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207화 (207/305)

92, 우리 집에 왜 왔니? (2)

*

추성현을 지나 곡부 남부에 이르렀다.

남천휘는 곧장 본가로 향했다.

그러던 중 연하연과 처음 만났던 야산을 지날 때였다.

“어?”

“아!”

옛 추억에 잠겨 내뱉은 탄성이 아니었다.

산로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는 낭인들이 보였다.

연하연은 마치 호위라도 되는 것처럼 먼저 달려 나갔다. 그리고 시체를 이리저리 만지더니 낯선 사내의 품에 손까지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이런.’

남천휘는 그런 연하연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가 상관에게 보고를 하듯 자세를 바로 했다.

“여섯 명 모두 죽었어요. 피가 굳지 않고, 아랫배가 따뜻한 걸로 보아 일각에서 이각 사이에 죽은 듯해요.”

남천휘는 말없이 연하연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 동안 힘겹게 지냈겠구나.’

연하연은 초옥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초췌할지언정 청초함이 살아 있었다. 하나 지난 반 년 간의 도주 생활은 여인을 무인으로 바꿔놓은 듯했다.

“가자.”

남천휘는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하나 전보다 여유가 느껴졌다.

‘대화동이 텅 빈 이유가 있었군.’

몽산에서 성소 목록을 살폈을 때 세 곳에서 특이사항이 나타났다. 신공부와 곡부남가, 그리고 대화동이다. 앞의 두 곳은 공격을 받았지만, 대화동은 그저 텅 비었을 뿐이다. 양방언과 교관들, 그리고 마흔여덟 명의 신교대원들은 종적을 감췄다.

‘그 때 소혜가 알려준 양 교두의 실력이 진짜라면······.’

수백 명의 접근을 놓치지 않았으리라.

남천휘는 양방언을 떠올리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했다. 한데 우람한 팔뚝을 떠올리는 순간 양방언 대신 소용녀가 뇌리를 가득 채웠다.

‘훠이, 훠이.’

고개를 하나 넘자마자 한 무리의 시신이 다시 발견됐다.

연하연은 이번에도 머뭇거리지 않고 달려 나갔다.

“맙소사!”

“왜 그래?”

“매혹대가 분명해요.”

남천휘는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그럼 봉황곡이 왔다는 건가?”

연하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 때문에······.”

남천휘는 침묵했다.

행여 연하연의 말대로라면 섣부른 위로는 서로를 힘들게 만들 터였다.

“가자.”

걸음을 재촉했다.

곡부남가에 접근할수록 매혹대의 시신이 늘어났다.

대신 곡부남가나 신교대의 인원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곡부남가가 내려다보이는 구릉에 올라섰을 때였다.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읊조렸다.

“저럴 거면 우리 집에 왜 온 거야?”

*

백타선자는 남천휘가 강호에서 처음으로 확인한 세 자리 레벨의 고수였다.

그 때는 그랬다.

하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남천휘에게 있어서 백타선자란 고수가 아니라 연하연을 괴롭혔던 악녀에 불과했다.

이미 200레벨을 넘긴 천위검호를 상대하고, 초절정을 코앞에 둔 정무단주를 이기지 않았던가. 불과 반 년 사이 남천휘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성장했다.

이제는 봉황곡주라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구파오가의 장로라고 해도 붙어볼만 하지 않겠는가.

반면 백타선자는 예전 그대로였다.

이미 무인으로서 하락세를 보이는 자가 반 년 사이에 성장을 하면 얼마나 했겠는가. 심지어 수련에 힘쓴 것도 아니니 무공은 점차 힘을 잃었으리라.

탱탱했던 근육은 쭈글쭈글해졌고, 뻥 뚫렸던 혈맥은 노화로 인해 노폐물이 가득했다.

육신이 힘을 잃는 만큼 내력도 쇠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순리를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히 어두운 곳에서 늘 제멋대로 살아왔다면 더더욱 그럴 터였다.

백타선자 또한 다르지 않았다.

지난 반 년 사이 약해졌을지언정 자신의 무명은 더욱 높아졌다고 여겼다.

그녀뿐 아니라 백죽선자도 그랬을 것이다.

봉황곡의 모두가 그랬으리라.

그만큼 강호칠대금문의 이름값은 가볍지 않았다.

그러니 반 시진, 늦어도 한 시진이면 곡부남가를 강호에서 지울 수 있을 것이라 자부했다. 남천휘가 없는 곡부남가는 벽촌의 이름 모를 장원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으으.”

