만들었다.
봉황태후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껏 실패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녀는 눈앞의 현실의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힘으로 누르려 했다.
“찢어발겨 주마!”
재차 강기가 솟구쳤다.
한순간 안개마저 밀어낼 만큼 강기의 여파가 남천휘의 전신을 짓눌렀다. 지금까지 그녀가 가늠했던 남천휘라면 전력을 다해서 막아야 내야 할 만큼 강렬한 공세였다.
‘지금!’
남천휘가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특기 목록 전체가 요동을 치듯 변화했다.
◎ A등급 특기 ‘쌍수’의 레벨이 5가 되었습니다.
◎ A등급 특기 ‘집중’의 레벨이 5가 되었습니다.
◎ A등급 특기 ‘도수’의 레벨이 5가 되었습니다.
VIP 포인트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이미 봉황곡의 무희들을 상대하면서 상당량의 포인트를 획득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장로와 환희십처로 얻을 수 있는 포인트는 일반 곡도의 몇 배였다.
한 마디로 받은 만큼 사용했다.
그리고 백룡과 용린을 쥐었을 때만 활성화되는 A급 특기 ‘분쇄(粉碎)’와 ‘참격(斬擊)’마저 5레벨로 끌어올렸다.
고오오오-
한순간 남천휘의 발밑에 안개가 와류를 그리듯 휘돌았다. 그리고 검강이 내리꽂히는 순간 회오리처럼 솟구쳤다.
콰콰콰콰콰쾅!
도기를 만들었으나, 검강을 막을 수 없다.
도사를 흩뿌렸으나, 검강을 막을 수 없다.
도막을 펼쳐봤지만, 검강을 막을 수 없다.
강기는 지척에 이르렀다.
봉황태후의 내력은 빙공에서 비롯됐다.
그렇기에 인접한 것만으로도 뼈가 시리고, 피부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죽어!”
원념이 담긴 일갈.
하나 남천휘는 갈지자를 그리며 뒷걸음질쳤다.
봉황태후로서는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
“너!”
강기의 위력은 단순히 내력을 뭉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강기를 만들어내는 순간 시전자의 성취에 따라 주변의 공간이 반응했다. 그러니 하수라면 강기 앞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기에 강기는 강기로 응수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게다.
한데 남천휘는 강기를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강기의 권역에서 너무도 손쉽게 벗어났다. 그 와중에 도기와 도사, 도막을 연이어 펼쳤다. 깨지고, 찢기고, 흩어져도 쉼 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
‘막을 수 없으면 피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지만, 그러다가 죽으면 누가 책임 질 건데?
그깟 명예는 개나 주라지!
◎ 안개로 인해 시계 확보가 불가능합니다.
아! 개한테 안줘도 되겠구나.
안개가 자욱하니 승자와 패자만 알려질 뿐 과정은 알려지지 않을 게다.
남천휘는 더욱 빠르게 안개를 밟고, 내달렸다.
관련 특기를 최고까지 올려놨으니 몸놀림은 섬전과 같았다. 그림자가 남아 번들거리고, 용린쌍도의 잔영이 번뜩일 때마다 봉황태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봉황태후는 검강(劍罡)을 스스로 거뒀다. 절대지경에 오르지 못한 이상 한정된 자원으로 만들어낸 강기였다.
“크흑!”
봉황태후는 강기를 거두자마자, 검을 세워서 전방을 막았다. 팽이처럼 휘돌던 남천휘의 백룡도가 검신을 후려쳤다.
텅!
봉황태후는 이를 악 물었다.
반탄력이 상상 이상이다.
놈은 멀쩡한 수준을 넘어 더욱 활기찼다.
터터터터터텅!
팽이처럼 회전할 때마다 백룡도와 흑린도가 쉴 새 없이 검을 두들겼다.
그 순간 미세한 파열음이 봉황태후의 귓가에 들려왔다. 벼락처럼 강렬하게 꽂혀든 괴음의 정체는 검의 최후를 예고했다.
가느다란 금이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콰직!
결국 봉황태후의 검이 깨졌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봉황태후가 노리던 절묘한 순간이었다.
솨솨솨솨솨솻!
수백 개의 검편(劍片)이 암기처럼 전방으로 흩뿌려졌다. 남천휘는 재빨리 쌍도를 휘돌려 모든 파편을 튕겨냈다.
팟-
그 때였다.
봉황태후의 손가락이 공간을 격한 채 꽂혀들었다. 마치 얼음처럼 투명하게 번들거리는 검지의 정체는 빙정지(氷精指)였다.
‘닿아라!’
접촉만 한다면 빙정기의 기운이 남천휘를 옭아맬 것이다. 지금은 멸문한 북해빙궁의 비전 중 하나가 빙정지였다.
한데 봉황태후는 남천휘를 찌르기 직전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허를 찔려서 당황해야 할 남천휘의 눈동자가 너무나 잔잔했다.
아니나다를까 남천휘가 손바닥을 보였다.
그리고 봉황태후의 빙정지를 고스란히 받아냈다.
쩡-
장심(掌心)을 타고 푸르스름한 기운이 거미줄처럼 퍼졌다. 이제 빙정지의 기운이 혈맥을 타고 심장을 옥죌 것이고, 단전과 뇌를 녹일 것이다.
하나 봉황태후는 눈을 부릅뜬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거미줄처럼 퍼지던 빙정지가 하나의 선으로 뭉쳐드는 것이 아닌가.
‘말도.’
남천휘가 팔을 뒤로 튕기는 순간 빙정지의 기운은 밀린 것처럼 어깨를 타고 반대편으로 흘렀다.
‘안 돼.’
반대편에 등장한 빙정지는 화살처럼 혈맥을 타고 쇄도했다. 그리고 왼 손 전체를 새파랗게 물들이는 순간 남천휘가 웃었다.
“오래 기다렸다!”
꽈드득!
왼 손의 관절마다 비명을 질렀으나, 결국 청광(靑光)에 휩싸인 주먹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것은 비천무상도의 투로를 따라 공간을 갈랐다.
쇄애애애애액-
벼락같은 일권이 봉황태후의 가슴을 후려쳤다.
콰직!
봉황태후의 양 손에 맺힌 푸르스름한 기운이 채 뭉쳐들지 못하고 자취를 감췄다.
즉사(卽死).
남천휘는 심장 부근이 움푹 주저앉은 봉황태후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제비의 복수다.”
띠링-
◎ 퀘스트 ‘봉황곡 최후의 날’이 완료되었습니다.
- 최초로 초절정 고수에게서 승리했습니다.
- 강기 활용을 위한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2/3)
- 봉황곡이 멸문했습니다.
※ 남천휘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확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