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209화 (209/305)

93, 일기당천(一氣撞天).

93, 일기당천(一氣撞天).

《2-2, 봉황곡 최후의 날.》

- 봉황곡과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 봉황곡주가 접근 중입니다.

- 곡부남가의 평화를 위해 봉황곡을 무찌르세요.

새로운 퀘스트였다.

남천휘는 퀘스트 목록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퀘스트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을 받지 않았던가.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퀘스트의 상세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적의 규모가 머릿속에 고스란히 그려졌다.

《완료 조건》

- 봉황곡주 봉황태후 척살(0/1)

- 봉황곡 비영쌍위 척살(0/2)

- 봉황곡 팔대장로 척살(2/8)

- 봉황곡 환희십처 척살(0/10)

- 봉황곡 전력의 7할 이상 괴멸(78/277)

※ 대상자가 아니더라도 목표가 제거되는 순간 조건이 충족됩니다.

남천휘는 주변을 살폈다.

내원과 외원의 경계는 적의 흔적이 가득했다.

하나 무인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휴식을 취하거나, 운기조식에 빠져들었다.

남천휘의 경고대로 엄청나게 얻어터질 봉황곡을 맞이하기 위함이다. 그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좌우에서 호감 가득한 인사가 들려왔다.

“남 소협.”

흙투성이가 된 후기지수가 포권을 했다.

“우대경. 많은 발전을 이뤘구나. 축하해. 지난 번 내가 말했던 건 어떻게 됐지?”

우대경은 남천휘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 것만으로도 감격을 한 듯 보였다.

“네, 네?‘

남천휘는 피식 웃으며 검을 내뻗었다가 거둬들이는 시늉을 했다.

“검을 거둬들일 때마다 손목을 비틀었잖아.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나이 먹으면 손목이 아작 난다. 미리 고치는 게 좋아.”

“네. 반드시 고치겠습니다.”

우대경은 정인이라도 만난처럼 부드러운 눈빛으로 멀어지는 남천휘를 바라봤다.

‘내 모든 것을 기억해주시다니.’

하나 남천휘를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은 우대경만이 아니었다.

“백자훈! 완전 몰라보겠는 걸.”

“저를 기억하셨습니까?”

“당연하지! 곡부남가에 투신하라고 했을 때 네가 제일 먼저 수결을 했잖아. 안 그래?”

“맞습니다!”

백자훈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은 어미 새를 보듯 남천휘의 등을 좇았다.

“오호! 상체 많이 키웠네. 보기 좋다.”

남천휘는 왜소했던 효치(梟鴟)의 체구를 칭찬하며 힘쓰는 자세를 취했다. 우물쭈물하는 효치를 직접 가리키며 엄지를 추켜세우기도 했다.

“보검종, 동료를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아. 어때? 친구가 많아지니까 좋지?”

강호의 진창을 구르며 잔뜩 날이 섰던 녀석이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는 모습은 정말로 보기 좋았다.

이번만은 진심으로 시스템에 감사했다.

‘기분 좋네.’

시야 한 구석에 위치한 정보창에서 신교대원의 목록이 보였다. 그곳에는 그들의 성장과 감소는 물론이고, 특이사항까지 적혀 있었다. 오래 전 양방언에게 건넸던 보고서가 새롭게 갱신되어 간략하게 표시된 셈이다. 남천휘가 한 것이라고는 대원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효치 숫자와 목록의 서열을 비교하는 것이 전부였다.

◎ 정보창을 제거합니다.

신교대의 목록이 자취를 감췄다.

제아무리 시스템이 좋아도 온갖 정보창을 사방에 띄워놓으면 답답하기만 했다. 시야가 탁 트이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 때 재이의 경고가 들려왔다.

◎ 곡부남가의 영역에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곡부남가의 경계선이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도 확장.’

지형도가 확장되며 산세가 드리워졌고, 북쪽에서 접근하는 적도의 숫자가 확인됐다.

접근하는 속도가 제법 빠르다.

하나 남천휘는 조소를 흘렸다.

‘봉황곡주가 많이 급했군.’

붉은 점은 서른 개 쯤 되었다.

그러니 퀘스트에 명시된 인원과 동일했다.

‘예상 도착 시간은?’

정보 제공이 불가능하단다.

그 말인즉슨 VIP 포인트로 특기 ‘유지’의 등급을 올리라는 뜻이렷다. 기왕 생각난 김에 특기 유지의 등급을 5까지 채웠다.

◎ 적의 도착 예정 시각은 00:27:14입니다.

흠, 이각 정도 남았군.