한데 그랬던 그녀가 한 시진이 지나도록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바로 곡부남가의 정문이다.

‘어째서 이런 삼류 방파의 문을 깨지 못하는 건가?’

봉황곡의 무희가 백 명이고, 매혹대의 무인은 이백 명이 넘었다.

이런 전력이면 신공부도 우습게 보였다.

한데 신공부도 우습게 짓밟을 것만 같았던 전력이 나무로 만든 문조차 열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문은 열려 있었다.

다만 그리 넓지도 않은 문을 막아선 세 명의 무인을 뚫지 못했다. 전력을 쏟아 부었다면 세 명의 무인이 초절정고수라도 되지 않는 한 이미 뚫었으리라.

하나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은 좁았고, 공격할 수 있는 숫자는 한계가 있다.

많아야 예닐곱 명이 전부였다.

게다가 담장에는 기름을 바르고, 철질려를 깔아놨기에 섣불리 월담을 시도했다가 죽은 자만 기십이다.

결국 정문을 뚫어야 했다.

“용산박! 가라.”

매혹대의 대주인 사마갈의 짜증 섞인 일갈이 들려왔다. 그 또한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막힌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본 곡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끝내고 받을 포상 때문이겠지.’

백타선자가 경멸 어린 눈빛을 내비쳤을 때였다.

한데 그녀가 다시 정문을 바로보기도 전에 비명이 들려왔다.

“크악!”

기세 좋게 달려 나간 용산박은 심장을 뚫린 채 절명했고, 용산박의 조원들은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허우적거리다가 무인들의 칼을 맞고 쓰러졌다.

‘버러지 같은 것들.’

백타선자는 봉황곡을 움직이려 했다.

음욕에 눈이 먼 자들에게 기대는 것부터가 수치스러웠다.

‘매혹대는 칼받이로 족하다.’

한데 그녀가 무희들을 부리려는 순간 매혹대주인 사마갈이 당황해하며 나섰다.

“선자. 매혹대에서 뚫을 수 있소.”

“쯧, 입구도 뚫지 못하는 것들이 무슨 소용이야!”

“소, 송구하오. 내가 직접 뚫으리다.”

사마갈은 수하들을 물리고 검을 뽑았다.

사뭇 비장해보일 수도 있는 광경이다.

하지만 백타선자는 코웃음을 쳤다.

이립의 나이에 초절정의 고수가 될 수도 있었던 자가 음욕을 위해 검을 뽑는 모습은 우습기만 했다.

“퇴!”

한데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사마갈이 나서는 순간 입구를 막고 있던 무인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무인의 자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군율에 따라 진퇴를 결정하여 승리를 따내는 장수의 자세였다.

사마갈은 크게 웃으며 자랑스러워했다.

하나 백타선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침음을 흘릴 뿐이다.

‘내가 알고 있던, 아니 세상이 알고 있는 곡부남가가 아니다.’

불현 듯 이곳은 남천휘의 터전임이 떠올랐다.

남천휘를 만들어낼 만한 저력이 있는 방파라면 용담호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모여 봐라.”

백타선자는 백죽선자와 사마갈을 모았다.

“사자, 당장 저 거지 같은 장원의 연놈들을 쳐 죽입시다!”

“하명하시지요.”

그녀는 백죽선자의 호전적인 일갈을 무시한 채 사마갈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곡부남가에서 탈출한 사람은?”

사마갈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없습니다. 저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완벽한 포위망을 구성했지요.”

“그렇다면 남천휘의 일가는 내원에 모여 있겠군. 구조도를 보자.”

백타선자의 말에 사마갈이 지도를 펼쳤다.

하오문에서 구한 지도에는 곡부남가의 구조도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말은 곡주의 명령과 같다.”

두 사람이 귀를 기울였다.

백타선자의 지극히 냉랭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정문을 통과하면 내원의 핵심까지 쉬지 않고 돌파한다. 매혹대가 앞장을 서고, 예봉이 꺾이는 순간 백죽이 무희들과 돌입하라.”

“사자, 굳이 그렇게 무리할 필요가 있겠소? 하나씩 쳐죽이면서 나아가면 될 터인데.”

“저도 백죽 장로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적이 암계를 준비해뒀다면 피해가 클 것입니다”

백타선자는 미간을 좁혔다.

저들은 무리와 피해를 논했다.

아직도 곡부남가의 저력을 눈치채지 못한 게다.“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족족 모두 죽여라. 그리고 곡부남가가 잿더미가 될 때까지 쉬지 않는다. 지금 당장 돌입한다.”

두 사람은 고개를 조아렸다.

“존명.”

그리고 잠시 후 여전히 삼백여 명에 근접한 대규모 무리가 정문을 부수며 외원으로 진입했다.

*

“적이 돌입했습니다.”

신교대원의 일갈에 대전에 모인 자들은 표정을 굳혔다. 하나 오직 신교대의 총교관인 양방언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곡부남가의 구조도를 내려다봤다.

“어느 쪽으로 오더냐?”

이미 곡부남가의 요처마다 신교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양방언은 대원의 보고가 이어질 때마다 붓으로 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읊조렸다.

“됐다.”

좌중에 모인 사람들 중 양방언보다 윗줄은 서산노옹과 백주검이다. 하나 한평생 강호를 떠돌았을 뿐 대대적인 혈투는 경험하지 못했다. 그것은 혈검신의들인 마이와 성시, 홍칠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기회라도 생긴 겐가?”

서산노옹의 물음에 사람들이 시선을 집중했다.

“제가 금군의 교두였다는 건 모두 아실 겁니다. 금군의 병법은 호위와 수성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렇기에 다수의 적을 상정하여 수련을 합니다. 그러니 신교대 또한 같습니다. 한데 상대는 우리보다 강하고, 다수인 것에 방심하여 일직선으로 치고 들어왔습니다. 분명 머릿수로 누르려는 것이겠지요.”

“호오! 우리는 적을 아는데 적은 우리를 모른다는 거로군.”

백주검의 한 마디에 좌중의 표정이 밝아졌다.

“양 교두의 혜안 덕분에 큰 위기를 넘겼어.”

양방언은 남천휘가 만들어준 정보에 자신의 수련 방식을 더했다. 그렇기에 신교대는 군부에서나 익힐 법한 척후와 잠입은 물론이고, 위계를 통한 교란까지 숙지한 상태였다.

“모두 곡부의 상인들이 도와준 덕입니다.”

남천휘로 인해 곡부남가는 산동성에서 가장 융성한 방파로 탈바꿈했다. 그러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표국과 상단이 오가며 거래를 이어갔다.

겉으로 쌓이는 것은 재화였고, 속으로 쌓이는 것이 정보였다. 양방언은 하오문이나 개방에 의지하지 않고, 상단과 표국을 통해 독자적인 정보망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양 교두. 맡겨도 되겠습니까?”

소가주인 남천홍은 적이 지척에 이르렀음에도 여유롭기만 했다. 여차하면 집도 버리고 도망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게다.

곡부남가의 힘은 가솔에게서 나온다.

그러니 겉으로 보이는 재화나 건물 따위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는 것이 가주인 남운군과 소가주인 남천홍의 의지였다.

“남 소협이 벽촌에 묻힌 저를 세상으로 끄집어냈습니다. 그로 인해 내자와 아들의 삶이 바뀌었으니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양방언이 눈을 빛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곡부남가를 지키겠습니다.”

남천홍은 빙긋 웃더니 한 자루의 검을 내밀었다.

“창고에서 가장 좋은 검을 가져왔습니다. 저를 대신해 곡부남가를 지켜주십시오.”

양방언은 마치 장군검을 제수받은 것처럼 감격을 금치 못했다.

“자! 그럼 제 생각을 말씀드리지요.”

잠시 후 서산노옹과 백주검, 그리고 혈검신의들이 자취를 감췄다. 또한 예전과는 하늘과 땅만큼 달라진 북풍대주 조상과 북풍대가 대전을 감쌌다.

양방언은 그 후에야 대전을 나선 후 마흔여덟 명의 신교대원을 마주했다.

후기지수들은 불과 두어 달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 이 모든 것이 신공부에서 자금을 조달해준 혜소의 덕이다.

“우리는 칠주야에 한 번씩 영약을 먹었다.”

“그렇습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가격은 알겠다. 한 개에 은자 천 냥이라고 하더군. 이곳에 셈이 빠른 자가 있던가?”

신교대원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은자 오십이만칠천 냥입니다.”

양방언은 웃었다.

“오십만 냥이라. 그럼 이제 밥값을 하러 가자.”

신교대원들은 고개를 까딱인 후 흩어졌다.

“양 교두, 조심하세요.”

남천홍이 조심스럽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하나 양방언은 오히려 기지개를 켜며 과장되게 몸을 풀었다.

“소가주. 내일부터 더욱더 바빠지실 겁니다.”

“왜 그런가요?‘

“곡부남가는 강호에서 처음으로 칠대금문 중 한 곳을 지워버릴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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