조금 더 대원들과 수다를 떨면서 긴장을 풀어도 되겠는 걸?

◎ 너무 느긋하신 것 아닙니까?

남천휘는 피식 웃었다.

‘웃고 떠드는 것이 쓸모없어 보여?’

◎ 긴장을 이완하는 효과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래, 더 좋은 방법이 있겠지.

예를 들어 군략에 재주를 보인 양방언과 병법을 의논할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보상을 미끼로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그야 말로 더 좋은 방법일 뿐이다.

‘예전에 네가 했던 말 기억 나냐? 충성과 돈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했지.’

그렇기에 늦은 밤 막 총관을 불러내 신교대와의 계약을 서둘러 맺지 않았던가. 비록 독소조항이 가득한 불공정계약이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천상이 따로 없는 듯했다.

‘몽산에서 신교대의 개입을 확인한 후 생각했어. 양 교두는 내가 해준 것 이상의 보답을 해줬지. 그 이유가 뭘까 했더니...’

남천휘는 저 멀리서 대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다독이는 양방언을 바라봤다.

‘저 사람과 나는 마음을 나눴거든.’

양방언은 터전을 떠나기 전 흑도를 청소하려 했다.

그렇게 그가 양민들을 위해 나섰을 때, 남천휘는 그를 위해 나섰다. 그의 목숨을 구했고, 가족의 화합을 도왔다. 그 결과 양방언은 곡부남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돈값 이상의 것을 해주었다.

남천휘는 양방언과 신교대를 한눈에 담았다.

‘돈으로 저들의 충성을 살 수 있을지언정······.’

신교대의 대원들은 남천휘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형, 동생, 스승을 대하듯 따듯한 눈빛을 보였다.

‘신뢰는 살 수 없어.’

남천휘는 웃었다.

그런 그를 향해 재이가 전가의 보도를 사용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신교대원들의 머리 위에 존재하던 효치 숫자가 사라진 것이다. 이래서야 숫자로 이름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띠링-

◎ VIP 포인트 추가 사용으로 정보창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결제하시겠습니까?(Y/N)

돈으로는 못 사도, VIP 포인트로는 살 수 있었다.

‘장기 결제하면 혹시 할인이라도 해주나?’

◎ 제값을 치러야 제값을 하는 법이지요.

남천휘가 실의에 빠지는 순간 곁을 지키던 연하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슬쩍 다가서 근심 가득한 한 마디를 건넸다.

“은공,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나요?”

남천휘는 재이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냥, 꼭 이기고 싶은 상대가 생겼어.”

그 때 신교대의 일조장인 양천중이 양대안과 어울리다가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이익-

“남 대협께서도 보기 좋습니다!”

남천휘는 선발전에서 경박하게 굴다가 떨어졌던 양천중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 놈은 아무리 강해져도 여전하네.’

그는 여유로웠지만, 곁에 있던 연하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엇!’

그 모습을 보던 소혜의 남다른 더듬이가 꿈틀거렸다. 그녀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들떠 있는 남천휘를 보며 입술을 내밀었다.

‘호색한.’

역시 사내는 한결 같아야 좋은 법이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미간을 좁혔다.

한결 같다고 여겼던 사내가 의형제를 맺은 양천중과 상의를 탈의한 채 부둥켜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호색한?’

저것이 힘겨루기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

남천휘는 한참이 걸려서야 대전에 이르렀다.

신교대는 물론이고, 북풍대와 북악대까지 자식처럼 챙겼기 때문이다.

이제 일각 후 봉황곡이 도착할 예정이다.

“잠깐 모입시다.”

남천휘의 한 마디에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이들이 모두 모였다.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두 고생하셨고,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혈검살의 선배들의 은공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짐작이 되지 않을 만큼 감사합니다.”

마이는 콧수염을 빙빙 꼬며 웃었다.

“하하, 청도문을 함께 상대했던 전우끼리 보답은 무슨! 게다가 혈검살의는 누가 됐든 인연이 닿는 자를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네.”

홍칠이 말을 덧붙였다.

“그것이 곡부남가였을 뿐이야. 이곳은 충분히 좋은 곳이야. 앞으로도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

연하연 또한 성시에게 눈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동생을 위해 못할 것이 있겠느냐? 남 소협. 표정을 보아하니 봉황곡의 위협을 넘기기 위한 묘수라도 있는 듯하군요.”

남천휘는 빙긋 웃었다.

“있지요.”

그는 퀘스트의 내용을 토대로 확인한 봉황곡의 조직도를 알렸다.

“비영쌍위는 이름만 들어도 은밀하게 움직이는 살수나, 호위일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저들이 궁지에 몰린다면 반드시 택할 방책이겠지요.”

서산노옹이 침음을 흘리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남천홍을 비롯한 곡부남가의 가솔들이 모여 있었다. 그가 지금껏 겪어온 곡부남가는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광맥과 다르지 않았다.

하나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소가주를 비롯한 혈족을 노리겠군.”

그의 말처럼 남천휘를 노리는 것은 어려워도 가족을 죽이는 건 쉬웠다.

“그러니 혈검살의 형제들에게 호위를 맡기고 싶습니다. 특히 오공. 너는 크흠, 그거였으니 저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을 거야. 네가 자세히 살펴줘.”

오공의 진실된 정체는 의원을 꿈꾸는 학자로 가장한 살수였다. 마이를 만나서 살수의 업을 버렸지만, 배운 게 어디 갔을 리 만무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겨준 남천휘에게 눈인사를 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있겠습니다.”

마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냉정한 말이지만, 혈검살의는 이곳의 주요 전력이야. 우리를 모두 빼고 봉황곡을 상대할 방책이 있는 건가?”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외원의 담장을 허물어야겠습니다.”

양방언이 표정을 굳힌 채 대꾸했다.

“남 소협, 담장과 가산을 비롯한 후원의 여러 장소는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반드시 필요한 장애물이외다. 굳이 우리의 장점을 없앨 필요가 있겠습니까?”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저들이 모두 들어설 수 있을만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전면전을 펼치려는 겐가?”

백주검의 말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봉황곡주인 봉황태후는 초절정의 무인이다.

그리고 그녀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장로원주만 해도 수십 년 묵은 노고수가 아니던가. 게다가 환희십처가 펼칠 미혼공은 평범한 무희들의 것과 격이 달랐다. 아닌 말로 화웅단을 먹어도 해독이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저들은 이미 선봉이 시간을 지체함으로서 예봉이 꺾인 것을 알고 있을 것이야. 그러니 인근에 집결했다가 구름처럼 몰려오겠지. 전면전을 펼치면 승패는 금세 결정되겠지만, 이곳의 피해가 적지 않을 걸세.”

남천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저들이 일시에 달려들 것은 확실합니다. 하나 그 누구도 저를 지나칠 수 없을 겁니다.”

남천휘의 호언장담에도 좌중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사실 남천휘의 무공은 강호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이들만은 한 번씩 남천휘의 무위를 견식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과 별개로 우려가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맞아요!”

세인의 시선이 꽂혔다.

연하연은 이미 붉어진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전전긍긍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혜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침음을 흘렸다.

‘아, 한 발 늦었어.’

*

그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았다.

봉황곡주가 검지로 전방을 가리키는 순간 봉황곡의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무희들이 폭풍처럼 질주했다.

선봉은 팔대장로 중 가장 빠른 검법을 자랑하는 백묘선자였다

그녀는 곡부남가를 보는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정문과 담장이 있어야 할 곳이 평평했다.

마치 태풍이 쓸고 지나간 것처럼 길이 뚫린 게다.

그 끝에 곡부남가의 가솔들이 진을 쳤다.

‘훗, 전면전이라도 할 생각인가?’

만약 길이 좁았다면 속도를 늦췄으리라.

하지만 눈앞의 공터는 백여 명이 동시에 들어서도 남을 만큼 넓었다.

“가라!”

백묘선자의 외침에 무희들은 더욱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그 때 곡부남가에서 누군가 나섰다.

그는 양 손을 들어 무기가 없을 드러냈다.

소매가 흘러내려서 팔목까지 훤히 보였다.

‘설마 이제 와서 항복이라도 할 생각인가?’

백묘선자는 상대를 단칼에 찔러죽일 생각만으로도 살심이 치밀어 올랐다.

한데 사내가 주먹을 쥐었다 펴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무 것도 없던 공간에서 검이 나타나더니 사내의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닌가.

‘사술?’

어찌됐든 멈출 수 없다.

이미 기호지세가 아니던가.

백묘선자는 더욱더 속도를 높였다.

한데 사내에게 접근할수록 발이 무거웠다.

마치 철추를 매달고 뛰는 것처럼 어색했다.

그 순간 보이지 않던 와류가 흙먼지에 뒤섞인 채 휘몰아쳤다.

불길했다.

백묘선자가 불길함을 받아들이고, 뭐라도 하려는 순간이었다. 사내의 두 검이 얽혀드는 듯하더니 사자후와 같은 일갈이 터져 나왔다.

“일기당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